리츠레이2
싱그러운 초목이 우거진 수풀 속. 투명한 빛을 내리는 찬란한 해가 가장 높이 떠 있는 시간. 새파란 잎새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햇빛을 조명삼아 촉촉한 땅에서도 빼꼼히 얼굴을 내민 초록 풀잎이 산들바람에 하늘하늘 춤추는 곳이었다. 마치 나무들이 의지를 가지고 터준 듯 둥글게 트인 공간, 부러 심은 듯 뻣뻣하게 솟아난 잔디밭 위에 어린 아이 열은 거뜬히 누울 수 있을 정도로 큼지막한 테이블이 있었다.
눈부시게 하얀 테이블보를 옷처럼 얹고, 그 위에 또 어여쁘기 짝이 없는 고급 티세트가 종류도 가지가지. 어울리지도 않는 가지각색의 꽃을 엉성하게 꺾어 그저 화려하기만 한 화병에 대충 꽂아만 놓은 듯 한 꽃병도 서너 개, 색색 깔의 먹음직스런 마카롱 탑과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쿠키, 아기자기한 조각 케이크도 듬뿍. 정리도, 배열도 없이 그저 산만하게 놓여만 있을 뿐인 디저트를 둘러싸고, 널찍한 테이블에서 유일하게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것은 딱 봐도 고급으로 보이는 찻잔뿐이었다. 테이블의 크기만큼이나 가득 놓인 의자, 그 앞마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빈 찻잔. 어느 모로 보나 산만한 오후의 티 파티를 주장하고 있는 그 광경에, 하늘하늘한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카게야마 시게오, 통칭 모브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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쵸미시의 시오중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소년이 어쩌다 이 이상한 나라에 떨어져 버렸을까.
당사자인 모브조차도 도저히 알 수가 없는 물음이었다. 이 물음에 해답을 줄 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 있기나 할까. 아무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책가방을 챙겨 집을 나와, 평범하게 등교를 하던 모브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사방이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이상한 나라 한가운데였다. 그것도 저가 입고 있던 검은 단색 가쿠란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기분 나쁠 정도로 하늘하늘한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는 토끼 귀 같이 쫑긋 솟아 흔들거리는 하늘색 머리띠를 하고.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더군다나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탁 트인 초원을 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마주친 하얀 토끼 귀를 가진 사람인지 토끼인지 모를, 심지어 머리칼은 금발이던 토끼는 다짜고짜 싸움을 걸어오고. 가볍게 대화를 나누며 진정 시킨 후에는 다행히도 이곳에 관한 약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큰 귀를 축 늘어트린 채 모브와의 격한 대화중에 송송 빠져버린 털을 고르며 말을 해 주던 토끼는 갑자기 제 허리에 매달린 시계를 보고는 벌떡 일어나 사라져 버렸었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빠르던지.
어떡해! 늦어버렸어! 그렇게 말하며 쏜살같이 달려가던 토끼를 쫒아 숲에 들어간 모브가 만난 것은 나무 위에서 보라색 고양이 귀를 쫑긋이던 검은 머리의 고양이였다. 이름조차 말해주지 않고 사라져버린 토끼와 달리 예의바르게도 제 이름을 체셔, 라고 소개한 고양이는 모브를 참 잘 따랐었지. 모브가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고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물었을 때는 마치 본인이 집을 잃은 것 같은 표정으로 아는 것이 없다고 울먹이며 미안하다 말해왔었다. 그런 체셔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괜찮다 달래고, 그럼 알 만한 사람은 없냐고 물었을 때. 그 때 체셔고양이가 표정을 와락 구기면서도 떫게 입에 올린 사람이었다.
이상한 숲 속 어딘가에서 매일같이 바보 같은 티 파티를 하고 있는 미치광이 모자장수.
그는 모든 것이 뒤틀린 이 이상한 나라에서도 미친 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미치광이이지만, 이 이상한 나라에서 가장 머리통을 잘 굴리는 사람임에는 부정할 수가 없다고 했던가. 신랄하게 말하던 체셔고양이의 말을 뒤로하고, 서운해 하던 체셔고양이를 뒤로 하고, 모브는 그 모자장수를 찾아 숲 속 깊은 곳으로 찾아 들어 온 참이었다. 괜히 시간 끌 것 없이 저가 가진 초능력으로 휙 날아서.
구름이 몽실몽실 떠다니는 파란 하늘에서, 숲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웅장한 궁전을 보긴 했지만 그냥 무시해 버리고. 숲 전체를 쭉 둘러봤을 때 눈에 확 띄는 곳으로 모브는 제 몸을 날렸다. 첫 만남부터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면 상대가 놀랄 것 같아 티 파티가 열리고 있는 것 같은 곳에서 조금 떨어진 숲 속에 발을 내리고, 모브는 예의바르게 걸어서 티 테이블이 놓인 잔디밭을 밟았다.
그리고, 지금.
위에서 봤을 때에는 너무 멀어 재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 눈앞에 펼쳐지자 상상 그 이상인 것에 모브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제 아무리 체셔고양이가 미치광이라 했지만 얌전하게 티 파티만 하는 것이 무어 그리 대수일까.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 바람 부는 날에 바다에 띄워진 오리보트 만큼 흔들리고 있었다.
테이블 위를 어지러울 정도로 잡다하게 채우고 있는 디저트와 꽃 병. 찻주전자에 그득 담겨 있는 듯 주둥이에서 폴폴 풍겨져 나오는 짙은 차의 향이, 몰라도 십 수 가지는 될 법한 차의 향내가 온통 뒤섞여 머리가 핑글핑글 돌 정도였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큼지막한 테이블 가장 끝자리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제 입술을 적시고 있는 미치광이가 하나.
붉은 장미꽃 두 송이가 곱게 얹어진 수풀색의 우스꽝스런 모자를 갈댓잎 같은 머리에 쓰고, 큼지막한 하얀 줄무늬 리본 넥타이를 매고. 십 수 가지의 향내가 뒤섞여 뭐가 뭔지 구분조차 가지 않을 짙은 차향 사이에서도 향을 음미하듯 저가 든 찻잔에서 모락모락 나는 김에 코를 적셨다가, 느릿하게 홀짝이는 모습은 굳이 자기소개를 할 필요도 없이 그가 바로 체셔고양이가 말했던 모자장수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어, 카게야마군.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개성 넘치는 모자장수의 모습에 한 눈이 팔려 미처 살피지 못한 주변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모브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하얀 귀를 가진 금발의 토끼가 여전히 털이 송송 빠진 제 귀를 늘어트린 채, 그 위에 아까는 보지 못했던 파란 모자를 쓰고는 기분 좋게 쿠키를 집어 먹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토끼는 방금 전에 모브와 격한 대화를 나누었던 것도, 대화중이던 모브를 내팽개쳐두고 자신이 재빠르게 사라져 버렸다는 것도 잊어버렸는지 상큼하게도 웃으며 모브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손끝에 묻어 있던 쿠키 부스러기가 하얀 테이블보 위에 후드득 떨어졌다. 자기도 손을 흔들어 반갑게 인사를 해야 하나, 모브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이 눈을 감은 채 차를 음미하고 있던 모자장수의 눈이 느릿하게 떠졌다. 어색하게 손을 들어 올리려던 모브의 행동을 가로막듯, 모자장수의 입이 열렸다.
“황금시계가 어울리는 시계토끼군.”
“제 이름은 테루에요, 매드해터씨. 그리고 제 시계는 은색이고.”
어색하게 반 쯤 손을 올린 모브에게서 금세 관심이 사라졌는지, 토끼, 테루는 모자장수를 향해 제 큰 귀를 쫑긋 세웠다. 그 덕에 쓰고 있던 파란 모자가 잔디밭으로 툭 떨어져 버렸다. 테루는 깜짝 놀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파란 모자를 주워 도로 제 머리 위에 얹으며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매드해터라 불린 모자장수는 느긋하게 손에 든 찻잔을 손목을 이용해 약하게 흔들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은색 시계는 곧 고장이 날 거야. 그리고 황금시계가 어울리는 시계토끼군은 새로 황금시계를 받겠지. 황금시계가 어울리는 시계토끼군이 하트왕의 부름에도 고장 난 은색 시계 탓에 제 시간에 맞춰 찾아가지 못한 것을 보고, 난폭하기 짝이 없는 하트왕은 드물게도 자비를 내려 황금시계가 어울리는 시계토끼군의 목을 치는 대신 시간 좀 똑바로 지키고 다니라며 황금시계를 하사할 거 거든! 축하해, 황금시계가 어울리는 시계토끼군. 이제 곧 내가 선물한 그 멋진 파란 모자에 아주 잘 어울리는 번쩍번쩍한 황금시계를 갖게 되겠구나!”
쉼 없이 흘러나온 모자장수의 말에 모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테루의 눈은 모브보다 더 동그래지면 동그래졌지 홀쭉해지지는 않았다. 말을 하느라 목이 말랐는지 향긋한 차를 우아하게 마시며 목을 적시는 모자장수를 바라보는 테루의 커다란 귀가 다시 쫑긋 솟았다. 툭. 또 잔디밭에 떨어져버린 파란 모자를 허겁지겁 주워 제 머리에 귀가 축 눌리도록 푹 얹고는 테루는 눈을 반짝이며 모자장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잔뜩 흥분한 목소리에는 까마득한 바다의 수심만큼 깊은 존경이 담겨 있었다.
“역시 매드해터씨! 모르는 게 없군요! 정말 대단해요!!”
하지만 그 흥분은 곧 사라지고, 테루는 모자 대신 축 쳐진 제 귀를 양 손으로 꼭 쥐었다. 반짝이던 눈이 불안과 초조로 흔들렸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가 그 입에서 혼잣말처럼 흘러나왔다.
“앗, 그럼 하트왕이 저를 찾고 있다는 건데.. 이걸 어쩌죠. 어쩌지. 은색시계는 아직 고장이 안 났는데, 어쩌지.”
“그럼 지금 가서 고장을 내면 되지 않니, 파란 모자와 황금시계가 어울리는 시계토끼군. 깊은 바다 속 고래보다 큼지막한 하트성 외각에 머지않아 하트 에이스의 칭호를 거머쥘 스페이드6 트럼프 병사가 있으니, 그와 장난을 치다가 은색 시계를 고장 내면 완벽하겠구나! 아주 감쪽같을 거야!”
이번에도 역시 모자장수의 입에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테루의 눈이 다시 별처럼 반짝였다. 겁을 집어 먹은 것처럼 꼭 쥐고 있던 제 귀를 놓고, 제 허리에 매달린 은색 시계를 눈앞까지 들어 올려 바라보다가, 존경이 담뿍 묻어난 눈으로 모자장수를 보다가.
“역시, 매드해터씨! 감사해요!!”
테루는 모자장수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파란 모자가 또 다시 잔디밭을 굴렀다. 그것을 허겁지겁 주워들어 흙이라도 묻었을 까 탁탁 털어내고는, 테루는 다시 제 커다란 귀가 푹 눌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파란 모자를 제 머리위에 얹었다. 몸을 빙그르 돌려 서둘러 모브가 조금 걸어왔던 방향과 정 반대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내일 티 파티에 늦으면 안 돼!!”
울창한 숲 속으로 사라지는 테루의 등 뒤로 날아가 박히는 것은 모자장수의 당부였다. 그것이 푹 눌려버린 테루의 커다란 귀에까지 닿았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어수선한 티 파티의 유일한 손님이었던 테루가 가 버리고, 어수선한 파티장에 남은 것은 모브와, 모자장수 단 둘이 되었다. 모브는 정신없이 일어난 일에 그저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분명 5분, 아니 3분 전까지만 해도 테루는 느긋하고 또 편안하게 쿠키를 먹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하트성이 있다는 방향으로 쏜살같이 사라져버린 테루의 뒷모습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모브는 낯선 사람과 단 둘이 남겨진 어색함에 그저 눈만 끔뻑였다.
모자장수가 다시 찻잔을 들었다. 우아하게 한 모금. 달그락 하는 작은 소리조차 없이 참으로 귀품 있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모자장수는 모브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안녕, 예쁜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앨리스양.”
“제 이름은 카게야마 시게오입니다.”
“응, 예쁜 하늘색 머리띠가 잘 어울리는 앨리스양.”
“전 남자입니다만.”
어색한 와중에도 귓가를 거슬리게 긁어대는 낯선 이름과 수식어에 모브는 눈살을 찌푸리며 예의 바르게 반박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어찌어찌 첫 만남에 꼭 필요한 자기소개를 마친 것에 모브는 안도의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런 모브를 바라보며 모자장수는 여전히 빙그레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고스란히 흘러나온 목소리는 살갑기 그지없었다.
“저, 매드해터..씨? 여쭙고 싶은 게..”
“초대장은 가지고 있니?”
“네?”
“파티의 초대장 말이야. 내 티 파티에는 초대장이 꼭 필요하거든.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위한 자리는 없단다.”
살가운 목소리로, 빙그레 웃으며 흘려내는 모자장수의 말에 모브는 퍽 당황하고 말았다. 초대장은커녕 비슷한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지. 모브가 이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것은 불과 몇 시간 전인 것을. 이 이상한 모자장수를 알게 된 지도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고, 직접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초대장 같은 것을 가지고 있을 리가. 하지만 사실 모브에게는 초대장 따위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모브가 볼 일이 있는 것은 방금 전 테루를 하트성으로 보내버렸던 것과 같은 모자장수의 그 놀라운 지혜지 그와의 한가로운 티 파티가 아니었으니까.
조금 당황은 했지만 그것이 잘 드러나지 않는 표정 아래로, 모브는 덤덤하게 모자장수에게 말했다. 참으로 예의바르고 제 용건이 쏙쏙 들어간 간결한 말이었다.
“티 파티에는 초대해 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보다, 전 집에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여쭙고 싶은데요.”
“이런, 어쩐다. 초대장이 없으면 파티에 참가할 수가 없어. 파티에 참가할 수 없으면 자리에 앉을 수도 없지. 이 좁은 테이블에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위한 예비 석은 존재하지 않거든. 자리에 앉을 수 없으면 나와 대화할 수 없겠지? 나와 대화할 수 없으면 너의 그 궁금증도 풀 수 없겠구나! 설마 무례하게 서서 나와 대화할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 말이야. 그렇지 않니? 예쁜 하늘색 드레스가 무척 잘 어울리는 앨리스양.”
“하..”
모브는 제 어깨에 긴장이 풀리다 못해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말이 전혀 통하지가 않았다. 제 물음에 대답해 줄 기색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 화려한 언변을 이기고 말로 그를 설득할 자신은 더더욱 없는데. 어쩌면 좋을까. 모브는 고민했다. 그리고 고민하는 모브와 함께 어린 아이 열은 거뜬히 누울 수 있을 정도로 큼지막한 테이블 맨 끝자리 앉아 있는 모자장수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어쩜 좋담.
모자장수는 어느새 내려놓은 찻잔 대신 끄트머리에 어여쁜 세공이 들어간 포크를 들고 있었다. 뻗는 손짓마저도 단아하게, 교양 있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귀여운 딸기가 올라간 새하얀 쇼트케이크를 한 입, 두 입. 기품 있는 손짓으로 어린아이처럼 입 주변에 덕지덕지 생크림을 묻히며 케이크를 먹던 모자장수는 이내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시선을 도로 모브에게 돌렸다. 여유를 담뿍 묻힌 채 짙게 호선을 그린 입술 주변에는 하얀 생크림이 담뿍 묻어있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할까. 거기 끝에서 두 번째 자리에는 앉아도 좋단다, 예쁜 하늘색 머리띠가 잘 어울리는 앨리스양. 사실 그 자리는 커다란 은스푼을 좋아하는 체셔고양이의 자리인데, 아무래도 오늘은 파티에 오지 않을 것 같으니 말이야. 원래라면 이미 주인이 있는 자리를 다른 손님에게 내어주는 발칙한 짓은 하지 않겠지만.. 나는 융통성이 있는 오너니까. 내어준 상대가 귀여운 토끼 귀 같은 하늘색 머리띠를 한 앨리스양이라면 커다란 은스푼을 좋아하는 체셔고양이도 기꺼이 양보하겠지. 커다란 은스푼을 좋아하는 체셔고양이는 칙칙한 검은색보다 산뜻한 하늘색이 굉장히 잘 어울리는 앨리스양을 무척 잘 따르니 말이야! 그렇지 않니? 앉으렴, 어서 앉아. 서서 얘기를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암.”
“아, 네. 감사합니다.”
두 살배기 아기처럼 입 주변에 덕지덕지 묻은 생크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지혜와 융통성에 스스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자장수를 가만히 바라보다 모브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 앉았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모브가 테이블 아래로 나름 정갈하게 들어가 있던 의자를 꺼내 앉자, 반대로 모자장수는 내내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번째로 가까이에 있던 찻주전자를 들고 우아한 걸음 거리로 모브에게 다가왔다. 티 파티에 초대되었으면 응당 맛있는 차를 마셔야지. 그렇지 않니? 생크림이 담뿍 묻은 얼굴로 멋들어지게 웃으며 모자장수는 모브 앞에 놓인 찻잔에 손수 차를 따라 주었다.
쪼르르. 이름 모를 온갖 차향이 뒤섞여 어지럽기만 하던 머릿속에서도 금세 떠오를 정도로 익숙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모브가 깜짝 놀라 모자장수를 올려보자 그는 여전히 멋들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좋아하지? 저어기 깊은 바다 속, 하트성만 한 고래 천사백하고도 스물여덟마리를 밟고 지나가야할 만큼 이 이상한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서 나는 녹색 차란다. 이 이상한 나라에서는 무척이나 구하기 힘든 귀한 차지만, 예쁜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앨리스양에게는 특별히 대접할게. 귀하지만 나는 많이 갖고 있으니 사양 말고 마시렴. 아차차, 그러고 보니 하늘하늘한 레이스가 달린 귀여운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앨리스양이 좋아하는 문어 조각이 들어간 뜨거운 빵이 없구나! 이런, 이런. 이래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거북하다니까. 알맞은 접대를 할 수가 없어! 하지만 오늘은 늘 입은 검은 옷이 아닌 귀여운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앨리스양이 갑자기 찾아온 거니까, 용서해 주겠지? 불만을 말하면 쫒아내 버릴 거야! 자자, 어서 마시렴. 뜨거운 것도 잘 먹잖아? 갓 구운 바삭한 쿠키도 있단다.”
전부 한 번에 알아듣기도 버거울 만큼 많은 우수수 쏟아지는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모브는 모자장수가 따라준 차를 마셨다. 입 안을 금세 촉촉하게 적시는 맛은 역시 향만큼이나 모브에게 무척 익숙한 것이었다. 한 모금, 두 모금.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차를 마시다가, 모브는 고개를 들었다. 모자장수가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단단한 갈색 가죽 부츠가 뻣뻣하게 솟은 잔디를 가뿐하게 밟았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녹색 외투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모브는 입을 열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빙그르, 춤추듯이 몸을 돌려 테이블 위에 있던 마카롱 하나를 집어서 입에 쏙 집어넣고. 다시 사뿐사뿐 걸어가 제 자리에 앉으며 모자장수는 느긋함과 태연스러움이 고루 배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쁜 하늘색 원피스와 귀여운 하늘색 머리띠가 굉장히 잘 어울리는 앨리스양.”
“저는 카게야마 시게오입니다.”
“응. 하늘을 날고, 황금시계가 어울리는 강한 시계토끼와도 가뿐이 싸워 이길 수 있으며, 은스푼을 좋아하는 체셔고양이를 닮은 동생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초능력자 앨리스양.”
“매드해터씨...?”
두 살배기 아기처럼 입 주변에 덕지덕지 묻은 생크림을 아랑곳 않고 모자장수는 기품 있게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드는 대신 깍지 낀 두 손으로 받침을 만들어 제 턱을 괴었다. 파티장에 감도는 온갖 어지러운 차향을 음미하듯, 방금 전 입안으로 쏙 집어넣었던 마카롱의 맛을 만끽하듯. 콧노래라도 흥얼거릴 듯 기분 좋은 표정으로 모자장수는 눈을 감았다. 노래하듯 말했다.
“아니지, 아니지. 구원자라 불러야 할까? 찻잔만 엎어도 불같이 화를 내며 신하의 목을 쳐버리는 잔혹한 폭군, 하트왕을 물리치고 그의 사나운 치세에 늘 불안에 떨며 살아가야만 했던 이 이상한 나라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저 멀고 먼 나라에서 찾아 온 한 줄기 희망. 깊은 바다 속 고래보다 큼지막한 하트성을, 얇은 종잇장 같은 몸을 벌벌 떨면서도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하트병정들을 가뿐하게 뚫고 날아가 잔인하기 그지없는 하트왕의 목을 틀어쥘 힘을 가진 아이야. 저 파란 하늘에서 내려다 본 이 이상한 나라의 풍경은 아름다웠니? 아니면, 이상했을까. 시퍼런 나무. 을씨년스러운 숲. 노란 지붕의 집. 무늬도 알록달록 크기도 제각각인 버섯들. 드넓은 초원에는 시계를 찬 토끼 한 마리만이 뛰어다니고, 커다란 숲에서 목소리를 내는 동물은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 보라색 고양이 한 마리 뿐. 풀밭에 몸을 숨긴 귀뚜라미는 그저 엉엉 울기만 하고, 땅굴에 숨은 동물들은 혹여 하트왕에게 목이 잘릴까 두려워 배가 고파도 나오지를 못하지. 잠이 많은 새앙쥐도 이렇게, 찻주전자 안에 숨어버린 채 나오지 않는단다. 저 하얀 구름 속에서 내려다 본 이 이상한 나라의 풍경은 아름다웠니? 아니면 이상했을까. 응? 검은 가쿠란을 입은 초능력자 모브군.”
구슬픈 노랫가락처럼 잔잔한 전래동화처럼. 미치광이 모자장수의 얇은 입술을 지나 흘러나오는 기나긴 말에 모브는 입을 꾹 다물었다. 표정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긴 말을 하느라 목이 말랐는지 모자장수는 다시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생크림이 덕지덕지 묻은 입 주변을 아랑곳 않고 차를 마셨다. 홀짝. 호올짝.
모브의 입이 열렸다.
“날 이곳으로 부른 건 당신입니까?”
미치광이 모자장수는 대답했다.
“안타깝지만 나에게는 그런 힘이 없단다, 예쁜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앨리스양.”
모브는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눈을 깜박이다가, 다시. 모브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 목구멍을 지나 흘러나오기도 전에, 아. 여전히 흐트러짐 하나 없이 기품 있는 동장으로 소리도 없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어보인 모자장수가 입을 열었다.
“이런! 내가 여태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구나! 오늘 처음 만나는 손님과 자기소개도 없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니!”
두 살배기 아기처럼 생크림이 덕지덕지 묻은 입가. 이름 모를 차향으로 향긋하게 젖어 있는 입술. 놀란 표정은 말끔하게 감추곤 기품 있게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단아하고도 우아한 손놀림으로 붉은 장미꽃 두 송이가 곱게 얹어진 수풀색의 우스꽝스런 모자를 벗으며. 모자장수는 모브를 향해 뒤늦은 인사를 건네 왔다.
“나는 매드해터. 멋진 모자를 사랑하고 향긋한 차를 좋아하는, ”
여유와 품위가 가득 배인 몸짓으로 천천히 숙였던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며 그리 말하는 미치광이 모자장수의 눈은,
“이 미친 나라의 정신 나간 예언자란다.”
이 이상한 나라에서 모브가 만난 그 누구보다도, 총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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