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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번호 공지 2017.08.14
- 리츠레이2 2017.05.01
- 이상한 나라의 모브군 2017.05.01
- 작은 동거 이야기 6 2017.05.01
- 운명의 신이 말하길 2017.05.01
- 모브레이3 2017.05.01
- 작은 동거 이야기 5 2017.03.02
- 그는 마지막까지도 나의 스승이었나니 2017.03.02
- 작은 동거 이야기 4 2017.01.28
- 그래도 바보들은 사랑을 한다 2017.01.28
리츠레이2
싱그러운 초목이 우거진 수풀 속. 투명한 빛을 내리는 찬란한 해가 가장 높이 떠 있는 시간. 새파란 잎새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햇빛을 조명삼아 촉촉한 땅에서도 빼꼼히 얼굴을 내민 초록 풀잎이 산들바람에 하늘하늘 춤추는 곳이었다. 마치 나무들이 의지를 가지고 터준 듯 둥글게 트인 공간, 부러 심은 듯 뻣뻣하게 솟아난 잔디밭 위에 어린 아이 열은 거뜬히 누울 수 있을 정도로 큼지막한 테이블이 있었다.
눈부시게 하얀 테이블보를 옷처럼 얹고, 그 위에 또 어여쁘기 짝이 없는 고급 티세트가 종류도 가지가지. 어울리지도 않는 가지각색의 꽃을 엉성하게 꺾어 그저 화려하기만 한 화병에 대충 꽂아만 놓은 듯 한 꽃병도 서너 개, 색색 깔의 먹음직스런 마카롱 탑과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쿠키, 아기자기한 조각 케이크도 듬뿍. 정리도, 배열도 없이 그저 산만하게 놓여만 있을 뿐인 디저트를 둘러싸고, 널찍한 테이블에서 유일하게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것은 딱 봐도 고급으로 보이는 찻잔뿐이었다. 테이블의 크기만큼이나 가득 놓인 의자, 그 앞마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빈 찻잔. 어느 모로 보나 산만한 오후의 티 파티를 주장하고 있는 그 광경에, 하늘하늘한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카게야마 시게오, 통칭 모브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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쵸미시의 시오중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소년이 어쩌다 이 이상한 나라에 떨어져 버렸을까.
당사자인 모브조차도 도저히 알 수가 없는 물음이었다. 이 물음에 해답을 줄 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 있기나 할까. 아무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책가방을 챙겨 집을 나와, 평범하게 등교를 하던 모브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사방이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이상한 나라 한가운데였다. 그것도 저가 입고 있던 검은 단색 가쿠란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기분 나쁠 정도로 하늘하늘한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는 토끼 귀 같이 쫑긋 솟아 흔들거리는 하늘색 머리띠를 하고.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더군다나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탁 트인 초원을 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마주친 하얀 토끼 귀를 가진 사람인지 토끼인지 모를, 심지어 머리칼은 금발이던 토끼는 다짜고짜 싸움을 걸어오고. 가볍게 대화를 나누며 진정 시킨 후에는 다행히도 이곳에 관한 약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큰 귀를 축 늘어트린 채 모브와의 격한 대화중에 송송 빠져버린 털을 고르며 말을 해 주던 토끼는 갑자기 제 허리에 매달린 시계를 보고는 벌떡 일어나 사라져 버렸었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빠르던지.
어떡해! 늦어버렸어! 그렇게 말하며 쏜살같이 달려가던 토끼를 쫒아 숲에 들어간 모브가 만난 것은 나무 위에서 보라색 고양이 귀를 쫑긋이던 검은 머리의 고양이였다. 이름조차 말해주지 않고 사라져버린 토끼와 달리 예의바르게도 제 이름을 체셔, 라고 소개한 고양이는 모브를 참 잘 따랐었지. 모브가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고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물었을 때는 마치 본인이 집을 잃은 것 같은 표정으로 아는 것이 없다고 울먹이며 미안하다 말해왔었다. 그런 체셔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괜찮다 달래고, 그럼 알 만한 사람은 없냐고 물었을 때. 그 때 체셔고양이가 표정을 와락 구기면서도 떫게 입에 올린 사람이었다.
이상한 숲 속 어딘가에서 매일같이 바보 같은 티 파티를 하고 있는 미치광이 모자장수.
그는 모든 것이 뒤틀린 이 이상한 나라에서도 미친 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미치광이이지만, 이 이상한 나라에서 가장 머리통을 잘 굴리는 사람임에는 부정할 수가 없다고 했던가. 신랄하게 말하던 체셔고양이의 말을 뒤로하고, 서운해 하던 체셔고양이를 뒤로 하고, 모브는 그 모자장수를 찾아 숲 속 깊은 곳으로 찾아 들어 온 참이었다. 괜히 시간 끌 것 없이 저가 가진 초능력으로 휙 날아서.
구름이 몽실몽실 떠다니는 파란 하늘에서, 숲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웅장한 궁전을 보긴 했지만 그냥 무시해 버리고. 숲 전체를 쭉 둘러봤을 때 눈에 확 띄는 곳으로 모브는 제 몸을 날렸다. 첫 만남부터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면 상대가 놀랄 것 같아 티 파티가 열리고 있는 것 같은 곳에서 조금 떨어진 숲 속에 발을 내리고, 모브는 예의바르게 걸어서 티 테이블이 놓인 잔디밭을 밟았다.
그리고, 지금.
위에서 봤을 때에는 너무 멀어 재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 눈앞에 펼쳐지자 상상 그 이상인 것에 모브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제 아무리 체셔고양이가 미치광이라 했지만 얌전하게 티 파티만 하는 것이 무어 그리 대수일까.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 바람 부는 날에 바다에 띄워진 오리보트 만큼 흔들리고 있었다.
테이블 위를 어지러울 정도로 잡다하게 채우고 있는 디저트와 꽃 병. 찻주전자에 그득 담겨 있는 듯 주둥이에서 폴폴 풍겨져 나오는 짙은 차의 향이, 몰라도 십 수 가지는 될 법한 차의 향내가 온통 뒤섞여 머리가 핑글핑글 돌 정도였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큼지막한 테이블 가장 끝자리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제 입술을 적시고 있는 미치광이가 하나.
붉은 장미꽃 두 송이가 곱게 얹어진 수풀색의 우스꽝스런 모자를 갈댓잎 같은 머리에 쓰고, 큼지막한 하얀 줄무늬 리본 넥타이를 매고. 십 수 가지의 향내가 뒤섞여 뭐가 뭔지 구분조차 가지 않을 짙은 차향 사이에서도 향을 음미하듯 저가 든 찻잔에서 모락모락 나는 김에 코를 적셨다가, 느릿하게 홀짝이는 모습은 굳이 자기소개를 할 필요도 없이 그가 바로 체셔고양이가 말했던 모자장수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어, 카게야마군.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개성 넘치는 모자장수의 모습에 한 눈이 팔려 미처 살피지 못한 주변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모브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하얀 귀를 가진 금발의 토끼가 여전히 털이 송송 빠진 제 귀를 늘어트린 채, 그 위에 아까는 보지 못했던 파란 모자를 쓰고는 기분 좋게 쿠키를 집어 먹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토끼는 방금 전에 모브와 격한 대화를 나누었던 것도, 대화중이던 모브를 내팽개쳐두고 자신이 재빠르게 사라져 버렸다는 것도 잊어버렸는지 상큼하게도 웃으며 모브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손끝에 묻어 있던 쿠키 부스러기가 하얀 테이블보 위에 후드득 떨어졌다. 자기도 손을 흔들어 반갑게 인사를 해야 하나, 모브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이 눈을 감은 채 차를 음미하고 있던 모자장수의 눈이 느릿하게 떠졌다. 어색하게 손을 들어 올리려던 모브의 행동을 가로막듯, 모자장수의 입이 열렸다.
“황금시계가 어울리는 시계토끼군.”
“제 이름은 테루에요, 매드해터씨. 그리고 제 시계는 은색이고.”
어색하게 반 쯤 손을 올린 모브에게서 금세 관심이 사라졌는지, 토끼, 테루는 모자장수를 향해 제 큰 귀를 쫑긋 세웠다. 그 덕에 쓰고 있던 파란 모자가 잔디밭으로 툭 떨어져 버렸다. 테루는 깜짝 놀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파란 모자를 주워 도로 제 머리 위에 얹으며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매드해터라 불린 모자장수는 느긋하게 손에 든 찻잔을 손목을 이용해 약하게 흔들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은색 시계는 곧 고장이 날 거야. 그리고 황금시계가 어울리는 시계토끼군은 새로 황금시계를 받겠지. 황금시계가 어울리는 시계토끼군이 하트왕의 부름에도 고장 난 은색 시계 탓에 제 시간에 맞춰 찾아가지 못한 것을 보고, 난폭하기 짝이 없는 하트왕은 드물게도 자비를 내려 황금시계가 어울리는 시계토끼군의 목을 치는 대신 시간 좀 똑바로 지키고 다니라며 황금시계를 하사할 거 거든! 축하해, 황금시계가 어울리는 시계토끼군. 이제 곧 내가 선물한 그 멋진 파란 모자에 아주 잘 어울리는 번쩍번쩍한 황금시계를 갖게 되겠구나!”
쉼 없이 흘러나온 모자장수의 말에 모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테루의 눈은 모브보다 더 동그래지면 동그래졌지 홀쭉해지지는 않았다. 말을 하느라 목이 말랐는지 향긋한 차를 우아하게 마시며 목을 적시는 모자장수를 바라보는 테루의 커다란 귀가 다시 쫑긋 솟았다. 툭. 또 잔디밭에 떨어져버린 파란 모자를 허겁지겁 주워 제 머리에 귀가 축 눌리도록 푹 얹고는 테루는 눈을 반짝이며 모자장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잔뜩 흥분한 목소리에는 까마득한 바다의 수심만큼 깊은 존경이 담겨 있었다.
“역시 매드해터씨! 모르는 게 없군요! 정말 대단해요!!”
하지만 그 흥분은 곧 사라지고, 테루는 모자 대신 축 쳐진 제 귀를 양 손으로 꼭 쥐었다. 반짝이던 눈이 불안과 초조로 흔들렸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가 그 입에서 혼잣말처럼 흘러나왔다.
“앗, 그럼 하트왕이 저를 찾고 있다는 건데.. 이걸 어쩌죠. 어쩌지. 은색시계는 아직 고장이 안 났는데, 어쩌지.”
“그럼 지금 가서 고장을 내면 되지 않니, 파란 모자와 황금시계가 어울리는 시계토끼군. 깊은 바다 속 고래보다 큼지막한 하트성 외각에 머지않아 하트 에이스의 칭호를 거머쥘 스페이드6 트럼프 병사가 있으니, 그와 장난을 치다가 은색 시계를 고장 내면 완벽하겠구나! 아주 감쪽같을 거야!”
이번에도 역시 모자장수의 입에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테루의 눈이 다시 별처럼 반짝였다. 겁을 집어 먹은 것처럼 꼭 쥐고 있던 제 귀를 놓고, 제 허리에 매달린 은색 시계를 눈앞까지 들어 올려 바라보다가, 존경이 담뿍 묻어난 눈으로 모자장수를 보다가.
“역시, 매드해터씨! 감사해요!!”
테루는 모자장수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파란 모자가 또 다시 잔디밭을 굴렀다. 그것을 허겁지겁 주워들어 흙이라도 묻었을 까 탁탁 털어내고는, 테루는 다시 제 커다란 귀가 푹 눌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파란 모자를 제 머리위에 얹었다. 몸을 빙그르 돌려 서둘러 모브가 조금 걸어왔던 방향과 정 반대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내일 티 파티에 늦으면 안 돼!!”
울창한 숲 속으로 사라지는 테루의 등 뒤로 날아가 박히는 것은 모자장수의 당부였다. 그것이 푹 눌려버린 테루의 커다란 귀에까지 닿았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어수선한 티 파티의 유일한 손님이었던 테루가 가 버리고, 어수선한 파티장에 남은 것은 모브와, 모자장수 단 둘이 되었다. 모브는 정신없이 일어난 일에 그저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분명 5분, 아니 3분 전까지만 해도 테루는 느긋하고 또 편안하게 쿠키를 먹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하트성이 있다는 방향으로 쏜살같이 사라져버린 테루의 뒷모습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모브는 낯선 사람과 단 둘이 남겨진 어색함에 그저 눈만 끔뻑였다.
모자장수가 다시 찻잔을 들었다. 우아하게 한 모금. 달그락 하는 작은 소리조차 없이 참으로 귀품 있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모자장수는 모브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안녕, 예쁜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앨리스양.”
“제 이름은 카게야마 시게오입니다.”
“응, 예쁜 하늘색 머리띠가 잘 어울리는 앨리스양.”
“전 남자입니다만.”
어색한 와중에도 귓가를 거슬리게 긁어대는 낯선 이름과 수식어에 모브는 눈살을 찌푸리며 예의 바르게 반박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어찌어찌 첫 만남에 꼭 필요한 자기소개를 마친 것에 모브는 안도의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런 모브를 바라보며 모자장수는 여전히 빙그레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고스란히 흘러나온 목소리는 살갑기 그지없었다.
“저, 매드해터..씨? 여쭙고 싶은 게..”
“초대장은 가지고 있니?”
“네?”
“파티의 초대장 말이야. 내 티 파티에는 초대장이 꼭 필요하거든.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위한 자리는 없단다.”
살가운 목소리로, 빙그레 웃으며 흘려내는 모자장수의 말에 모브는 퍽 당황하고 말았다. 초대장은커녕 비슷한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지. 모브가 이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것은 불과 몇 시간 전인 것을. 이 이상한 모자장수를 알게 된 지도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고, 직접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초대장 같은 것을 가지고 있을 리가. 하지만 사실 모브에게는 초대장 따위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모브가 볼 일이 있는 것은 방금 전 테루를 하트성으로 보내버렸던 것과 같은 모자장수의 그 놀라운 지혜지 그와의 한가로운 티 파티가 아니었으니까.
조금 당황은 했지만 그것이 잘 드러나지 않는 표정 아래로, 모브는 덤덤하게 모자장수에게 말했다. 참으로 예의바르고 제 용건이 쏙쏙 들어간 간결한 말이었다.
“티 파티에는 초대해 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보다, 전 집에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여쭙고 싶은데요.”
“이런, 어쩐다. 초대장이 없으면 파티에 참가할 수가 없어. 파티에 참가할 수 없으면 자리에 앉을 수도 없지. 이 좁은 테이블에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위한 예비 석은 존재하지 않거든. 자리에 앉을 수 없으면 나와 대화할 수 없겠지? 나와 대화할 수 없으면 너의 그 궁금증도 풀 수 없겠구나! 설마 무례하게 서서 나와 대화할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 말이야. 그렇지 않니? 예쁜 하늘색 드레스가 무척 잘 어울리는 앨리스양.”
“하..”
모브는 제 어깨에 긴장이 풀리다 못해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말이 전혀 통하지가 않았다. 제 물음에 대답해 줄 기색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 화려한 언변을 이기고 말로 그를 설득할 자신은 더더욱 없는데. 어쩌면 좋을까. 모브는 고민했다. 그리고 고민하는 모브와 함께 어린 아이 열은 거뜬히 누울 수 있을 정도로 큼지막한 테이블 맨 끝자리 앉아 있는 모자장수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어쩜 좋담.
모자장수는 어느새 내려놓은 찻잔 대신 끄트머리에 어여쁜 세공이 들어간 포크를 들고 있었다. 뻗는 손짓마저도 단아하게, 교양 있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귀여운 딸기가 올라간 새하얀 쇼트케이크를 한 입, 두 입. 기품 있는 손짓으로 어린아이처럼 입 주변에 덕지덕지 생크림을 묻히며 케이크를 먹던 모자장수는 이내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시선을 도로 모브에게 돌렸다. 여유를 담뿍 묻힌 채 짙게 호선을 그린 입술 주변에는 하얀 생크림이 담뿍 묻어있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할까. 거기 끝에서 두 번째 자리에는 앉아도 좋단다, 예쁜 하늘색 머리띠가 잘 어울리는 앨리스양. 사실 그 자리는 커다란 은스푼을 좋아하는 체셔고양이의 자리인데, 아무래도 오늘은 파티에 오지 않을 것 같으니 말이야. 원래라면 이미 주인이 있는 자리를 다른 손님에게 내어주는 발칙한 짓은 하지 않겠지만.. 나는 융통성이 있는 오너니까. 내어준 상대가 귀여운 토끼 귀 같은 하늘색 머리띠를 한 앨리스양이라면 커다란 은스푼을 좋아하는 체셔고양이도 기꺼이 양보하겠지. 커다란 은스푼을 좋아하는 체셔고양이는 칙칙한 검은색보다 산뜻한 하늘색이 굉장히 잘 어울리는 앨리스양을 무척 잘 따르니 말이야! 그렇지 않니? 앉으렴, 어서 앉아. 서서 얘기를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암.”
“아, 네. 감사합니다.”
두 살배기 아기처럼 입 주변에 덕지덕지 묻은 생크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지혜와 융통성에 스스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자장수를 가만히 바라보다 모브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 앉았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모브가 테이블 아래로 나름 정갈하게 들어가 있던 의자를 꺼내 앉자, 반대로 모자장수는 내내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번째로 가까이에 있던 찻주전자를 들고 우아한 걸음 거리로 모브에게 다가왔다. 티 파티에 초대되었으면 응당 맛있는 차를 마셔야지. 그렇지 않니? 생크림이 담뿍 묻은 얼굴로 멋들어지게 웃으며 모자장수는 모브 앞에 놓인 찻잔에 손수 차를 따라 주었다.
쪼르르. 이름 모를 온갖 차향이 뒤섞여 어지럽기만 하던 머릿속에서도 금세 떠오를 정도로 익숙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모브가 깜짝 놀라 모자장수를 올려보자 그는 여전히 멋들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좋아하지? 저어기 깊은 바다 속, 하트성만 한 고래 천사백하고도 스물여덟마리를 밟고 지나가야할 만큼 이 이상한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서 나는 녹색 차란다. 이 이상한 나라에서는 무척이나 구하기 힘든 귀한 차지만, 예쁜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앨리스양에게는 특별히 대접할게. 귀하지만 나는 많이 갖고 있으니 사양 말고 마시렴. 아차차, 그러고 보니 하늘하늘한 레이스가 달린 귀여운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앨리스양이 좋아하는 문어 조각이 들어간 뜨거운 빵이 없구나! 이런, 이런. 이래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거북하다니까. 알맞은 접대를 할 수가 없어! 하지만 오늘은 늘 입은 검은 옷이 아닌 귀여운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앨리스양이 갑자기 찾아온 거니까, 용서해 주겠지? 불만을 말하면 쫒아내 버릴 거야! 자자, 어서 마시렴. 뜨거운 것도 잘 먹잖아? 갓 구운 바삭한 쿠키도 있단다.”
전부 한 번에 알아듣기도 버거울 만큼 많은 우수수 쏟아지는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모브는 모자장수가 따라준 차를 마셨다. 입 안을 금세 촉촉하게 적시는 맛은 역시 향만큼이나 모브에게 무척 익숙한 것이었다. 한 모금, 두 모금.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차를 마시다가, 모브는 고개를 들었다. 모자장수가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단단한 갈색 가죽 부츠가 뻣뻣하게 솟은 잔디를 가뿐하게 밟았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녹색 외투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모브는 입을 열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빙그르, 춤추듯이 몸을 돌려 테이블 위에 있던 마카롱 하나를 집어서 입에 쏙 집어넣고. 다시 사뿐사뿐 걸어가 제 자리에 앉으며 모자장수는 느긋함과 태연스러움이 고루 배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쁜 하늘색 원피스와 귀여운 하늘색 머리띠가 굉장히 잘 어울리는 앨리스양.”
“저는 카게야마 시게오입니다.”
“응. 하늘을 날고, 황금시계가 어울리는 강한 시계토끼와도 가뿐이 싸워 이길 수 있으며, 은스푼을 좋아하는 체셔고양이를 닮은 동생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초능력자 앨리스양.”
“매드해터씨...?”
두 살배기 아기처럼 입 주변에 덕지덕지 묻은 생크림을 아랑곳 않고 모자장수는 기품 있게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드는 대신 깍지 낀 두 손으로 받침을 만들어 제 턱을 괴었다. 파티장에 감도는 온갖 어지러운 차향을 음미하듯, 방금 전 입안으로 쏙 집어넣었던 마카롱의 맛을 만끽하듯. 콧노래라도 흥얼거릴 듯 기분 좋은 표정으로 모자장수는 눈을 감았다. 노래하듯 말했다.
“아니지, 아니지. 구원자라 불러야 할까? 찻잔만 엎어도 불같이 화를 내며 신하의 목을 쳐버리는 잔혹한 폭군, 하트왕을 물리치고 그의 사나운 치세에 늘 불안에 떨며 살아가야만 했던 이 이상한 나라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저 멀고 먼 나라에서 찾아 온 한 줄기 희망. 깊은 바다 속 고래보다 큼지막한 하트성을, 얇은 종잇장 같은 몸을 벌벌 떨면서도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하트병정들을 가뿐하게 뚫고 날아가 잔인하기 그지없는 하트왕의 목을 틀어쥘 힘을 가진 아이야. 저 파란 하늘에서 내려다 본 이 이상한 나라의 풍경은 아름다웠니? 아니면, 이상했을까. 시퍼런 나무. 을씨년스러운 숲. 노란 지붕의 집. 무늬도 알록달록 크기도 제각각인 버섯들. 드넓은 초원에는 시계를 찬 토끼 한 마리만이 뛰어다니고, 커다란 숲에서 목소리를 내는 동물은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 보라색 고양이 한 마리 뿐. 풀밭에 몸을 숨긴 귀뚜라미는 그저 엉엉 울기만 하고, 땅굴에 숨은 동물들은 혹여 하트왕에게 목이 잘릴까 두려워 배가 고파도 나오지를 못하지. 잠이 많은 새앙쥐도 이렇게, 찻주전자 안에 숨어버린 채 나오지 않는단다. 저 하얀 구름 속에서 내려다 본 이 이상한 나라의 풍경은 아름다웠니? 아니면 이상했을까. 응? 검은 가쿠란을 입은 초능력자 모브군.”
구슬픈 노랫가락처럼 잔잔한 전래동화처럼. 미치광이 모자장수의 얇은 입술을 지나 흘러나오는 기나긴 말에 모브는 입을 꾹 다물었다. 표정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긴 말을 하느라 목이 말랐는지 모자장수는 다시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생크림이 덕지덕지 묻은 입 주변을 아랑곳 않고 차를 마셨다. 홀짝. 호올짝.
모브의 입이 열렸다.
“날 이곳으로 부른 건 당신입니까?”
미치광이 모자장수는 대답했다.
“안타깝지만 나에게는 그런 힘이 없단다, 예쁜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앨리스양.”
모브는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눈을 깜박이다가, 다시. 모브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 목구멍을 지나 흘러나오기도 전에, 아. 여전히 흐트러짐 하나 없이 기품 있는 동장으로 소리도 없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어보인 모자장수가 입을 열었다.
“이런! 내가 여태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구나! 오늘 처음 만나는 손님과 자기소개도 없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니!”
두 살배기 아기처럼 생크림이 덕지덕지 묻은 입가. 이름 모를 차향으로 향긋하게 젖어 있는 입술. 놀란 표정은 말끔하게 감추곤 기품 있게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단아하고도 우아한 손놀림으로 붉은 장미꽃 두 송이가 곱게 얹어진 수풀색의 우스꽝스런 모자를 벗으며. 모자장수는 모브를 향해 뒤늦은 인사를 건네 왔다.
“나는 매드해터. 멋진 모자를 사랑하고 향긋한 차를 좋아하는, ”
여유와 품위가 가득 배인 몸짓으로 천천히 숙였던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며 그리 말하는 미치광이 모자장수의 눈은,
“이 미친 나라의 정신 나간 예언자란다.”
이 이상한 나라에서 모브가 만난 그 누구보다도, 총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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짹짹. 지저귀는 새소리가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아침이었다. 마치 저가 늦잠을 잘 것을 예상이라도 한 건지 햇살이 그 잠을 방해하지 않게 굳게 쳐진 커튼, 그 아주 자그만 틈으로 삐죽삐죽 연노란 햇빛이 스며들어오고 있는 따스한 아침. 달그락, 달그락. 새소리와 함께 창문 반대쪽 닫힌 문 너머 부엌에서 아주 작게 들려오는 식기들이 부딪히는 소리에 레이겐은 느릿하게 제 몸을 일으켰다.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쓰러지듯 다시 누웠다.
그리 무리를 하지도 않았건만. 고작 1박 2일의 외출을 마치고 아늑한 집으로 돌아온 몸뚱이는 도무지 침대에서 벗어날 힘을 내주지 않았다. 눈꺼풀을 짓누르는 졸음도 어째 통 가시지를 않았다. 피곤했다. 하지만 다시 잠에 들라치면 몸에 담뿍 배인 습관이라는 녀석이 방해를 해대는 터라 도로 의식을 꿈속으로 던져버릴 수도 없었다. 아우으. 옆으로 누운 채로 그러모은 이불에 제 얼굴을 폭 박아버리며 레이겐은 다시 앓는 소리를 냈다. 문이 열린 것은 그 때였다.
“일어났으면 그만 어기적거리고 나와요.”
서릿발처럼 차갑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하지도 않은 차분한 목소리였다. 레이겐은 슬그머니 이불 속에 푹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어설프게 뜨인 시야 안에 가득 들어오는 것은 언제 또 가까이 왔는지 모를 어린 연인의 손이었다. 침대 바로 옆에 서 허리를 숙인 리츠의 손이 레이겐의 얼굴 바로 앞에 있었다. 뺨과 턱을 함께 감싸오는 따듯한 손에서는 고소한 된장국 냄새가 났다. 아침 했어? 잠기운에 푹 가라앉은 레이겐의 물음에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닌 입술이었다. 머리에 까마귀가 둥지를 치고 간 덕에 훤히 드러난 매끄러운 이마에, 여즉 무거운 눈두덩에, 입술에, 쪽. 익숙하게 입을 맞춘 리츠의 입술이 열린 것은 리츠가 도로 허리를 펴고 돌아선 뒤였다.
“씻고 나와요.”
식탁에 차려진 아침은 그리 단출하지도, 그리 화려하지도 않게 그저 간소했다. 건더기가 적은 고소한 된장국, 잡곡 넣는 것을 깜박 잊은 새하얀 쌀밥. 기름을 둘러 가볍게 구워낸 생선과 일주일쯤 전에 리츠가 본가에 다녀오며 어머니께 받아 온 반찬들 조금. 둘만 사는 집이라 그리 크지 않은 식탁에 널널하게 자리 잡은 메뉴 앞에 앉아, 커다랗게 하품을 하는 레이겐을 보며 리츠가 눈가를 좁혔다. 이미 젓가락을 들어 생선가시를 바르고 있는 리츠와 달리 레이겐은 식탁에 앉은 지 한참이 되도록 젓가락도 들지 않은 채 아직도 졸음이 다 달아나지 않은 눈을 느릿하게 끔벅이고만 있었다. 끔뻑, 끔뻑. 그러다 다시 입이 찢어져라, 하암. 어디 그래서 입이 찢어지겠어요? 퉁명스레 말을 하면서도 생선 가시를 바르던 손을 잠시 떼고 리츠는 레이겐에게 물 컵을 건넸다.
“일하러 간 것도 아니고, 놀다 온 주제에 뭐가 그렇게 피곤해요?”
“아저씨는 노는 데에도 체력이 필요하답니다, 리츠군.”
“온천여관이었잖아요.”
“아저씨는 왔다 갔다 하는 것 만에도 체력이 필요하답니다, 리츠군.”
리츠가 건네는 물 컵을 순순히 받아 마른 목을 축인 레이겐은 그제야 조금 정신이 깨는 것을 느끼며 제 앞에 놓인 된장국을 손에 들었다. 후후, 불어내는 고소한 냄새의 뽀얀 김 너머로 노골적으로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는 리츠의 눈이 보였지만 레이겐은 가뿐하게 모른 척했다. 호로록. 입술을 적시고, 혀끝에 감겨오는 익숙한 된장국의 맛과 제 혀에 딱 알맞게 식은 온도에, 레이겐은 그릇을 들어 마시느라 가려진 제 입술을 슬쩍 끌어올렸다. 두어 모금 더 마시고 그릇을 내려놓았을 즈음에는 리츠의 시선은 어느새 도로 저가 가시를 바르던 생선에 꽂혀 있었다.
기름이 잔뜩 묻어 보기만 해도 느글느글해지는 껍질을 깔끔하게 걷어내고, 굵은 가시부터 머리카락같이 얇은 잔가시까지. 더 이상의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뽀얀 살에 쏙쏙 박혀있는 가시들을 꼼꼼하게 발라내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는 리츠의 머리통을 바라보며, 레이겐은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피식 웃고 말았다.
또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 건지. 늘 집에서 아침밥을 챙겨 먹어왔던 리츠와 달리, 아침에는 도저히 식욕이 돋지를 않아 밥을 그리 많이 넘기지 못하는 레이겐의 식성이야 이미 리츠도 잘 아는 바였다. 동거를 시작할 무렵부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서로 조금씩 물러나며 타협점을 찾아갔었고. 안 먹는 건 절대 안 된다며 두 눈을 시퍼렇게 뜨던 리츠의 말에 물러서고 물러서서, 그럼 밥그릇의 반의반만 먹겠다고 한 레이겐의 말에 리츠가 어디서 구했는지 국그릇보다 큰 밥그릇을 사 왔을 때에는 배꼽 빠져라 웃었었지. 한참을 유쾌하게 웃어놓고는 다음날에 리츠도 못 찾을 엉뚱한 곳에 그 큼지막한 밥그릇을 숨겨버린 레이겐 때문에 한바탕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싸움도 했었다. 그렇게 해서 정한 규칙이었다. 서로의 식습관을 나름 배려하고, 서로의 건강도 나름 배려하고, 또 서로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조금도 줄이지 않기 위해. 초반에야 레이겐 몫의 밥을 더 담지 못해 리츠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던 것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함께 지낸 시간과 함께 충분히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졌을 텐데.
밥그릇의 반의반만, 그것도 조금 일찍 떠 놓았는지 된장국처럼 제 혀에 딱 알맞은 온도로 식어 있는 밥 알갱이를 대충 씹어 삼키며 레이겐은 젓가락을 쥔 손 그대로 턱을 괴고 자세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제 사소한 몸짓에도 집중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올린 어린 연인의 잘생긴 얼굴이 알기 어렵게 비뚤어져 있는 것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레이겐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말았다.
“그 날 선약이 있어서 못 간다고 먼저 말한 건 어디의 누구셨더라?”
“......그렇다고 나만 쏙 빼고 형이랑 단 둘이 갑니까? 그것도 온천을.”
꼼꼼하게 가시와 껍질을 다 발라낸 생선이 담긴 제 접시와 아직 생선에는 손도 대지 않은 레이겐의 접시를 채로 들어 바꿔 놓으며 퉁명스레 흘려내는 리츠의 말은 발라낸 생선가시가 그리로 가 박혔는지 제법 뾰족했다. 하지만 그런 리츠의 말에도 레이겐은 마냥 태연했다. 제 앞에 놓인 뽀얀 생선살을 냉큼 집어 제 입속에 쏙 집어넣으며, 웃음을 꾹 눌러 참고 짐짓 억울한 양 목소리를 꾸며낼 만큼.
“단 둘이라니, 누가 들으면 내가 바람이라도 난 줄 알겠네.”
잘 구워져 보드란 생선살을 우물거리다가 꿀꺽. 맛있네, 하며 억울한 목소리를 꾸며낸 것이 다 무색하리만큼 참 느긋하게도 뱉어내는 레이겐의 말에 리츠의 눈이 한 층 가늘어 졌다. 그런 리츠의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 지 레이겐은 뻔뻔스러울 정도의 태연함을 거둘 기색이 없었다. 제 앞에 유독 많이 덜어져 있는 반찬들을 리츠 앞으로 옮겨 놓고는 설렁하게 웃으며, 레이겐은 말했다.
“아이고, 질투심 많은 리츠군. 에쿠보도 같이 갔거든요? 사진 찍어서 보내줬잖아. 못 봤어?”
“아, 그 심령사진..”
레이겐의 그 말에 리츠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그저께 레이겐이 여관에 도착했다며 보내준 사진이었다. 금방 온천에 들어갈 예정이었는지 아니면 내내 그런 꼬락서니였는지. 가슴팍이 훤히 보이도록 엉성하게 걸친 유카타를 입고 바보처럼 웃고 있던 레이겐과, 그 옆에서 수줍게 손가락을 들어 브이 자를 그리고 있던 제 형, 그런 두 사람 머리 위에 초록색 풍선같은 악령이 두둥실 떠 있던 것이 생각이 났다. 리츠의 미간이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구겨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겐은 리츠가 작게 흘려낸 말에 젓가락을 내려놓지도 않은 채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지만.
심령사진이라니, 너무하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채 떨치지 못하고 있던 잠기운을 죄 날려버리곤 레이겐은 배꼽이 빠져라 웃어댔다. 단단한 식탁 의자에 앉아있지만 않았더라면 진즉에 바닥을 굴러다녔을 기세였다. 그런 레이겐을 향해 미간을 구긴 채 눈을 흘기다가, 결국 이제 와 뭘 어쩌겠나 싶어 리츠는 그저 한 숨만 푹 내쉬었다. 가시 돋친 쓴 소리가 차고 올라와 목구멍을 탁탁 치고 있는 것을 제 앞으로 옮겨진 반찬그릇에서 반찬 몇 개를 집어넣어 함께 꿀꺽 삼켜내었다.
리츠가 더 말을 앉고 묵묵히 젓가락질만 하는 동안에도 레이겐은 좀처럼 터져버린 웃음을 주워 담지 못했다. 조금 진정했다 싶다가도, 다시 푸흐흣. 입술 새로 웃음이 흘러나와 버리는 것에 레이겐은 냉큼 물 컵을 들어 제 입을 막았다. 마음 같아서는 한참은 더 웃고 싶었지만 더 웃었다가는 제 앞의 여린 연인의 시선에 다시 생선가시가 뾰족뾰족 박힐 터였다.
아직 밥이 조금 남았음에도 더 먹을 생각은 들지 않아 젓가락을 내려놓고, 레이겐은 깨끗한 물로 입을 헹궜다. 그리 비리지는 않았지만 특유의 생선냄새가 고여 있던 혀를 씻어내듯 물을 꿀꺽꿀꺽 삼키고 있자, 저가 웃는 사이 마찬가지로 식사를 거의 마쳤는지 리츠의 불만스러운 시선이 밥이 조금 남은 밥그릇과 자신을 번갈아 쪼는 것이 느껴졌다. 레이겐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메인인 생선은 다 먹었잖아. 변명처럼 흘려내는 말에 한 숨소리가 들려왔지만, 고개를 제자리로 돌리지는 않았다. 대신 물 컵을 입술에 붙인 채 가볍게 입을 열었다.
“한 번 더 갈까? 온천.”
“우리끼리요?”
“그럼, 에쿠보도 같이 가서 또 심령사진 찍어?”
“사양하죠. 언제 갈까요?”
듣기 싫은 소리가 나지 않게 의자를 뒤로 빼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냉큼 물어오는 리츠의 말에 레이겐은 그제야 물 컵을 내려두고 피식 웃고 말았다. 제 앞에 있던 남은 반찬들을 한 곳에 모아들고 냉장고로 향하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레이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조금 듣기 싫은 소리가 나긴 했지만 구태여 그 점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달그락, 달그락. 식탁에 남아있는 빈 그릇들을 모두 모아들고 일어나 싱크대로 향하며 레이겐은 곰곰이 제 스케줄을 확인했다.
“다음 주?”
“다음 주..”
“왜? 또 나보다 중요한 약속이라도 들어와 있어?”
“아쉽게도 다음 주에 특별한 일정은 없네요.”
남은 반찬들을 꼼꼼하게 분리해 각각의 반찬통에 도로 집어넣으며 하는 리츠의 말에 레이겐은 웃고 말았다. 거 참 다행이네. 싱크대 한편에 놓인 주방용 세제로 폭신한 스펀지 수세미에 거품을 내고, 물로 가볍게 적신 그릇들을 닦아내었다. 하나, 둘, 세 개 쯤 거품 칠을 했을까. 그새 할 일을 끝내고 커피까지 내려왔는지 은근하게 풍기는 커피 향과 함께 제 뒤로 다가오는 발소리에 레이겐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노천온천 딸린 다다미방은 역시 좀 비싸려나?”
커피 잔을 든 손이 뻗어져 왔다. 한 손은 잔을 든 채 레이겐의 허리를 감싸고, 남은 한 손은 들고 있던 레이겐 몫의 커피를 물이 튀지 않는 곳에 놓아두며. 이제는 그릇에 거품 칠을 끝내고 물로 헹궈내고 있는 레이겐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기는 대신 제 발을 한 발자국 옮겨 딱 달라붙은 온기가 등에 뭉근하게 퍼지고 있었다. 허리에 꽉 감기는 단단한 팔, 조그만 빈틈도 두지 않고 딱 달라붙는 몸에 움직이기가 편하지는 않았으나 레이겐은 구태여 그 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저 익숙하게 팔을 조금만 움직여 남은 그릇들을 헹궈내고, 제 손까지 깨끗하게 씻을 뿐.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손에는 마치 당연한 수순처럼 옆에 놓아두었던 손수건을 들어 닦아주는 손길이 있었다.
“뭐, 어때요. 우리 둘이 가는 건데.”
손톱틈새에 박힌 물기마저 부드럽게 닦아내고, 수건을 내리자 냉큼 뜨거운 커피 잔으로 뻗으려는 손을 붙잡으며 리츠는 고개를 숙여 레이겐의 목덜미 언저리에 제 입술을 얕게 부볐다. 야릇하기보다는 그저 보드라운 애정이 묻어나는 행위였다. 얼마 만에 단 둘이 가는 온천인데. 한참을 그저 그러고만 있다가, 얼핏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들려오는 말을 한 마디. 결국 레이겐의 입에서는 웃음꽃이 피고 말았다.
치사하게 나만 쏙 빼놓고 온천이나 가고. 게다가 옷 꼴은 그게 뭐에요? 설마 하루 종일 그러고 다닌 거 아니죠? 아무리 형이랑 에쿠보라지만 내 앞도 아닌데, 그렇게 맨살 다 내놓고 다니면 어떡해요.
두 마디, 세 마디. 목덜미 부근을 적시는 목소리는 서운함에 볼을 부풀인 어린아이의 숨결과도 다를 바가 없어서. 레이겐은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겁도 없이 집어 마시려다 붙잡혀버린 손대신 반대쪽 손을 들어 제 목과 뺨 한쪽을 간질이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 속에 찔러 넣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어주다가 통통. 달래듯 머리를 두어 번 두드려주자 그제야 갑갑할 정도로 제 허리를 꽉 조이고 있던 팔에 어느 정도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두른 팔을 푸르지는 않았지만 허리에 따스하게 감기는 느낌은 딱 평소의 그것이었다. 레이겐은 느긋하게 어깨에 힘을 풀고 맞닿은 가슴팍에 제 등을 기댔다. 붙잡혀 있던 손을 미끄러트려 빼내고, 다시 커피 잔에 손을 뻗자 이번에는 말려오지 않았다.
커피 잔을 손에 들고, 은은하게 풍겨오는 커피 향에 잠시 코를 적신 뒤, 홀짝. 딱 알맞게 식은 커피를 마시며 레이겐은 눈을 데로록 굴렸다. 무언가를 생각하듯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입술에 딱딱하게 닿아있는 잔을 혀로 살짝 핥았다가, 다시 한 모금. 느긋하게 잔을 떼어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왕 비싼 데로 갈 거면 밥도 맛있는 곳으로 가자. 이번에 간 데, 밥이 별로였거든.”
참으로 태연자약하기 짝이 없는 레이겐의 말에 푹 숙여져 있던 리츠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서운함과 불퉁함은 레이겐의 목덜미에 죄다 닦아버린 듯, 바라봐 오는 시선에는 더 이상 생선가시 같은 뾰족함은 없었다.
은은한 커피 향만이 보드랍게 맺혀있는 입술이 다가왔다. 그리곤 앞머리가 가지런히 내려앉은 이마에, 쪽. 산뜻하게 입을 맞추곤 커피처럼 은은한, 허나 아주 조금, 들떠있는 듯 한 목소리가 귓가를 적셨다.
“괜찮은 곳으로 찾아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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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신이 말하길.
붉은 실은 인연의 상징이요, 운명의 증표일지니.
새끼손가락에 매인 붉은 실 끝자락에 있는 이가 곧 그대의 운명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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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선한 아침이었다. 회색 아스팔트 차도에는 색색의 자동차가 줄 지어 늘어져 있고 탁한 적갈색 판판한 벽돌이 깔린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쁜 걸음을 옮기는 아침. 역 안에 있는 카페에서는 저마다 사람들이 노란 달걀이 들어간 샌드위치 따위의 간단한 아침거리를 먹으며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갈색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검은색, 회색, 군청색 등등. 부쩍 단정한 색색의 옷을 차려입고 오가는 사람들이 밖에서 급히 묻혀 온 바람색을 털어내는 공간이었다. 열차를 기다리며 회색 신문을 펼치거나 고급스런 색감의 북 커버를 씌운 책을 꺼내들기도 하는 공간. 온갖 색이 뒤섞여 자칫하면 어지러워질 것만 같은 번잡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공간에서 조금 비껴간 곳에 우뚝 서 있는 소년이 하나.
카게야마 시게오, 통칭 모브라 불리는 소년이었다.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어깨를 치거나 다리를 밟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쓰는 어수선한 역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 곳에서 묘하게 비껴난 위치에 모브는 그저 가만히 서서 오로지 역 입구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어딘가 이질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또 그리 특별한 모습은 아니었다. 검은 가쿠란은 입은 채 옅은 감색 가방을 손에 들고 역 입구를 빤히 지켜보다가 가끔씩 시계를 힐끗. 어느 모로 보나 함께 등교할 친구를 기다리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주변에 있는 같은 목적의 사람들이 스마트폰이나 책, 신문 따위를 보고 있는 것과는 달리 구멍이라도 뚫을 듯 역 입구를 주시하고 있다는 점이 조금 독특하다면 독특한 점이랄까.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까. 10분? 아니 그보다 조금 더 흘렀을 즈음이었다. 역 입구 쪽에 그득한 수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가을 갈대밭을 고스란히 담아낸 머리가 모브의 눈에 비쳤다. 모브와 같은 검은 가쿠란, 모브와 같은 옅은 감색 가방. 목 끝까지 단정하게 단추를 채운 모브와는 달리 첫 번째 단추 하나 정도는 끌러 숨통을 튼 소년이 느긋하게 출구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교통카드가 든 감색 카드지갑을 단말기에 찍고, 열린 공간으로 가뿐히 제 몸을 통과시켜 산뜻하게 빠져 나오고는, 소년은 카드지갑을 대충 제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었다.
그 반복적이고 가벼운 과정마저 모브는 하나도 빠짐없이 몽땅 제 눈에 담아내었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그저 오롯하게 바라보며, 소년의 시선이 어서 빨리 저를 찾기만을 가만히 기다렸다. 허나 그런 모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긋하게, 또 태평하게. 역 입구 앞에 떡하니 서 고개를 숙인 채 부스럭거리던 소년은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제서야 익숙하게 누군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조금 더 있다가. 엉뚱한 곳을 헤매는 소년의 시선에 모브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어 소년을 부르려던 차였다. 갈댓잎처럼 가느다란 머리칼이 사르르 흔들렸다. 느긋하게 돌아가던 고개가 딱 멈추며, 소년의 시선이 정확하게 모브를 담아내었다. 눈이 마주쳤다. 깜빡, 깜빡. 그리곤, 씨익. 소년의 입이 열렸다.
“여- 모브. 좋은 아침.”
가늘게 눈가를 휘어 웃으며 소년은 모브에게 다가왔다. 한 손을 가볍게 흔들어 인사를 건네는 모양새가 일견 시원스럽기까지 했다. 그런 소년의 모습에 모브 역시 입술을 양끝으로 힘껏 끌어당기며 웃어 보였다. 소년을 향해 걸음을 디디며 파아란 아침 하늘에 퍽 어울리는 인사를 건네었다.
“아라타카군도 좋은 아침.”
첫 만남은 언제였더라. 모브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였을 거다. 병아리 같은 노란 유치원복을 벗고 회색 반바지 정장을 입고. 모브의 어머니가 백화점에서 큰 맘 먹고 산 검은색 단정한 란도셀을 등에 메고 아버지처럼 보라색 넥타이도 맸었다. 연분홍 바람은 따스하지만 아직 공기 중에는 눈처럼 새하얀 추위가 조금 남아 있던 때였다. 색색의 깜찍한 정장을 입은 아이들과 그와 맞춰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부모님들이 오가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너도나도 사진을 찍는 학교 정문에서 였던가. 차에 카메라를 두고 왔다며 가지러 간 어머니 대신 형이 가버린다며 울먹이던 동생을 달래다가, 그러다가 발견했을 거다. 연분홍 꽃잎이 하늘거리며 춤추는 그 아래에 서서, 갈대처럼 웃고 있던 사내아이를.
온통 봄이 가득한 주변에서 오직 혼자만 가을인 아이였다. 청량한 가을하늘 아래 넓게 펼쳐진 갈대밭을 고스란히 머리위에 얹고 있는 아이. 가을바람에 잘게 흔들리는 갈댓잎처럼 간지럽게 웃으며 카메라를 향해 자그마한 두 손을 들어 브이 자를 만들어내던 그 아이를 본 순간이었다. 모브는 제 심장이 멈춰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무서운 착각을 했더랬다. 쿵, 하고 멈춰버렸던 심장은 아이가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쳤을 때에는 또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었지. 아이가 등에 멘 하늘색 란도셀을 고쳐 메며 모브에게 달려왔을 때에는 우유처럼 하얗던 얼굴이 딸기우유처럼 변해 있었다. 그런 모브에게, 아이는 손을 내밀었던가.
‘안녕? 나는 레이겐 아라타카라고 해.’
갈대처럼 간지럽게, 아니, 길가에 핀 색색 깔의 코스모스 꽃처럼 어여쁘게도 웃으며 아이는 제 이름을 말했었다.
‘나, 나는 카게야마 시게오야..’
내가 이 예쁜 손을 잡아도 될까.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쥐어짜 두 손으로 덥석 그 손을 잡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모브 역시 제 이름을 말했을 거다. 형의 관심을 빼앗겨 버린 한 살 어린 동생이 제 허리를 꼬옥 붙잡아 당기는 것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 순간 모브는 긴장해 있었다. 떨렸고, 설렜으며, 이 만남이 너무나 기뻐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잘 부탁해. 아, 우리 같이 사진 찍을까? 하고. 서슴없이 말하며 모브를 잡아끄는 아이는, 레이겐은 모브의 눈에 너무도 어여뻤으니까. 모브가 여지껏 봐 왔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정말로 가장 예쁘다고 생각했던 츠보미와도 버금갈 정도로,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그래.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첫사랑이었다.
물론 그 어린 때에는 제 감정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지만.
모브가 제 감정이 어떤 것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건 언제였더라. 중학교에 입학할 때 즈음이었을 거다. 아니,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즈음이었나? 아무튼. 그 때에, 모브는 레이겐이 이사를 간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입학식 때 처음 만나고, 넉살좋은 레이겐의 성격 덕에 함께 사진도 찍고. 모브 이름의 한자를 보고서는 모브, 라는 별명까지 냉큼 지어버렸던 레이겐은, 우연의 일치인지 운명인지 모브와 집도 가까웠었다. 덕분에 거의 매일같이 함께 등교하고, 하교하고. 한 살 어린 동생인 리츠가 입학한 후로는 언제나 셋이서 등하교를 함께했다. 특히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운도 좋게 쭉 같은 반이 되었던 모브와 레이겐은 거의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다녔다 해도 좋을 정도였다. 6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그랬는데.
처음 레이겐의 입에서 이사라는 말이 나왔을 때, 모브는 레이겐을 처음만난 이후로는 겪어보지도 못했던 제 심장이 멈춰버리는 것만 같은 감각을 또다시 맛보아야만 했다. 쿵, 하고. 하지만 그때처럼 위로 솟다가 턱에 부딪혀버린 것만 같은 감각이 아니라, 반대로. 아래로 뚝 떨어져 발밑에 붉은 피를 흘리며 으깨져 버린 것만 같은 감각.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한 감각이었다. 손끝이 떨리고, 눈앞이 아찔해지는 소름끼치는 감각이었다. 떨리는 두 손으로, 모브는 레이겐의 팔을 꽉 붙잡았었다. 가지마. 그렇게 말했을 거다. 나도 가기 싫어, 그렇게 대답이 돌아왔었다. 어린나이에 곧 찾아올 얼음장 같이 시퍼런 이별이 두려워 모브와 레이겐은 부둥켜안고 한참을 투명한 눈물방울을 뚝뚝 떨구며 서로의 어깨를 적셨었다.
하지만 아이의 사정이 안타까울 지언정 어른의 사정이라는 것도 녹록치가 않아서. 결국 이삿짐을 싣는 시퍼런 트럭에 몸을 함께 싣고 떠나버리는 레이겐을 바라보며, 모브는 그야말로 엉엉 울었었다. 뚝뚝 떨어지는 투명한 물방울이 두둥실 떠올라 초록빛 나뭇잎을 적시고, 회색 콘크리트 담벼락을 적시고. 마침 담벼락 위를 산책하던 하얀 고양이도, 모브 옆에서 제 코끝이 벌게지려는 것을 꾹 참듯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지르고 있던 리츠도. 굴러다니던 짙은 회색 돌멩이도, 전봇대 아래에 부쩍 빨리 피어있던 노란 민들레도. 모브의 서글픈 울음과 함께 주변의 모든 것들이 공중으로 두둥실 떠올라 버렸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주택가의 집들이 흔들리고, 땅도 조금 갈라졌던가. 당황한 모브의 어머니가 모브를 끌어안고 달래어 봐도 한참동안 울음을 그치지 못했었지. 꼭 전화해야 해? 하며 서로 나눈 핸드폰 번호로 전화가 왔을 때에서야 겨우 울음을 뚝 그쳤더랬다. 하지만 울음을 그치고도 모브는 한참을, 레이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핸드폰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놓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말 많고 탈 많은 이별을 하고 고작 며칠. 검은 가쿠란에 옅은 감색 가방을 손에 들고, 입학식 현수막이 연분홍 꽃잎과 함께 흔들리는 교문으로 들어서던 모브는 언제나 주머니에 꼭 넣고 다니는 핸드폰으로 온 한 통의 전화를 받았었다. 여- 모브.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를 들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제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도. 묘하게 겹쳐지는 목소리에 설마, 하고 돌아 선 그 앞에는 거짓말처럼 레이겐이 있었지. 저와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가방을 든 레이겐이 있었다. 주변은 온통 봄인데, 혼자서만 가을을 몽땅 품고 있는 레이겐이, 다시 모브의 눈앞에 있었다. 알고 보니 이사 간 곳이 고작 몇 정거장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나.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귀에 대고 있던 검은색 폴더식 핸드폰을 탁, 하고 닫던. 처음 만난 그 날처럼 손을 내밀며 길가에 핀 색색 깔의 코스모스 꽃처럼 웃는 그 얼굴을 바라보다, 바라보다가.
‘다시 잘 부탁해?’
레이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모브는 달려가 그 몸을 있는 힘껏 안았었다. 응, 응. 눈가에 맺힌 기쁜 눈물이 꽃잎처럼 떨어질까 꾹 참으며 레이겐의 어깨에 제 고개를 묻었더랬다.
‘또 매일, 같이 학교가자.’
‘엑. 나 이제부턴 역에서 내려서 갈 텐데?’
‘내가 매일 역으로 마중 갈게.’
‘그게 뭐야.’
울먹이며, 웃으며. 레이겐이 쑥스럽다고 싫어해 어릴 적처럼 손은 맞잡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깨를 나란히 하며 둘은 교실까지 함께 갔었다. 마치 운명처럼 또 같은 반이었지.
그 때, 한 번 레이겐을 떠나보낼 뻔 했을 때. 잃을 뻔 했을 때. 모브는 그 때 깨달았다. 아, 나 아라타카군을 좋아하는 구나. 제 심장이 오롯이 그만을 향해 반응하는 이유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쭉 제 안에서 간질거리며 싹트던 것의 이름을, 그 때에서야 모브는 알아챘었다. 그리고 그 때 즈음에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또 하나.
태어날 때부터 초능력이라는 남다른 힘을 가지도 태어난 모브의 눈에 가끔, 아주 가끔 보이던 것이 있었다. 유령처럼 보려고 하면 볼 수 있는 것도, 그저 눈을 뜨면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남들의 눈에는 분명 보이지 않지만 모브의 눈에만 보이는 것.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다가 아주 가끔 헛것처럼 보이는 것. 붉은 실이었다. 그것도 하얀 거미줄처럼 어딘가에 수놓아진 것이 아닌 반드시 누군가의 새끼손가락에만 그저 매여 있는 붉은 실. 정확히는, 누군가와 또 누군가를 잇는 붉은 실이었다. 마치 심장에서 혈관을 타고 흘러나온 피가 흐르던 형태 그대로 굳어버린 듯 언뜻 붉고, 언뜻 투명하고, 깨끗한, 그런. 심장이 이어진 듯 이어진 실의 끝과 끝에 존재하는 두 사람의 관계가 무엇인지, 그 붉은 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때까지 모브는 알지 못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아니, 네 번 정도일까? 고작 그 정도밖에 본 적이 없던 붉은 실이 매인 손가락을 가진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굳이 깊게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다. 그 붉은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제 담임선생님의 새끼손가락에 나타났을 때도 말이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붉은 실이 갑자기 나타난 순간, 모브는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을지언정 놀라거나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오늘 학교 끝나면 아라타카군하고 같이 서점에 갈까. 읽고 싶은 책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저 그런 생각에 빠져 담임선생님이 교탁에서 무언가 말을 할 때마다 눈앞에서 흔들거리는 붉은 실을 거의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팽팽하던 붉은 실이 조금씩 헐렁해지며, 복도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을 때. 조례를 마친 담임선생님이 교실을 나가, 복도에서 누군가와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창문 너머로 보았을 때. 마치 두 사람의 새끼손가락을 잇고 있는 붉은 실처럼 수줍게 뺨을 붉히며 참 어여쁘게도 마주 웃고 있는 두 어른을 보며 모브는 눈을 동그랗게 떴었다. 아, 하고. 그 때서야 자신이 아주 가끔씩 보아왔던 붉은 실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옛날이야기 중 그런 게 있었던가.
운명인 두 사람의 새끼손가락에는 보이지 않는 붉은 실이 매여 있다는 이야기.
새끼손가락에 매인 붉은 실의 끝자락에는 운명의 사랑이 있다는, 그런 이야기.
거리를 걷다 보면 종종 보이는 연인들에게서도, 교내에서 가끔 눈에 띄는 연인들에게서도, 심지어 자신의 부모님에게서도 보이지 않아 몰랐었다. 보였다가 사라졌다가, 같은 사람의 새끼손가락에 매여 있는 모습조차 한결같지는 않아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서로가 가까이 있어야만 보이는 거였구나. 그렇게 생각하던 그 때에 알았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붉은 실이, 이야기에서나 나오는 그 붉은 실이라는 것을. 운명의 신이 손수 묶었다고 하는 인연의 상징이라는 것을. 서로를 마주보며 그저 행복하게 웃는 담임선생님과 그 연인의 어여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고서야 알았다. 아직 미래까지는 보지 못한 모브였지만, 저들의 미래가 보이는 듯 했다. 수억의 인연을 뚫고 맺어진 진정한 운명의 상대. 행복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함께 거니는 길은, 온통 봄날의 꽃잎으로 가득할 터였다. 그 미래가, 순간적으로 모브의 눈에 보였다. 보였고, 제 양 손을 들어 보았고, 레이겐을 보았다.
푹, 고개를 숙여버렸다.
제 두 손 중 어느 손가락에도, 레이겐의 두 손 중 어느 손가락에도, 운명의 붉은 실은 매여 있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뭐,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모브의 부모님은 붉은 실 따위 없어도 충분히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고 있다. 모브도, 리츠도 제 가정에 불만을 가진 적은 없었고 가정에 큰 분란이 있던 적도 없었다. 그리고 그건 옆 집 아주머니 댁도, 레이겐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그야 물론 붉은 실로 이어진 운명의 사람이라면 좋겠지. 정말 좋을 거다. 운명의 신이 정해준 나만의 사람이라는 게 어떻게 기분 좋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운명이 아니라고 해서 불행해지는 건 아니지 않나. 오히려 운명의 상대를 찾아, 새끼손가락에 붉은 실이 매인 손을 맞잡는 것이 더욱 특별하고 드문 일이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응? 운명의 붉은 실?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냥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라고. 모브의 사랑이 그리 말했었다. 붉은 실 따위보다 몇 배나 어여쁜 붉은 입술 옆에 하얀 밥풀을 묻히고 주먹밥을 우물우물 씹어 먹으며. 태평하게 내뱉는 레이겐의 말에 모브는 제 가슴을 쓸어내렸더랬다. 턱 끝까지 차올라 혀뿌리를 잡아당기는 안도의 한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레이겐의 입가에 묻은 하얀 밥풀을 떼어 익숙하게 제 입 안으로 집어넣던 모브의 눈은 희망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운명의 붉은 실 따위가 무어 그리 대수일까.
그 까짓 것이 없어도 모브는 운명의 신이 하는 말 따위는 들리지도 않을 만큼 레이겐을 사랑했다. 그리고 레이겐도, 분명. 붉은 실 따위에 연연하지 않을 터였다. 설령 레이겐의 새끼손가락에 붉은 실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레이겐의 운명의 상대가 나타나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다 할지라도. 그런 것 따위에는 개의치 않고, 분명 모브를 택할 거라고.
“있잖아, 모브. 이건 다른 녀석들한테는 비밀인데..”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
청량한 가을 하늘 아래, 담벼락 밑에 수줍게 피어난 채송화 꽃잎처럼 붉게 물든 뺨을 긁적이며 쑥스럽게 웃는 레이겐의 얼굴과,
“어제 옆 반에 새로 전학 온 애 말이야. 검은 단발머리의 귀여운..”
모브가 난생 처음으로 보는 표정으로 사랑스럽게 웃는 그 얼굴과,
“나도 처음 알았는데, 첫 눈에 반한다는 건 이런 느낌이었나봐.. 아! 정말로 다른 녀석들한테는 비밀이다? 분명 엄청 놀려댈 테니까. 너한테만 특별히 말해주는 거야.”
눈앞에서 살랑거리는 붉은 실 자락은, 왜 이리도 선명한지.
운명의 붉은 실.
고작 그까짓 것이 무어 그리 대수일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전부 다 산산조각이 나 잘게 부서져 버릴 정도로, 운명은 잔인하리만큼 선명하게 모브를 뒤흔들었다.
하루, 또 하루. 고작 한 번만 보고 좋아하게 되었다던 옆 반에 전학 온 소녀와 레이겐은 앗, 할 틈도 없이 너무나도 빨리 서로에게 가까워져 갔다. 어제는 분명 둘 사이에 다섯 발자국의 거리가 있었는데 오늘은 고작 네 발자국의 거리만 있는, 그런 나날. 마치 서로의 새끼손가락에 매인 붉은 실에 이끌리듯 레이겐과 소녀는 가까워져 갔고, 딱 그만큼 모브와는 멀어져 갔다.
점점 그 운명의 소녀와 가까워지는 레이겐을 바라보며 모브는 제 주먹을 꾹 쥐었다. 레이겐이 멀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유독 분위기를 잘 읽지 못하는 모브조차 알아차릴 정도로 선명한 현실이었다. 오늘 학교 끝나고 뭐 하고 놀까? 언제나 먼저 물어오던 레이겐이 말을 꺼내는 횟수가 점점 줄어갔다. 같이 하교하는 날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점심에 같이 밥을 먹는 날도, 점점.
그러다가, 레이겐 안에서 모브의 자리가 좁아져만 가다가. 그러다가 생긴 일이었다. 그러다가, 레이겐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미안, 모브. 내일은 마중 나오지 않아도 되니까... 그 애랑 역에서 만나서 같이 가기로 했거든.”
쑥스럽다는 듯, 기쁘다는 듯. 숨김없이 제 어여쁜 선분홍색 감정을 두 뺨에 잔뜩 칠한 채 모브를 향해 웃는 레이겐을 보는 그 순간, 모브는 제 심장이 태어나서 두 번째로 땅바닥에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꼈다. 손끝이 떨리고 눈앞이 아찔해지는 그 소름끼치는 감각은 레이겐을 잃는 줄만 알았던 그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아니, 이토록이나 참담했던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제 발밑에 으깨져 있는 검붉은 심장의 조각들이, 제 하얀 신발을 온통 투명하게 적시고 있는 눈물 같은 핏자국이. 시리도록 선명하게 검은 눈 안으로 파고들어오고 있었다. 모브는 떨리는 제 마른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응..”
그 말밖에 흘려내지 못하고, 다시 다물고 말았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모브가 누구보다 사랑하는 레이겐이 너무나도 행복하게, 어여쁘게 웃고 있는 걸. 늘 함께 있었던 모브조차 난생 처음 보는 표정으로,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웃고 있는 걸. 고맙다 말하며 제게 등을 돌리는 그 모습조차 너무도 어여뻐서, 검은 등 뒤로 살랑거리는 붉은 실이 너무도,
거슬려서.
덤덤한 검은 표정 아래 하얀 두 손가락을 세워, 모브는 가위를 만들었다.
그리고,
싹둑.
연분홍 꽃잎이 하늘거리며 춤추는 봄날이었다. 불어오는 연분홍색 바람은 따스하지만 아직 공기 중에는 눈처럼 새하얀 추위가 조금 남아있는 날. 똑같은 검은색 가쿠란을 입고, 똑같은 하얀 실내화를 신고. 모브와 레이겐은 회색 아스팔트 옥상 한 켠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모브의 단정한 검은 머리카락도, 남들은 다 봄인데 저 혼자만 가을을 끌어안은 레이겐의 옅은 갈색 머리카락도 연분홍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꽃잎이 흩날렸다. 눈을 닮은 하얀, 허나 보드랍게 연분홍색을 담은 꽃잎이 바람에 날려 옥상까지 올라와 두 사람의 하얀 실내화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뚝, 뚝. 투명한 눈물방울도 뚝, 뚝.
“날 좋아한다고, 그랬으면서...”
“아라타카군..”
옆 반에 전학 온 검은 단발머리의 소녀와 레이겐이 헤어졌다. 아니, 그 소녀가 전학을 온 지도 벌써 반년 정도가 지났으니 이제는 그냥 옆 반 소녀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아주 잠깐 사귀었던 그 소녀에게 레이겐이 차인 것은 바로 어제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으니까. 관계에 있어 충분히 있을 수는 있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들어 부쩍 서먹해진 두 사람 사이에서는 얼마든지 피어날 수 있는 새로운 감정이었다. 그야 정이 많은 레이겐은 그럼에도 열심히 사랑하려 했었지. 그 소녀를 사랑하려 최선을 다했었다. 모브도 알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이별이었다. 더 이상 두 사람을 잇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일어난, 어쩔 수 없는 이별.
검은 소맷자락으로 얼마나 문질렀는지 벌겋게 부어오른 두 눈 아래로 채 닦이지 못하고 흘러넘친 투명한 눈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모브는 손을 뻗어, 그런 레이겐의 등을 쓸어주고, 어깨를 매만져 주었다. 눈 아파. 계속 물기가 어리는 눈을 문질러대고 있는 팔을 잡아 내리고, 대신 제 손으로 눈가를 닦아 주었다. 닦아주다, 닦아주다가. 모브는 뜨끈하게 열이 오른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계속 숙이려고만 드는 레이겐의 고개를 들어 제게로 향하게 했다. 곧장 시야 한가득 울음 고인 어여쁜 검은 눈동자가 들어찼다. 모브는 떨리는 제 마른 입술에 꾹 힘을 주었다. 조금만 정신을 놓았다가는 사랑스러운 물기로 범벅이 된 이 눈가에 입 맞춰 버릴 것만 같았다. 모브는 아쉬운 듯 느릿하게 레이겐의 뺨에서 두 손을 거두었다. 아직은, 아니었으니까.
대신 두 팔을 뻗어 모브는 레이겐을 끌어안았다. 레이겐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순순히 모브의 가슴팍에 제 머리를 기대었다. 그런 레이겐의 등을 손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모브는 입을 열었다. 괜찮아. 괜찮아. 귓가에 상냥한 위로를 속삭였다.
“모브, 모브. 넌, 나 떠나면 안 돼..? 나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고 말하기 없기야..?”
울음 색이 잔뜩 칠해진 떨리는 목소리로 가엾게도 그리 말하는 레이겐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모브는 울음으로 잘게 떨리는 귓가에 사랑스러움을 듬뿍 담아 속삭였다.
“물론이지. 나한테 아라타카군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제 가슴팍을 적시며 등에 둘러지는 두 팔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살랑거리는 붉은 실이 한 가닥. 인연의 상징, 운명의 붉은 실이었다. 검은 등판에 둘러진 검은 소매, 그 끝에 삐져나온 하얀 손, 새끼손가락에 매인 붉은 실 자락이 눈앞에서 선명하게 살랑이고 있었다. 제 새끼손가락에 매인 붉은 실이, 레이겐의 새끼손가락에 매인 붉은 실이. 헐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가운데에 꽉 엉켜버린 매듭을 두고, 서로 이어진 채, 그렇게.
‘아아.’
제 품에 가득한 사랑스런 온기 뒤로 살랑거리는 붉은 실 자락을 손끝으로 가볍게 잡아 모브는 입을 맞추었다.
‘운명의 신이 말하길.’
짙게, 웃음 지었다.
‘우리는 붉은 실로 이어진
운명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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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을 할 때까지도 등짝만 하던 란도셀을 벗어던지고, 검은 가쿠란을 걸친 지도 1년이 한참 지나가건만. 여즉 어린티를 벗지 못하고 아이 같기만 한 보드라운 볼을 두 손으로 감싸며 레이겐은 모브에게 입을 맞췄다.
때는 방과후. 장소는 학교 뒤뜰. 청소구역을 나눌 때부터 계획한 거였는지, 우연의 일치였는지. 두 사람만이 남아 커다란 빗자루로 낙엽을 쓸어내던, 그 도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참을 서로를 힐끗거리던 것이 무색하게도 참으로 순조롭게. 가까워진 입술은 맞물렸고 그대로 정지했다. 어린아이 같은 입맞춤이었다. 그저 입술을 부대낄 뿐인, 키스라고도 부르지 못할 짧고, 가벼운 입맞춤. 그마저도 처음에는 수줍어서 언제 입술을 떼어내야 할지 타이밍을 잡지 못해 한참을 버벅거렸었나. 청소시간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에 놀라 허겁지겁 떼어낸 입술을 제 손으로 감싸며 한참 동안 서로 얼굴만 붉힌 채 눈도 못 마주쳤더랬다. 그게, 벌써 몇 달 전 일이었더라.
이제는 마냥 어린아이처럼 입술만 닿았다 떨어지는, 그런 유치한 입맞춤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마냥 능숙한 것은 아니어서. 레이겐은 제 손가락에 감기는 보드라운 우윳빛 살결을 상냥하게 어루만지며 슬그머니 혀끝으로 모브의 입술을 핥다가, 자그맣게 열린 틈으로 제 혀를 쏙 집어넣었다. 모브의 몸이 움찔하는 것이 맞닿은 입술로, 두 손으로, 손톱만한 틈만을 두고 바짝 붙은 몸으로 느껴졌지만 개의치는 않았다. 아니, 되려 어린 그 반응이 즐거워 놀리듯이 입 안으로 집어넣은 혀를 굴리며 웃자 레이겐의 교복자락을 쥐고 있던 모브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불퉁한 반격이었지.
넣었던 제 혀를 쑥 밀어내며 되려 제 입으로 들어오는 말캉한 살덩이에 꾹 감은 레이겐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파고 들어온 살덩이는 그저 머무는 것에 그쳐주지 않았다. 레이겐이 그랬던 것을 흉내라도 내듯 혀를 감싸 올리다가, 휘어 감다가. 맞닿은 질척한 살덩이를 조금 거칠다 싶을 정도로 비벼대는 감촉에 레이겐의 목 끝에서는 저도 모르게 신음이 송글송글 맺히고 말았다.
육체뭐시기부였던가. 듣도 보도 못한 부에 갑자기 들어가 운동을 한다 할 때만 해도 그저 그러려니 했건만. 교복자락을 움켜쥐다가, 이제는 제 팔뚝을 움켜쥐는 손아귀의 힘이 점점 강해지는 것에 레이겐은 겉으론 태연한 척 해도 속으론 제법 놀라고 있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분명 리드하는 것은 레이겐이었는데. 어째 점점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는 것 같은 위기감에 레이겐은 미간을 옅게 찌푸리며 혀를 움직였다.
이젠 마냥 어수룩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또 능숙하지도 않은 키스였다. 서로를 붙잡은 손아귀에는 어느새 힘이 들어가고, 부대낀 입술에도 천천히 고집과 힘이 실렸다. 달아오르는 열을 견디지 못해 거칠어진 숨결만큼이나 거친 입맞춤이었다. 처음에 수줍게 입술만 대었다 겨우 떼었던 것이 다 언제였다는 듯. 딱, 딱, 치아가 부딪히고, 거칠게 비벼지는 질척한 살갗의 강렬한 자극에 몸을 떨며, 그럼에도. 한참을 그러다가 숨이 겨워 겨우 입술을 떨어트리는 순간마저 짐승의 영역싸움이라도 되는 양 거칠고 조금 얼얼한, 그런 입맞춤이었다. 이맘때 즈음 여자아이들이 늘 들고 다니는 립글로즈라도 바른 양, 입술에는 서로의 타액이 질척하게 칠해져 번들거리고 있었다. 몇 번이나 부딪혀서 얼얼한 치아와 계속 벌리고 있던 탓에 뻐근한 턱을 서로의 거친 호흡으로 적시는 그 시간. 청소시간을 마치는 종소리가 울리기까지 앞으로 5분 정도일까. 조금 젖은 듯 한 서로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또 바라보다가.
먼저 시선을 슬그머니 돌린 것은 모브였다. 여즉 아이처럼 뽀얗게 우유색을 띈 뺨을 선분홍색으로 옅게 물들이며. 새까만 눈동자를 데로록 굴리던 것을 멈추고 모브의 시선이 다시 레이겐을 향했다.
“괜찮으려나..”
조용한 열기를 띄운 채 흘러나온 물음에 레이겐은 씨익, 웃었다. 조금 짓궂은, 장난스러운, 악동 같은 웃음이었다. 열기로 들떠 발그레 물든 뺨 아래로 그런 웃음을 피워 올리며, 레이겐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제 입술을 핥아 올렸다. 입을 열었다.
“왜? 나쁜 짓 하는 것 같아서 짜릿하고 좋잖아.”
다시, 입술이 맞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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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뺨을 감싸오는 뜨겁고 커다란 손. 어릴 적에는 그저 닿기만 해도 긴장으로 축축해졌건만. 이제는 제 뺨마저 달굴 정도의 열기를 품고 진득하게 닿아오는 그 손의 뚜렷한 변화에 눈을 가늘게 좁히며, 레이겐은 제 입술을 덮어오는 모브의 입술에 호응하듯 작게 입을 벌렸다.
때는 방과후. 장소는 학교 뒤뜰. 청소구역을 정할 때부터 계획한 대로 오직 둘만이 남아 커다란 빗자루로 낙엽을 쓸어내던 그 순간에 일어난 익숙한 일이었다. 졸업하는 순간까지도 등짝만 하던 란도셀을 벗어 던지고, 졸업할 때 즈음에는 품이 조이던 가쿠란도 벗어 던지고, 더 성장할 것을 생각해 부러 품을 넉넉하게 맞춘 블레이져가 이제는 거의 딱 맞아갈 즈음. 사람이 잘 오가지 않는 학교 뒤뜰, 쓰레기도 별로 없이 낙엽만 조금 굴러다니는 그곳 청소당번에 딱 당첨된 두 사람은 대충 모아둔 낙엽더미 옆쪽에 빗자루를 던져둔 채 서로의 입술을 탐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등을 받치는 단단한 콘크리트 벽의 서늘한 온도에 익숙해져버린 레이겐이 불퉁하게 눈을 흘겼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제 뺨을 감싸오는 모브는 요지부동이었다. 중학생 때 처음 육체뭐시기부에 들어 운동을 한다고 했을 때만 하더라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제는 레이겐 보다 손가락 두 마디만큼은 더 커버린 키와 콘크리트 벽과 제 몸 사이에 레이겐을 가두는 단단한 몸, 레이겐의 뺨을 다정하게 감싸는 커다란 손에서는 어릴 적 귀여웠던 우유향의 흔적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치사하게 혼자 훌쩍 커버리기냐. 억울함도 약간 담아 불퉁하게 쏟아내는 레이겐의 말에도, 이제 모브는 그저 쿡쿡 웃으며 고개를 숙여올 뿐이었다.
처음은 언제나 수줍은 듯 달콤하게였지.
어린아이끼리 하는 풋풋한 입맞춤처럼. 그저 입술만을 붙였다가 뗄 뿐인 가벼운 입맞춤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모브의 행동에 그제야 삐죽 솟았던 레이겐의 눈썹의 끄트머리가 제 자리를 찾았다. 멋모르고 입술만 비벼대던 때와는 달리 이마에, 미간에, 콧등에. 달콤함을 듬뿍 묻힌 채 차근차근 입술이 닿아오고 있었다. 그 간질거리는 감촉에 불퉁하게 굳어져있던 레이겐의 표정도 완전히 풀어지고 말았다. 하는 수 없다는 듯 두 팔을 뻗은 레이겐은 모브의 목에 팔을 둘렀다. 대략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인가. 아직은 발뒤꿈치를 세우지 않고도 충분히 두 팔을 두를 수 있는 거리감에 슬며시 솟아나는 안도감은 무시한 채 레이겐은 제 윗입술을 할짝이고 있던 혀를 맞아 입술을 조금 벌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파고들어오는 말캉한 감촉에 입술 끄트머리를 슬쩍 끌어 올리며, 레이겐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것이 신호가 된 듯 입맞춤은 한 층 농밀함을 더했다. 작게 벌어진 입술을 더욱 벌리고 들어와 혀끝에 톡. 잠시 닿았다가 금세 떨어진 혀는 매끄러운 치아를 어루만지듯 훑기 시작했다. 맞물린 입술과 가장 가까운 앞니부터 안쪽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단단한 이까지. 형태를 덧그리듯 훑으며 은근슬쩍 레이겐의 약한 부분을 눌러대는 것에 레이겐의 목 안쪽에서는 송글송글 억눌린 신음이 맺히기 시작했다. 입 안으로 옅은 웃음소리가 퍼진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
모브의 목에 두른 팔에 조금 힘을 줘 끌어당기며, 레이겐이 제 입안에서 놀고 있는 말캉한 살덩어리를 약하게 깨물었다. 장난치지 마. 소리로써 전해지지 않은 그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뺨을 감싼 커다란 손, 손가락이 살살 움직여 부드럽게 뺨을 쓰다듬어왔다. 미안해. 대답처럼 들려오는 행동에 레이겐의 미간에 잡혀있던 주름이 조금 펴지자 모브는 다시 옅게 웃으며 혀를 움직였다.
볼 안쪽의 여린 살갗은 레이겐이 유독 잘 느끼는 곳이다. 수 없이 많은 경험으로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모브는 부러 그곳을 피하며 레이겐을 천천히 자극해 오곤 했다. 이번에도 역시. 레이겐으로서는 참으로 얄밉기 짝이 없었지만, 이미 넘어가버린 주도권을 빼앗아 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어서. 때로는 소심하게, 때로는 대담하게. 혀의 판판한 곳을 간질이듯 혀끝으로 훑다가, 또 갑작스레 뱀처럼 휘감아 당겨오는 것에 목을 울리며 신음을 삼켜내는 것 밖에 레이겐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물론 조금이라도 틈만 보인다면 반격할 생각은 가득이었지만, 어째 오늘의 모브는 레이겐에게 반격할 기회를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도통 보이지 않는 틈에 끙, 레이겐이 앑는 소리를 내자 다시 한 번 맞물린 입술 안쪽으로 옅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스스로가 자아를 가진 생명체라도 되는 양, 레이겐의 입 안쪽을 휘젓던 혀가 스르르 빠져나간 것은 그로부터 한참은 후였다. 계속 벌리고 있느라 뻐근한 턱이 가쁜 호흡과 함께 달달 떨릴 즈음. 떨어지기 아쉽다는 듯 입천장을 간질이다가, 혀를 통째로 감아올렸다가. 천천히 떨어져 타액으로 질척하게 젖은 입술을 핥아 올리고 나서야. 손톱만한 거리를 두고 물러나는 모브의 입술에 레이겐은 그제야 막혀있던 호흡을 터트렸다.
“숨, 코로 쉬래도.”
가쁘게 터져 나오는 레이겐의 뜨거운 숨결 한 올 한 올 모두 제 입술에 머금으며 모브가 말했다.
“하아.. 그럴..하.. 틈을 안준 게 누군데..!”
눈썹을 삐죽하게 치켜세우며 대답하는 레이겐의 말에 데로록. 레이겐의 뾰족한 시선을 피해 슬그머니 굴러갔던 모브의 눈동자는 레이겐의 호흡이 진정될 즈음에야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주 잠시 엇갈렸던 시선이 다시 맞았다. 깜빡, 깜빡. 잠시 그저 시선을 맞추고 눈을 깜빡이다가, 먼저 입을 연 것은 모브였다. 레이겐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을 뻗어 레이겐의 등과 단단한 콘크리트 벽 사이로 찔러 넣고, 모브는 늘 덤덤히 깜빡이던 눈을 옅게 휘며 말했다.
“알았어. 천천히 하자.”
손톱 하나. 그 좁은 거리조차도 없이 맞붙는 몸과 함께 잠시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겹쳐졌다. 이번에는 짧게. 허나 진득하게. 허나 달콤하게. 닿았다가, 목 안쪽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여린 살갗을 뾰족한 혀끝으로 톡톡 두드렸다가, 느긋하고 농밀하게 떨어지고. 다시 닿았다가, 가볍게 서로의 혀끝만을 비비다가, 산뜻하게 떨어지고. 또 닿았다가, 깊게, 뜨겁게.
달아오른 두 개의 살덩이가 서로를 탐하며 섞이는 흥분에 두 사람의 호흡은 과할 정도로 거칠어져 있었다. 중간 중간 호흡을 허공에 흩트리지 않았더라면 질식해 버렸을 만큼. 뜨겁고, 달콤하고, 질척이는 열락이 찬찬히 온 몸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몇 번째인지도 모르게 입술이 겹쳐졌을 때, 레이겐은 제 허리춤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잘게 허리를 떨었다. 입술이 떨어졌다. 모브. 가늘게 이름을 부르자 다시 입술이 겹쳐져 왔다. 그와 동시에 블레이져 위로 허리춤을 매만지던 손이 미끄러지듯 바지 안쪽으로 파고 들어와 능숙하게 골 사이로 스미는 오싹한 감각에 레이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코끝이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입술이 맞닿은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모브의 눈이 고스란히 보였다. 대체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깜빡임도 없이 레이겐의 모든 것을 담아내겠다는 듯, 곧게 뜨인 눈가가 가늘어지는 것이 촉촉이 젖은 시야 안에서 너무도 선명히 보이고 있었다. 가늘어지는 눈가. 새까만 눈동자. 그 안쪽에서 불타오르고 있는 끈적한 것이 고스란히 눈 안으로 스며들어오는 뜨거운 감각. 입술이 떨어졌다.
“잠깐, 잠깐..! 여기서..? 곧 청소시간도 끝나는데..?!”
당황에 젖은 레이겐의 목소리와 함께, 주륵. 이맘때 즈음 여자아이들이 늘 들고 다니는 립글로즈라도 바른 양, 입술에 질척하게 칠해져 번들거리던 서로의 타액이 가는 선을 그리며 레이겐의 턱 끝으로 흘러내렸다. 질척하게 흘러내리는 그것을 닦아낼 틈 따윈 없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고개, 깊숙하고 농염하게 파고드는 손길. 그와 함께 귓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말에, 질척하게 흘러내린 그것을 제 혀로 핥아내며 벌어지는 모브의 입술이 뱉어내는 말에. 옅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흘려내는 그 말에, 레이겐은 목 끝까지 차오른 침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나쁜 짓 하는 것 같아서 짜릿하고 좋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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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현관문 앞, 늘 신고 다니는 구두가 어지러이 놓여 있는 곳에 두 다리를 걸치고, 복도에 드러누운 레이겐은 터져 나오는 한숨을 푹 하니 내쉬었다. 몸을 짓누르는 무게 때문에 숨이 막혀 잘 나오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이걸 어째야 하나, 하는 난감함이 강했다. 레이겐은 그대로 손을 뻗어 제 위에서 언제부턴가 저보다도 부쩍 커져버린 몸뚱이를, 넓어진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11시 46분 즈음이었나. 자정은 넘기지 않았을지언정 손님이 찾아오기에는 늦은 시간에 초인종이 울렸다. 현관문을 넘어 거실까지 들려오는 커다란 소리에 소파에 반쯤 드러누워 읽느니 마느니 하고 있던 책을 덮고 레이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띵동- 띵동- 소파가 놓인 거실에서 현관문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가로지르는 그 짧은 시간도 기다리지 못하겠는지 시끄러울 정도로 울려대는 소리에 레이겐은 제 뒷머리를 북북 긁으며 네네, 건성으로 대답하며 걸어갔었다. 즐겨 신는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있는 곳, 구두를 밝지 않도록 맨발로 차가운 바닥을 밟고 문을 열었다. 망설임도, 주저함도, 의심도 무엇도 없이 레이겐은 문을 열었다. 손님이 찾아올 리가 없는 늦은 시간에 찾아온 방문객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잠금장치를 풀어 손잡이를 돌리며, 레이겐은 피식 웃고 말았다.
“여, 훌륭한 주정뱅이가 되어 오셨구만.”
눈살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로 짙게 풀기는 술 냄새에도 레이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고 말았다. 그런 레이겐의 웃음소리에 문이 열린 것을 인지하지 못했는지 한 번 더, 띵동- 하고 초인종을 누르던 리츠의 고개가 느릿하게 돌아가 레이겐을 향했다. 마주한 얼굴은 붉었다. 술기운에 푹 절어 코끝까지 벌겋게 물들어 있는 모습은 평소의 멀끔하고 일견 냉철해 보이기까지 하던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은 멀어, 레이겐의 입에서는 다시금 웃음이 터져 나왔다. 뇌가 여즉 술잔에 퐁당 빠져있기라도 한 건지 몽롱하게 뜬 시선으로 리츠가 그런 레이겐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다가, 깜빡이다가, 입이 열렸다.
“레이겐씨다.”
“그래그래, 레이겐씨에요.... 어어어..! 우왁..!”
붉게 물든 잘생긴 얼굴 한 가득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해사한 웃음꽃이 피어난 것에 놀랄 틈도 없었다. 좋아하는 옆집 형을 만난 어린아이처럼 헤실 웃는 리츠를 놀릴 틈도 없이, 곧장 온 몸으로 쏟아지는 묵직한 무게에 레이겐은 당황하며 발을 뒤로 물렸다. 한 발짝, 두 발짝. 물러난 발밑에 자리한 신발을 놓는 공간과 복도를 분리하는 턱에 걸려 기우뚱. 기우는 시야 너머로 끼익, 소리를 내며 닫혀가는 현관문이 보였다. 무거운 문짝 틈으로 좁아지는 어두운 바깥 풍경에, 레이겐은 곧 머리에, 어깨에, 등에 부딪혀올 복도 바닥의 딱딱함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쾅. 소리가 울렸다. 멀찍이서 들렸다. 머리에, 어깨에, 등에 복도 바닥의 딱딱함과 서늘함이 닿아왔다. 사뿐하게, 그저 가만히 닿아오고 있었다. 아, 하며 질끈 감았던 눈을 뜬 레이겐의 시야에 비친 것은 그저 하얗기만 한 복도 천장이었다. 충격도, 아픔도 무엇도 없이. 그저 묵직한 무게감만이 온 몸을 짓누르고 있는 것에 레이겐은 슬쩍 눈동자를 굴렸다. 제 뺨을 간질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에휴. 결국 한숨을 내쉬며 두 손을 뻗었었지.
뻗은 팔을 굽혀 등을 툭툭. 쓰다듬듯이 두드리자 뺨을 간질이던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으응. 어리광을 부리듯, 잠꼬대를 하듯. 바짝 끌어안은 레이겐의 몸에 오롯이 제 체중을 싣고, 어깨에 묻은 제 이마를 부비적거리는 리츠의 행동에 이제는 어이가 없어 웃음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레이겐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대신 다시 한 번 푹 한숨을 내쉬었다. 리츠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던 손의 위치를 옮겨 제 한쪽 뺨부터 귀, 눈가, 입술의 끄트머리까지 간질이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 속에 손을 찔러 넣고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자 몸을 끌어안은 힘이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목소리가 들렸다.
“레이겐씨.”
불리운 이름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을 감으며, 슬며시 호선을 그리고 있던 입술을 열어 레이겐이 대답했다.
“네네. 무슨 일이죠, 카게야마군?”
귓가에 바로 닿아오는 숨결. 귓속으로 곧장 파고 들어오는 목소리. 귓불을 간질이다가, 적시다가, 작은 구멍 깊숙한 곳까지 술 내음과 함께 쏟아져 들어오는 어리광과 약간의 고집이 섞인 목소리에 레이겐은 그만 쿡쿡 웃고 말았다.
“......아라타카씨.”
다시 한 번. 불리운 이름에 레이겐은 굳이 입술에 묻어난 웃음기를 감출 생각도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네네, 리츠군. 그보다 이제 그만 방으로 들어갈까요? 이 아저씨 슬슬 추운데 말이야. 무겁고.”
“아라타카.”
또 한 번.
“얼씨구. 이젠 그냥 존칭 생략이냐.”
“아라타카..”
다시 또 한 번.
바짝 끌어안은 두 팔에 힘을 주고, 숨결로 적시던 귓가를 낮은 목소리로 적시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평소에는 절대로 부르지 않는 이름이었다. 무시할 수 없는 나이차와 성실한 성격 덕에 침대 위에서, 이성이 녹아버릴 정도로 달아올랐을 때에만 아주 가끔. 드물게, 아주 드물게 부르는 제 이름을 마치 그 말만 배운 앵무새라도 되는 양 끊임없이 속삭여대는 주정뱅이의 목소리에 레이겐은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차가운 바닥과 몸을 짓누르는 무게는 조금 괴로웠지만, 술에 잔뜩 취해 드물게 어리광을 부리는 어린 연인을 내쳐버리고 울먹이는 얼굴을 보는 것보다는 참을 만 했다. 레이겐은 하는 수 없이 몸에 힘을 풀었다. 그리곤 제 뺨을 간질이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찔러 넣은 손, 쓰다듬는 손길을 따라 손가락 사이사이에서 살랑이는 부드러운 감촉과 귓가를 적시며 파고들어오는 달짝지근한 숨결을 느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레이겐은 또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딱 5분만이야.”
리츠의 숨결 사이사이에 스며든 술 내음에 취하기라도 한 건지. 붉어진 얼굴을 슬며시 반대쪽으로 돌리며 레이겐은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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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빛깔이 파토처럼 일렁였다. 하얀 하늘, 그 아래에 몽실몽실한 구름바다가 펼쳐진 곳. 금가루가 흩뿌려진 듯 눈부신 햇살에 금빛이 출렁이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새파란 하늘, 그 위에. 새하얀 구름, 더 위에. 하얀 금빛의 빛 무리가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하게 쏟아지는 곳. 그 아래에 서 있었다. 부드럽게 몽실 거리는 구름을 단단히 밟고, 그 위에 서 있었다. 표정이 없는 작은 아이 하나와 일그러진 표정 위에 투명한 눈물방울을 흘려내고 있는 새하얀 천사 하나가.
쏟아지는 빛 무리만큼이나 아름다운 옷을 걸친 천사였다. 금빛이 출렁이는 하얀 옷을 입고, 순백의 커다란 날개를 등에 달고. 새하얀 피부와 새하얀 손을 가진 천사는 울고 있었다. 등에 돋아난 커다란 날개와는 대비되는 새까만 머리카락 아래, 새까만 눈동자에서 끊임없이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창백하리만큼 하얀 두 뺨을 적시며 흘러내려 턱 아래로 뚝, 뚝. 표정이 없는 아이 앞에 무릎 꿇은 하얀 천사는 그렇게, 솜뭉치처럼 보송보송한 구름을 한 올 한 올 적시고 있었다.
하얀 천사의 손이 춤추듯 떨리며 아이에게 향했다. 허공에서 멈췄다가, 다시 다가갔다가, 또 멈췄다가. 한참을 그러다가 겨우. 아이의 입술에 천사의 손가락이 닿았다. 두 손가락이었다.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의 끝이 아이의 보드라운 선 분홍 입술에 조심스레 닿았다가, 곧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다시. 이번에 닿은 것은 한 손가락이었다. 검지 손가락이었다. 손가락 끝이 아닌 세운 손가락의 한쪽 날이 아이의 인중에 닿았다. 꾹 닫힌 입술 위를 세로로 막으며 꾸욱, 힘을 주어야 하는데.
천사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손, 손목이, 온 몸이 떨렸다. 떨리다가, 떨리다가, 결국 제대로 힘을 주어 아이의 인중에 제 손가락을 새기지 못하고, 천사의 손은 아이의 인중에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천사는 하염없이 떨리고 있는 제 손을 반대쪽 손으로 감쌌다. 두 손을 온 몸으로 감쌌다. 아아. 아이의 앞에 두 무릎을 꿇은 채, 온 몸을 숙인 천사의 입에서 고통스런 신음과도 닮은 울음이 터져 나왔다. 끊임없이 흐르던 눈물은 이미 구름 한 덩이를 통째로 적셔 그 아래로 비를 내리고 있었다.
천사는 울었다. 저는 할 수 없어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투명한 눈물을 아이의 발밑에 흩뿌렸다. 아이는, 가을의 갈대밭을 닮은 머리카락 아래에 검은 눈을 한 아이는, 그런 천사를 가만히 보다가, 바라보다가.
아이의 자그마한 손이 뻗어졌다. 빛 무리가 출렁이는 허공을 덤덤하게 가르며, 아이의 두 손이 천사의 팔을 잡았다. 몸을 숙여 끌어안듯이 감추고 있던 그 손을 두 손으로 끄집어내어, 아이는 스스로 제 입술에 그 하얀 손가락을 대었다. 일자로 꾹 다물려 있던 아이의 입술이 옅게 호선을 그렸다. 그 모습을, 아이의 그 행동을 천사는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손을 당겨, 손에 힘을 주어 고집을 부리며 거부하는 것은 할 수 없었다. 그저 순종적으로, 아이의 손길을 따라, 아이가 이끄는 대로. 떨리는 손을 다시 뻗어 아이의 인중에 손가락을 세우는 수밖에, 천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것만이 천사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천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내 무표정이었다가 이제야 아주 조금, 미소를 띠우는 아이를 바라보며 천사는 제 입술을 짓이기며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씹어내었다. 아아, 나의 스승님. 눈을 질끈 감으며 천사는 제 가슴에 멍울지는 이름을 불렀다. 딱 붙은 손가락에 제 입술이 쓸리는 것을 개의치 않고, 아이는 입을 열어, 천사에게 말했다.
“우리 같이 셋을 세볼까.”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천사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눈물 젖은 눈으로 간절하게 아이를 바라보며 천사는 애원했다. 싫어요.
하지만 아이는, 상냥한 아이는 천사의 손을 단단하게 잡은 채 아릴 정도로 다정하게 속삭였다.
“하나.”
어린 아이를 바라보듯 따스한 시선으로 천사를 바라보며 아이는 웃고 있었다. 고집스런 어린 아이처럼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천사를 바라보며 참 어쩔 수 없는 아이라는 듯. 그럼에도, 그래서 사랑스러운 아이라는 듯. 아이는 웃고 있었다.
“둘.”
따스하게 다가오는 아이의 시선을 마주하며 천사는 웃을 수가 없었다. 제 손을 붙잡고, 커다란 손대신 상냥한 목소리로 제 머리를 쓰다듬어는 아이를, 마지막 순간까지도 한결 같이 저를 사랑스레 바라봐주는 아이를. 저의 단 하나뿐인 스승을. 차마 떠나보낼 수가 없어서. 차마 제 손으로 지워버릴 수가 없어서.
허나 그럼에도,
“셋.”
“셋..”
사랑하는 제자를 마지막까지 올바른 길로 이끌려는 서글프도록 바른 스승에게는 당해낼 수가 없어서.
아아, 그는 마지막까지도 나의 스승이었나니.
끓어 넘치듯 터져 나오는 울음과 함께 흘려내고만 숫자에 빙그레 웃는 아이를, 깊은 잠에 빠지듯 눈을 감는 스승을 바라보며. 아이 앞에 무릎 꿇은 천사는 그 후에도 한참을 더, 구름을 적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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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푸른 하늘 한 가운데에 커다란 태양이 하얀 빛을 뿌리는 한낮이었다. 제 등짝만한 커다란 란도셀에 오늘 수업시간에 사용한 리코더를 삐죽하게 꽂아 넣고는 총총. 가을 갈대밭을 닮은 짧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아이가 따스한 햇살을 머금고 미지근해진 콘크리트 바닥을 가볍게 밟으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살랑이는 머리카락 아래 눈은 아이답지 않게 덤덤했으나 동시에 아이다운 활기와 호기심을 가득 품고 있었다. 옅은 색의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새까만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호기심과, 신기함과, 일종의 모험심과도 닮은 약간의 설레임. 아이의 눈에는 그것이 있었다. 아이의 눈에 비치는 일상 속에 참 우연히도 파고 들어와 시선을 빼앗아간 비 일상에,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발을 내딛고 있었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손을, 아이는 조막만한 다리를 바삐도 움직이며 쫒고 있었다.
하얀 손이었다. 저 파란 하늘 위의 구름을 닮기도,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을 닮기도, 창백하게 얼어붙은 겨울날의 입김을 닮기도 한 손. 하얗게, 뿌옇게, 차게 물들은 손이 아이를 부르고 있었다. 이리오렴. 상냥하게 손짓하고 있었다.
그 손을 따라, 그 손짓을 따라 아이는 발걸음을 옮겼다. 겁도 없이 그랬다. 하교 길에 불쑥 눈앞에 나타난 하얀 손이 자신을 부르는 것을, 호기심 많은 아이는 의심도 없이 쫄래쫄래 쫒아오고 말았다. 아니, 아니. 설령 아이에게 호기심이 없었더라도, 아이는 손을 쫒아 걸음을 옮겼을 것이었다. 누군가 왜? 라고 이유를 물으면 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답하겠지. 그냥. 이라고. 그냥. 날 부르고 있으니까. 라고.
아이는 확신하고 있었다. 저 하얀 손은 분명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옆집 누나도 아니고 반 친구도 아닌, 오직 자신만을 부르고 있었다. 그 증거로 하얀 손을 볼 수 있는 건 아이뿐이었다. 어느 순간 불쑥 허공에서 나타나 지금도, 저렇게. 딱딱한 콘크리트 벽면에 찰싹 달라붙은 듯, 벽을 뚫고 튀어나온 듯, 하얀 팔뚝부터 벽에 박혀 길쭉한 손가락으로 그저 이리 오라며 손짓하고 있는 손은 분명 괴기스러운 장면임에 틀림이 없었다. 일상 속에 푹 잠긴 평범한 사람들이 보았으면 비명을 질러댔을 만큼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건물 벽면에 박혀있는 팔뚝을 스쳐지나가는 사람 누구 하나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시선을 돌리지 조차 않았다. 팔뚝을 보고 눈을 비비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알았다. 그래서 흥분이 되었던 거다, 아이는. 원래 성격대로였다면 분명 경계하며 눈살부터 찌푸렸을 것을. 홀린 듯이 아이는 손짓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이리로 오렴.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짧은 반바지 아래 조막만한 다리를 바삐 놀렸다.
주택가를 벗어나, 사람들이 잔뜩 오가는 시가지를 가로질러, 커다란 건물들을 몇몇 지나쳐, 아이는 한 건물 앞에 다다르고 나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낡은 콘크리트 건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서 하얀 손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쪽이야. 이쪽으로 와. 아이를 부르고 있었다. 아이는 망설임 없이 계단에 발을 올렸다. 하나, 하나. 깡총깡총 계단을 올라가 커다란 문 앞에 섰다. 어쩐지 심장이 쿵쾅거리는 이상한 감각에 아이는 제 자그만 손을 가슴 위에 얹고 잠시 숨을 골랐다. 오래달리기를 한 것처럼 숨이 가쁘고 벅찬 느낌이 아니었다. 그저 두근, 두근. 마치 아주 그리운 장소에 온 것만 같은 이상한 두근거림이 아이의 가슴 아래를 간질이고 있었다. 잠시 그 자리에서 숨을 고르다가, 천천히. 아이는 손을 뻗었다. 발뒤꿈치를 들고 아이에겐 조금 높은 문고리를 잡아 빙그르 돌리자 문이 열렸다. 끼익. 낡은 소리가 귓가를 파고드는 것과 동시에 문 너머에서 쏟아져 나오는 하얀 빛이 아이를 덮쳐왔다.
온통 하얀색이었다. 온 세상이 흰빛이었다. 그렇게 보였다. 낡은 철문 앞에 멀뚱히 선 아이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 하얀 세상 가운데에는 온통 검은 사람이 하나. 새까만 정장을 멀끔하게 차려입고, 새까만 머리 아래에 새까만 눈을 잔잔하게 가라앉히고 있는 남자가 하나.
갑작스럽게 문을 열고 찾아온 어린 방문자를 보며 남자의 입가가 옅게 휘었다. 단단하게 굳은 듯 보였던 눈매가 부드럽게 풀어지며 잔잔한 웃음을 그려내는 것이 아이의 눈에 선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남자가 손을 뻗었다. 검은 정장소매 아래에 하얀 손이. 저 파란 하늘 위의 구름을 닮기도,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을 닮기도, 창백하게 얼어붙은 겨울날의 입김을 닮기도 한 커다란 손이 아이에게 향했다. 남자의 입이 열렸다.
"어서 와요."
처음 만나는 그리운 남자에게 들은, 참으로 이상한 첫마디였다.
2.
“아라타카.”
어설프게 블라인드가 쳐진 창문 너머에서 비춰오는 햇살을 등지고, 이름을 불러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소파에 앉아 숙제를 하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카게야마 시게오라고 소개를 해 놓고서는 ‘모브’ 라고 부르라던 남자는 언제나 아이를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불렀다. 레이겐 아라타카에요. 성이 좀 특이하죠? 그래서 다들 그냥 성으로 불러요. 독특해서 기억하기 쉽다고. 태연하게 늘어놓던 아이의 말이 무색하게도 처음만난 그 순간부터, 남자가 아이를 부르는 호칭은 ‘아라타카’ 였다. 사랑스러움과 따스함이 범벅이 된 눈으로 아이, 레이겐을 바라보며 남자는, 모브는 늘 어딘가 그리운 표정으로 레이겐을 그렇게 불렀다.
처음에는 가족 외의 사람에게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어색해서 쭈뼛거리던 것이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졌나보다. 레이겐은 불리운 제 이름에 아무런 낯설음도 없이 펜을 쥔 손은 그대로 익숙하게 고개를 돌려 모브와 시선을 맞추었다.
레이겐은 모브를 ‘모브’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한참이나 어른인 상대를 덜컥 그리 불러버리는 것은 좀 아니지 않냐는 참으로 간단한 이유를 대며. 짐짓 예의바른 기특한 어린아이인 양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레이겐이 ‘모브’를 대신해서 찾아낸 호칭은 ‘스승님’ 이었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냥 문득. 정말로 그냥 문득 떠올라서. 스승님, 모브 스승님. 그렇게 부르며 쑥스러이 웃는 레이겐에게 모브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괜히 가만 두지 못하고 꼼지락거리고 있던 레이겐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치며, 모브는 그리움과 서글픔이 번지는 눈을 부드럽게 접으며 웃었었지.
하얀 햇살을 등 뒤로 펼친 채, 모브는 레이겐을 손짓으로 가까이 불렀다. 그런 모브의 부름에 레이겐은 별 다른 거부감도 경계심도 없이 모브가 앉아 있는 책상 의자 가까이로 다가갔다. 모브는 제 바로 앞까지 다가온 레이겐에게 손을 뻗어 상냥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동시에 다른 한 손을 들어 허공에 대고 가볍게 손짓하자 문 근처에 걸어 두었던 정장 재킷에서 지갑이 불쑥 튀어나와, 허공을 가르고 모브의 손에 가볍게 안착했다. 모브는 그 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레이겐의 자그마한 손에 꼭 쥐어주었다. 눈치 빠른 아이가 눈을 반짝이는 것에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타코야키 좀 사와 주겠니?”
“치즈 추가해도 되죠?”
“그럼.”
아싸, 하고 만세를 부르는 레이겐을 보며 모브는 쿡쿡 웃었다. 평소에는 곧잘 귀찮아하곤 하는 심부름이지만 저가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사오는 것에 만큼은 언제나 눈을 반짝이는 아이가 퍽 귀여워 모브의 입가에는 절로 웃음이 흐르고 있었다. 신이나 뛰어가는 레이겐이 넘어질까 걱정 어린 목소리로 주의를 주면서도 모브의 입가에는 잔잔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다녀오겠습니다! 활기차게 외치며 레이겐이 문을 닫고 나가는 순간까지 그랬다.
딱, 그 순간까지만.
닫히는 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탁. 문이 완전히 닫히며 바깥과 완전히 분리됨과 동시에 모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던 입술이 딱딱한 일자를 그렸다. 다정함과 따스함이 넘실거리던 눈동자가 차게 가라앉으며 고요한 시선으로, 모브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했다. 모브의 입이 열렸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서늘하게 흘러나오며 한 이름을 불렀다.
“에쿠보.”
그 순간이었다. 어설프게 쳐져 창문 너머의 하얀 햇살을 들이고 있던 블라인드가 착.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촘촘하게 닫히며 불을 키지 않은 사무소에 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름이 형체를 갖듯이 모브가 응시하고 있던 허공이 뒤틀리며 나타난 것은 한 사람의 형상이었다.
짧은 검은 머리에, 하늘거리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였다. 콘크리트 숲이 거리를 뒤덮고 기계들이 흘러 다니며 사람들은 몸에 딱 붙는 옷을 입는 시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남자. 마치 저 옛날을 고스란히 담아낸 듯 한 옷을, 마치 흘러가버린 옛날의 죽음을 고스란히 간직한 듯 한 옷을 입은 남자였다. 길쭉한 몸 위에 온통 검은 옷을 두르고, 멀끔한 얼굴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빠알간 홍조를 띄우고 있는. 어디서 어떻게 봐도 수상쩍기 그지없는 남자는, 에쿠보라 불린 남자는 허공에 그대로 발을 디딘 채 모브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여어, 시게오. 오랜만이구만. 어디보자, 대략 십 년 만..”
“여긴 왜 왔어?”
손가락으로 턱을 문질거리며 태연하게 중얼거리는 에쿠보의 말을 모브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잘라내었다. 레이겐에게 향하던 것과 같은 목구멍을 통해 흘러나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게 가라앉아 있는 목소리였다. 사랑스러움과 다정함을 한껏 담아내고 있던 눈동자 역시 차게 얼어붙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 모브의 표정을 보며 에쿠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깨를 으쓱이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경계하지 마.”
“에쿠보.”
“이번에는 일하러 온 게 아니니까.”
태연자약하게 흘러나오는 말에 옅은 분노를 담고 움찔거리던 모브의 손이 이어지는 에쿠보의 말에 우뚝 멈췄다. 모브의 눈이 가늘어졌다. 의심과 불신으로 범벅된 그 시선도 에쿠보는 태연했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 바람이 불 리가 없건만 펄럭이는 검은 옷자락이 순간 에쿠보의 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잠시 후, 옷자락이 걷히며 사라진 자리에 둥둥 떠 있는 것은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아닌 풍선과도 닮은 초록색 영체였다. 이거 봐. 초록색 몸통에 얄미운 표정을 띄우고, 빠알간 홍조를 씰룩이며 말했다.
“이 몸은 그저 친우의 연애사나 구경할 겸 놀러왔을 뿐이야.”
그러니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을 필요도 없지. 모브의 손가락만한 두 팔을 양쪽으로 쭉 펼치며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에 모브의 눈이 가늘어졌다. 모브의 입술이 열렸다. 다시 다물렸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는지 목이 움찔거렸지만 그 뿐. 모브는 저를 향해 씨익 웃어 보이고 있는 에쿠보를 향해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모브를 보며, 에쿠보는 지어올린 미소를 더욱 짙게 했다. 입을 열어, 모브 대신 말했다.
“혹시 알아? 이 몸이 도움이 될 지.”
마치 죽은 자를 꾀어내는 저승사자의 것처럼, 달콤한, 아주 달콤한 목소리로.
3.
파란 하늘에 두둥실. 바람에 날리지 않는 초록색 풍선이 레이겐의 주변을 빙빙 돌고 있었다. 오늘 학교에서 음악시간이 있었는지 길쭉한 리코더가 삐죽 튀어나온 검은 란도셀을 등에 메고, 레이겐은 총총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흙으로 된 길쭉한 길 아래로 맑은 강물이 흐르고 있는 길이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가을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듯 살랑이는 머리카락 아래로, 담담한 눈을 한 레이겐의 시선이 제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초록색 풍선에게 향했다. 아이의 입이 열렸다.
“정신 사나워, 에쿠보.”
삐죽하게 입술을 내밀며, 불퉁하게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런 아이의 말에 우뚝. 허공에서 멈춰 선 풍선이 빙그르 몸을 돌려 아이를 바라보았다. 본래 풍선에는 달려있을 리가 없는 눈, 코, 입. 그려 넣은 게 아니라 본래 있었던 듯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는 얼굴이 아이를 향했다. 아이의 작은 손보다도 더 작은 손이 팔짱을 끼며 히죽. 녹색 풍선은, 에쿠보는 웃어보였다.
“아니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 몸은 이해가 안가서 말이야.”
“뭐가.”
일단 예의상 물어는 봤지만 이미 답은 알고 있는지, 아이의 고개가 휑, 하고 돌아갔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에쿠보는 히죽히죽 웃으며,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부쩍 작아진 까만 란도셀이 흔들리는 아이의 등을 여유롭게 쫒았다.
“어이어이, 같이 가자고. 레이겐.”
불리운 이름에 레이겐의 발이 우뚝 멈췄다. 그 틈을 노렸다는 듯 잽싸게 레이겐 앞으로 날아간 에쿠보가 레이겐의 얼굴을 마주보는 위치에서 우뚝 멈췄다. 빙그레. 에쿠보는 웃고 있었다. 심통이 난 건지, 쑥스러운 건지. 어쩐지 평소보다 조금 붉어 보이는 레이겐의 귀를 보며 에쿠보는 유쾌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꾹 눌러 참아 작게 키득키득 웃었다. 어느 쪽이나 아이의 눈에는 아니꼬워 보였지만, 에쿠보로서는 차마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게,
“설마 레이겐 네가 그 재미라고는 쥐뿔도 없는 시게오를 좋아할 줄이야!”
오오 놀라워라. 짤막한 두 팔을 펼치며 그 말을 고스란히 몸짓으로 표현해 내는 에쿠보는 일견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튀어나온 이름에 금세 덤덤하던 얼굴이 새빨개지는 레이겐을 보며 더욱 그랬다. 두 팔을 쭉 뻗은 채, 레이겐의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며 에쿠보는 키득키득 웃었다.
레이겐의 손이 가방끈을 꽈악 쥐었다. 시뻘게진 얼굴로, 레이겐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푹 숙였다. 평소라면 깔깔거리며 웃는 에쿠보를 향해 리코더라도 휘둘렀을 것을. 답지 않게 모기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레이겐은 웅얼거렸다.
“그게 뭐. 스승님은 늘 상냥하시고..”
“뭐, 확실히 시게오는 너한테만은 상냥하지.”
“차는 못 타지만 타코야키도 식혀주시고..”
“네가 뜨거운 걸 좀 못 먹어야 말이다.”
“손님 대접은 꽝이지만 초능력도 대단하고..”
“음..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구만.”
“무엇보다 날 되게 아껴주시는 걸.. 그런 사람을 좋아하는 게 뭐가 나빠.”
평소의 활기는 어디다 두고 왔는지. 자그맣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얼핏 울음기마저 섞여있는 것에 에쿠보는 결국 놀리던 것을 그만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레이겐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았다. 슬슬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 사춘기를 겪을 나이의 아이가 품은 연심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을지 모를 만큼 무신경하지도, 어리지도 않았으니까. 풋풋한 연심을 품고 바라보는 상대가 곧잘 제 머리를 쓰다듬거나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것에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한다고 서운해 하는 것도 알만한 일이었다. 아직은 어린 레이겐이 모브의 시선을 그저 가벼운 애정으로만 생각하는 것도, 그래. 모를 일이 아니지.
하지만 에쿠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그마한 손을 뻗어 레이겐의 뺨을 쓰다듬으며, 에쿠보는 빙그레 웃었다. 씁쓸함을 조금, 안타까움을 조금 담아. 비웃는 것도 놀리는 것도 아닌 그저 작은 웃음을 띠우며, 에쿠보는 입을 열어 아이를 달래었다.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지.”
손바닥 가득 전해져 오는 말랑한 살결과 따스한 온기에 혀끝이 까끌해지는 것을 무시한 채 말했다.
“하지만 레이겐, 이 몸은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하는 아이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에쿠보는 진심으로 속삭였다.
정말로,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4.
어설프게 쳐진 블라인드 틈새로 하얀 햇살이 스며들어오고 있는 어느 오후였다. 가쿠란을 입은 검은 머리의 소년은 사무실 한 가운데 소파에 드러누워 쿨쿨 자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었다. 가을 갈대밭을 고스란히 담아낸 듯, 옅은 색의 짧은 머리를 짙은 색 소파에 흩뿌린 채 곤히 잠들어 있는 남자였다. 새근새근. 낮잠치고는 깊게 잠이든 것인지 흔들리는 어깨에도 개의치 않고 고운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모양새가 꼭 어린아이 같아서. 남자를 바라보는 소년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걸렸다.
‘스승님.’
소년이 다시 한 번 남자의 어깨를 살며시 흔들었다.
‘으응..’
좁은 소파에 구겨진 몸을 뒤척이며 그제야 조금 반응을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소년의 입가에 미소가 한 층 짙어졌다. 그만 일어나세요. 깨어나기 싫은지 한껏 구긴 미간에 입을 맞추며 사랑스레 속삭이자 그제야 스르르, 굳게 감겨 있던 남자의 눈이 뜨였다.
‘모브..?’
‘네.’
부스스, 몽롱함에 푹 젖어 저를 향하는 시선에 소년은 순순히 대답했다. 네. 모브에요. 여기 있어요. 스며들어온 햇살을 등지고 소년은 옅게 웃었다. 남자를 향해 숙인 등 뒤로 햇살이 하얀 날개처럼 펼쳐지는 것을 외면하고, 검은 머리의 소년은 오로지 남자만을 바라보며 웃었다. 당신의 모브에요.
남자가 눈을 끔뻑였다. 끔뻑. 끔뻑. 천천히 뻗어진 손이 소년의 팔을 잡았다. 급작스레 당겨지는 힘에 어? 할 틈도 없었다. 팔이 당겨져, 굽어있던 몸이 기우뚱. 푹신하게 어깨를 감싸는 소파의 감촉과 따스하게 몸을 뒤덮는 온기에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시선을 위로 향했다. 여전히 졸린 표정을 한 남자가 그새 도로 눈을 감아버린 것이 보였다. 스승님. 난감함을 담아 불러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참으로 느긋했다. 느긋하고, 평화롭고, 따스했더랬다.
‘응, 5분만.’
“스승님! 모브스승님!!”
제 어깨를 거칠게 흔드는 손길에 모브는 스르르, 눈을 떴다. 어설프게 쳐진 블라인드 틈새로 하얀 햇살이 스며들어오는 오후였다. 칠흑같이 짙은 색의 머리카락을, 그보다는 옅은 색의 소파에 흩뿌리며 드물게 낮잠에 빠져 있던 모브는 저를 흔드는 작은 손길에 눈을 떴다. 어쩐지 흐릿하게 번지는 시야에 눈을 끔뻑이며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한 아이가 보였다. 가을 갈대밭을 고스란히 담아낸 듯, 옅은 머리칼의 아이가 몸을 숙인 채 저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끔뻑. 끔뻑. 눈을 끔뻑이다가, 모브는 손을 뻗었다.
“우왓..!”
품 안에 가득 들어오는 온기에 모브의 입가가 부드러이 호선을 그렸다. 아, 정말! 턱 아래쪽에서 불퉁하게 터져 나오는 귀여운 목소리는 슬며시 외면한 채, 도로 눈을 감았다. 두 팔 가득 온기를 그러안고 짙은 색의 소파에 흩어지는 옅은 색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느긋하고, 평화롭고, 따스하게 속삭였다.
“응, 5분만.”
5.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고 말았나니.
굳게 쳐진 블라인드 틈을 비집고 들어와 사무실을 희미하게 밝히는 하얀 빛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에쿠보는 잠은 아이를 보며 고해하듯 머리를 숙였다.
짙은 색 소파에 흐트러지는 옅은 색 머리카락이 사랑스러운 아이었다. 레이겐. 혀끝에 씁쓸하게 맺히는 이름을 입안에서 굴리다가 그대로 삼켜버린 채. 에쿠보는 그저 가만히 곤히 잠든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눈, 코, 입. 가느다란 목과 오독하게 돋은 쇄골. 자그마한 팔도, 선이 어여쁜 다리도. 무엇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어,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아이. 이제는 소년이라 불러야 할까. 레이겐이 몸을 뒤척일 적마다 구겨지는 가쿠란 자락을 바라보며 에쿠보는 쓰게 웃었다.
처음 만날 적에는 회색 정장이었지.
아니, 아니다. 에쿠보가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는 하얀 반창고를 붙인 무릎 위로 짧은 반바지를 입고, 등짝에 큼직한 란도셀을 메고 있었다. 그게 아이와의 처음이었다. 레이겐 아라타카와의 처음은 분명 그것이었다. 그것이 에쿠보에게, 무어 그리 중요하겠냐마는.
인도해 갈 사람들을 홀리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한 아이의 자그마한 뺨을 감싸고자 뒤집어 쓴 사람가죽 한 가득 어울리지도 않는 정을 담아. 에쿠보는 잠든 레이겐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다가, 쓸어주다가, 천천히. 닿아오는 숨결이 입술을 간질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조금, 아주 조금만 더 고개를 숙이면, 입술을 내리면 곧장 사내아이치고는 부드러운 입술을 훔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가까운 거리. 하지만 결코 맞물려서는 안 되는, 최소한의 안전거리. 따스하게 닿아오는 숨결이 입술에 시리게 다가오는 것을 선명하게 느끼며 에쿠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안 하는 거야?”
분명 둘 뿐이었던 사무소 안에 서늘한 목소리가 고요하게 울렸다. 에쿠보는 레이겐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마저 떼어내고 굽히고 있던 무릎을 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즉 손가락 하나하나에 묻어나오는 온기가 차디찬 공기에 흩어지지 않기를 바라듯 주먹을 그러쥐며, 고개를 돌렸다. 굳게 쳐진 블라인드 틈새를 비집고 하얀 햇살이 아릿하게 들어오는 창문에 시선을 두었다. 색색 곤한 숨을 뱉으며 잠든 레이겐의 얼굴도, 어스름한 그림자 속에서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댄 채 저를 보고 있는 모브의 얼굴도, 그 무엇 하나 차마 바라볼 수가 없어서. 에쿠보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 고해하였다.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고 말았나니.
“미안하다.”
용서하지 마옵소서.
6.
“에쿠보를 원망하지 않아.”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을 감으며 모브는 말했다.
“에쿠보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 걸.”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아프게 가라앉는 눈을 눈꺼풀 아래로 감추며 모브는 말했었다.
“나도, ‘해야 할 일’을 해 버렸으니까.”
7.
있지, 에쿠보.
이제는 어느 정도 자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에쿠보는 고개를 숙여 레이겐에게 시선을 옮겼다. 응. 느긋하게 대답하자 레이겐은 도로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를 못하고,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가. 꼼지락거리던 손가락을 꼭 쥐는 모습에 에쿠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제 턱 아래의 갈대색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레이겐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쑥스럽다고 싫다는 것을 무시한 채 놀리듯이 무릎에 앉혀 놓았더니 한참을 바르작거리다가 이제야 얌전해진 레이겐은, 보아하니 얌전해 진 것이 아니라 이제야 순순히 고민을 털어놓을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답지도 않게 줄곧 풀이 죽어 있더니만. 어린 나이에 무어가 그리 힘이 들어서 땅이 꺼져라 한 숨을 푹푹 쉬어댔는지. 대충 원인을 알 것 같기도 한 것에 되려 한숨을 내쉬고 싶어지는 것을 참으며 에쿠보는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푹 숙여 잘 보이지 않는 레이겐의 얼굴에서 입술이 자그맣게 열리고 있었다.
“스승님은, 정말로 날 좋아하는 걸까?”
내 이럴 줄 알았지.
참으로 예상과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레이겐의 고민에 에쿠보는 목구멍을 비집고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려는 한숨을 꿀꺽, 삼켜 넘기며 대신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좁은 목구멍을 갈기갈기 찢으며 넘어가는 날카로운 덩어리에 입 안 가득 비릿한 맛이 퍼지는 듯 한 감각은 외면했다. 잘 굴러가지 않는 혀를 애써 굴리며 에쿠보는 풀 죽은 소년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당연하지. 그 녀석이 얼마나 널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비릿한 입 안에서 흘러나온 말은 무슨 색이었는지.
빙그레 웃으며 느긋하게 흘려내는 에쿠보의 말에 갈대색 머리통이 작게 흔들렸다. 좌우로 흔들리며 살랑거리는 머리카락 아래로 물기를 머금은 눈이 언뜻언뜻 보이고 있었다. 그에 에쿠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무언가 말을 하기도 전에, 레이겐의 입이 다시 열렸다.
“거짓말.”
울먹임을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슬프게도 눈치가 빠른 소년은 그리 말했다.
“스승님이 좋아하는 ‘나’는, ‘내’가 아니잖아.”
분한 건지. 슬픈 건지. 애꿎은 제 입술을 꾹 물며 어깨를 떠는 한 없이 작은 아이를 바라보며 에쿠보는 쓸쓸히 웃고 말았다.
참 영특한 아이었다. 슬플 정도로 눈치가 빠르고, 아플 정도로 똑똑한 아이. 알고 있었다. 레이겐이, 자신을 향한 모브의 시선이 진정으로 향하는 곳을 꿰뚫어 버리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쯤은. 그저 쏟아지는 애정에 기뻐 웃는 어린 시절이나, 제 감정과 다른 상대의 감정에 고민하며 서글퍼하는 조금은 성장한 어린 시절이나, 그 때에는 아니더라도 언젠가 분명 유난히 사람을 잘 보는 레이겐이 알아버리는 날이 올 것이라고. 에쿠보는 진즉에 알고 있었다.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랐었다. 아파할 아이를 위하여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는 에쿠보는 바랐었다. 아이가 아프지 않기를. 상처받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었는데.
모브는 레이겐을 사랑한다.
그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모브 자신은 물론 에쿠보도, 레이겐도 부정할 수 없을 사실이었다. 허나 사랑받음에도 아파야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자신을 향한 모브의 시선이 언제나 자신의 안 쪽, 쿵쿵 뛰는 심장이 아닌 다른 어딘가를 향하는 느낌이 든다며 눈물짓는 레이겐을 그저 바라보며 에쿠보는 웃었다. 가늘게 떨리는 머리카락에 다정히 입 맞추며 울듯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 밖에, 에쿠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8.
그는 마지막까지도 나의 스승이었나니.
‘모브’
상냥하고 따스하게 저를 부르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모브는 두 팔을 뻗어 아이를 안았다.
가을 갈대밭을 닮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였다. 담담하게 깜빡이는 두 눈동자에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사람의 그림자를 고스란히 품은 아이.
저를 끌어안는 모브의 손에 경계심도 거부감도 하나 없이 마주 팔을 뻗어오는 아이를 두 팔 가득 끌어안으며, 모브는 상냥하게 웃음 지었다. 소중하게, 사랑스럽게. 제 두 팔 안에 가두어 온 몸으로 끌어안으며. 블라인드 틈새로 스며들어오는 하얀 햇살이 날개가 되어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검은 정장 위로 돋은 하얗고 커다란 날개가 둥글게 휘어져 품에 안은 아이와 함께 둘 만의 감옥을 만들어 버린 듯, 하얗게 비치는 햇살이 날개가 되어 두 사람을 가두고 있었다. 그 하얀 세상 속에서 모브는 웃었다. 다시 제게로 온 사랑스러운 스승을 끌어안으며 행복하게 웃음 지었다.
그러면 다시 태어나서도 나의 스승이어야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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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대체 무슨 꼴이지?
사정이 생겨 평소보다 귀가가 조금 늦어져 버린 것이 이런 결과를 불러올 줄 알았을까. 아니, 집에 오는 것이 늦어진 것까지는 괜찮았지. 문제는 기회는 이때다, 라는 듯 거실에서 대놓고 잘 하지도 못하는 술판을 벌이고 있는 레이겐을 보고서도, 들어먹지도 않을 말 한 마디만을 던진 채 욕실로 들어가 버린 것에 있었다. 리츠는 제 눈앞에서 귀엽지도 않은 몸뚱이를 한껏 웅크린 채 훌쩍이고 있는 삼십 줄의 아저씨를 차갑게 바라보며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씹어 삼켰다.
물기를 제대로 닦지 못해 축축한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맨 등을 적시는 감촉은 생각보다 성가셨다. 머리를 말리기는커녕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허겁지겁 나왔더랬다.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온몸을 적시는 따듯한 물줄기, 그 커다란 소리 사이로도 선명히 파고들어와 버리는 울음소리에. 씻고 있던 리츠는 화들짝 놀라 젖은 몸뚱이만 대충 닦아내고는 그저 집히는 대로 바지만 걸친 채 뛰어나와 레이겐을 찾았다. 쓰잘데기 없는 감정이 풍부한 듯 의외로 우는 일도, 진심으로 웃는 일도 적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소리를 내며 우는 것을, 리츠는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침대 밖에서는. 그래서 놀랐고, 그래서 당황했고, 그래서 걱정이 되어서.
거실 한가운데서 풀죽은 어린아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는 레이겐을 봤을 때에는 심장이 발끝으로 떨어지는 줄 알았지. 웅크린 레이겐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잔뜩 움츠러들은 채 가늘게 떨리고 있는 어깨에 손을 얹었을 때, 천천히 들어 올려진 얼굴이 서러운 눈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마저 느꼈다. 심장이 조이고 속이 뒤집힐 정도로 착잡한 기분이었다. 딱, 리츠를 발견하고, 억울한 어린아이처럼 눈썹 양 끝을 한껏 내린 채 울먹이던 레이겐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발목이 시려..”
촉촉이 젖은 목소리로 내뱉어진 말에 리츠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더랬다. 3초정도 굳었고, 그 후에는 거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맥주 캔을 발견했으며, 2초정도 레이겐을 응시하다가, 자세히 보니 레이겐은 풀죽어 웅크리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제 발목을 쥐고 있을 뿐이란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떨궈버렸다. 하아. 한숨으로 땅이 꺼질 수 있다고 한다면 이번 걸로 10m는 꺼지지 않았을까. 숙인 고개 아래, 제 뺨을 타고 여즉 흘러내리고 있는 물방울이 바닥을 적시는 것을 보며 리츠는 방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착잡해지고 말았다. 어이가 없어도 너무 어이가 없으니 화조차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리츠의 고개 위에서는 여전히 발목이 시려 서럽다며 훌쩍이고 있는 주정뱅이가 하나.
“그러게 작작 처마시라고 했는데..”
다시금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씹어 삼키고, 그 찌꺼기를 입 밖으로 뱉어내며 리츠는 손을 뻗었다. 있지도 않은 제 손의 온기라도 옮기고 싶었는지 레이겐이 소중하게 꼭 쥐고 있던 발목을 그 손에서 빼내어, 제 손 안에 가두고 보자 확실히 서늘하기는 했다. 발목뿐만이 아니라 발등, 그 아래까지도 전부. 따끈따끈한 온수에 몸을 적시고 있던 것이 바로 방금 전이라서 손끝까지 온기가 남아있는 손으로 얼음장 같은 양 발을 가두듯 감싸자 냉기가 고스란히 번져오는 게 느껴졌다. 그 시린 감촉에 눈살을 찌푸리며, 리츠는 레이겐의 발을 부드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엄지손가락으로 발목부근을 지그시 누르며 쓸어내리고, 손바닥 가득 발등을 감싸 발바닥을 조금 강하게 눌러주며, 부드럽게, 또 다정하게. 한참을 그렇게 주물 거리자 차게 식어있던 발에 그제야 조금씩 리츠의 온기가 옮겨가는 것이 느껴졌다. 리츠의 손이 레이겐의 발만큼 식어버린 건지, 레이겐의 발이 리츠의 손만큼 따뜻해진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비슷한 온도. 나른하게 미적지근한 온도가 이어진 두 사람의 손과 발안에 한 가득이었다.
리츠의 머리 위에서 레이겐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때 즈음이었다.
“코타츠 사고 싶어.”
누가 주정뱅이 아니랄까봐. 내내 훌쩍이다가, 얌전하게 리츠의 온기를 나눠받다가. 리츠의 손 안에 있는 제 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레이겐은 뜬금없는 말을 뱉어냈다. 리츠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사던가요.”
다정하기 짝이 없는 손길과는 달리 성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목소리였다. 물론 두 사람 중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돈 없는 걸.”
취한 와중에도 제 대답은 알아들었는지 불퉁하게 들려오는 레이겐의 말에 리츠는 그제야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삼십 줄이 넘은 아저씨가 어린아이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어봤자 귀엽지도 않건만. 누가 주정뱅이 아니랄까봐 고집스럽게 삐죽 내밀어진 입술을 가만히 보다가, 리츠는 한숨을 내뱉는 대신 제 고개를 가져가 그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쪽. 그저 살포시 대었다가 가볍게 떼어내며, 리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살 테니까 댁은 들어가서 귤이나 까요.”
코끝에 닿아오는 술 냄새에 눈가를 가늘게 좁히면서도 결국 피식 웃어버리고 만 리츠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렇게, 주정뱅이의 입술을 달콤하게 적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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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나 갈까.
어느 날 갑자기, 정말로 갑자기 레이겐은 그렇게 말했다. 무엇을 위해서, 라는 말도 없이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바다가 보고 싶어서, 싱싱한 해산물이 먹고 싶어서, 일몰이나 일출이 보고 싶어서. 그런 자잘한 말은 하나도 없이 불쑥. 핸드폰 화면에 불쑥 튀어나온 그 짧은 문장을 리츠는 한참을 들여다봤었다. 보고, 또 보고. 깊은 숨을 한 번 내쉰 뒤에, 액정을 두드렸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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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몰고 가장 가까운 바닷가를 찾은 두 사람은 우선 값싼 주차장을 찾아 주차를 했다. 차에서 내려 두 발로 아스팔트 바닥을 디디자 곧장 옅은 소금기와 비린내가 섞인 바닷가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간질여왔다. 그것을 만끽하며 기지개를 켜기도 잠시, 레이겐이 리츠의 손을 잡아끌었다. 배고프니 밥부터 먹자. 참 태평한 소리였다. 그에 한 마디 해줄 수도 있었지만, 리츠는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차장과 적당히 가까운 가게에서 식사를 하고, 조금 걸어 항구까지 가 수상버스에 올랐다. 안쪽에 자리는 많았지만 레이겐의 고집으로 물 위에 갈매기가 둥둥 떠다니는 것이 코앞에서 보이는 바깥 자리에 앉았다. 욕조의 오리인형처럼 둥둥 떠다니다가 배가 출발한다는 경적소리에 날개를 펼치며 우수수 날아가는 갈매기 떼는 과연 장관이었다. 리츠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옆에서 레이겐이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 봐, 여기 앉기를 잘했지? 리츠는 부정하지 않았다.
항구를 뒤로하고 바닷길을 달리는 수상버스의 승차감은 나쁘지 않았다. 날씨가 좋아 파도가 없는 덕인지 무난하게 달리는 배 위에 앉아 멀어지는 항구나 가까워지는 섬이나, 날아다니는 갈매기 따위를 보는 것은 퍽 운치 있는 일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정신없이 소리를 높여가고 있는 학생들, 저것은 무엇이란다, 이것은 무엇이란다, 아이에게 하나하나 가르쳐주며 도란도란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가족들. 다른 때라면 정신 사나운 소음으로 들렸을 것들이 바닷바람 소리에 스며들어 그리 나쁘지 않게 들린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물결치는 파도를 바라보다 저 멀리 보이는 멋들어진 산을 바라보다, 힐끗. 눈동자만을 굴려 제 옆에 앉아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레이겐을 보았다. 헤픈 듯 의외로 잘 웃지 않는 얼굴이 언제나와 같이 담담한 표정을 그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시선을 느꼈는지 천천히 고개가 돌아가 리츠를 향했다. 왜? 묻는 말에 리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다시 바다에 두었다. 그런 리츠의 행동에 레이겐은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주 잠시 동안 가만히 리츠를 바라보다가, 도로 시선을 돌려 바다를 보았을 뿐. 자신에게서 멀어져 바다를 향하는 시선을 느끼면서도, 리츠는 그저 묵묵히 바다를 보았다.
도착을 알리는 방송을 듣고 우르르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맨 뒤에 서서 리츠는 천천히 걸어 나갔다. 도착지는 작은 섬이라고 했던가. 자전거를 빌리면 한 두 시간 만에 충분히 섬 전체를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섬이라고, 바다를 낀 산책로가 있으니 연인과 더할 나위 없는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곳이라던 안내방송이 얼핏 리츠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와 동시에 뒤 따라오던 레이겐이 리츠를 스쳐 지나갔다. 척척 걸어가서 선착장과 연결된 모래사장을 밟고, 곧장 뒤 돌아 오는 것이 보였다. 가까워지는 레이겐의 얼굴에 리츠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레이겐은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 볼 거 없어. 가자. 리츠는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눈을 끔뻑이다가, 결국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항구로 다시 돌아와 수상버스에서 발을 내렸을 때에는 이미 해가 서서히 지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다음에는 뭐 할까요. 조용히 묻는 리츠의 말에 레이겐은 가만히 서서 바다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깜빡, 깜빡. 입이 열렸다. 슬슬 돌아갈까. 뿌옇게 번지는 입김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이 보였다. 입김이 새어 나오는 입술이 다시 벌어졌다. 해 지는 것만 보고. 레이겐의 고개가 천천히 리츠를 향했다. 눈이 마주쳤다. 리츠는 입을 열었다. 도로 다물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요. 나오는 대답은 답지도 않게 참 순종적이었다.
항구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해변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천천히 저물어 가던 해가 이미 출렁이는 물결 바로 위에 떠 있었다. 파도소리와 함께 바람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사이로 아이들의 쾌활한 목소리, 연인들의 달콤한 목소리, 사람들의 들뜬 목소리. 각종 소리가 넘실거리는 파도소리를 머금은 세찬 바람소리에 부서져 어렴풋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 서 있었다. 리츠와 레이겐은 일몰을 보기 위해 바다를 찾은 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많은 사람들과 조금 떨어져서, 파도에 쓸려 젖은 모래에서 한 뼘 정도 떨어진 보슬거리는 모래위에 서 있었다.
리츠.
바람이 불었다. 허나 그 세찬 바람소리에도 가려지지 않은 선명한 소리가, 언제나 리츠에게는 싫을 정도로 뚜렷해지고 마는 작은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서서히, 서서히. 해가 출렁이는 바다 속으로 잠기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던 리츠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기다란 코트자락이 시야 끝에 걸려 물결처럼 출렁이는 것조차 입을 꾹 다문 채 외면했다. 추위도 많이 타는 주제에. 단추를 제대로 잠그지도 옷깃을 제대로 여미지도 않아 늘 훤히 드러나고 마는 가느다란 목은, 지금도 싸늘한 공기에 젖어 가늘게 떨고 있을까. 코트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은 손끝에 걸리는 보드라운 천의 감촉에 씁쓸해지고 만 것도 잠시. 리츠. 한 번 더 소리를 내는 목소리에, 리츠는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반 정도 잠긴 주홍색 해를 응시하던 눈을 감아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옆에서 선명히 들려오는 잔인한 목소리는 멈춰주지 않아서.
그만 할까.
평이하게, 담담하게. 바다나 갈까. 아무렇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듯, 불쑥 튀어나왔던 평평한 문자의 나열처럼, 그렇게. 끼익. 울음을 토해내는 갈매기소리 사이로, 메마른 모래 적시며 거칠게 출렁이는 파도소리 사이로 파고 들어와, 귀를, 머리를, 가슴을 흠뻑 적셔버리는 서글플 정도로 건조한 목소리였다. 리츠는 코트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은 손가락을 굽혀 꽈악, 주먹을 쥐었다. 손가락에 걸려 있던 보드라운 천이 가지런한 손톱과 함께 손바닥에 파고드는 감촉이 생생했다.
감은 눈 아래에 너무도 선명히 그려지는 것은 한 사람과, 그 사람을 위하여 리츠가 선물했던 스카프였다. 자신을 닮은 검은 바탕에, 그 사람을 닮은 금색 실로 제법 멋들어지게 수가 놓아진 것이 마치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제법 마음에 들었던 스카프. 두터운 목도리는 무겁고 갑갑하다며 유독 가는 목을 늘 훤히 내놓고 다니는 레이겐을 생각하며 크리스마스에 리츠가 건넨 선물이었다. 리츠가 단 한 번도 레이겐의 목에 둘러진 것을 본 적이 없는, 되려 리츠가 한 번 눈에 둘렀다가, 지금은 리츠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둘러져 있는 스카프. 참 미운 스카프. 리츠는 한 번, 숨을 깊게 내 쉰 후에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잠시 감고 있었다고 어둠에 익숙해져버린 시야에, 이제는 바다 속에 거의 잠겨 둥근 끝부분만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는 태양이 원망스러운 듯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눈을 찌르고 몸을 적시는 빛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시려워서. 가슴이 저릴 정도로 시리고, 따가워서.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움켜쥔 주먹에, 주먹을 감싼 미운 스카프에 담아 넣고, 리츠는 눈을 깜빡였다. 입을 열었다.
네.
흘러나온 목소리는 다행이도 떨리지는 않았다.
그런 리츠의 대답에 돌아오는 말은 짧았다. 그래. 그 한 마디. 참 덤덤하고 참 건조한, 참 미운 한 마디였다. 레이겐은 그 짧은 한 마디를 흘렸다가, 손을 들어 리츠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어른이 아이에게 하듯 가벼운 손동작이었다. 그 아래에 넘실거리고 있을 토악질이 날 정도로 짙고 아린 감정을 모두 숨긴 채, 그저 가볍게, 그저 간단하게 끝내버리려는 비겁한 어른의 상냥한 손길. 바로 방금 전까지 연인이었던 사람의 어리석을 정도로 상냥한 손길에 리츠는 이를 악물었다. 목구멍을 비집고 튀어 나오려는 응어리를 씹어버리지 않고는 베길 수가 없었다. 씹어서, 입안에서 산산조각을 내지 않으면 그대로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고집스럽게 응시하고 있는 바닷가에 더 이상 빛나는 태양은 없었다. 전부 잠겨 들어가, 가라앉아 버렸다. 어렴풋한 주홍빛만이 간신히 남아 출렁거리는 파도 위를 간신히 물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그것만을 바라보며, 리츠는 굳어버린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른 모래를 밟는 발소리가 웅웅거리는 바람소리를 뚫고 선명하게 들려오는 와중에도 그랬다.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봐서는 안 되었다. 이걸로 끝. 정말 끝.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하는데.
리츠의 몸이 빙글 돌았다. 단추를 꼭 채운 짙푸른 색의 기다란 코트의 끝자락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리츠의 다리 언저리에서 어른거렸다. 개의치 않았다. 그저 다리를 뻗어, 마른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척, 척. 몇 걸음 채 걷지 않아 시야에 가득찬 등에 리츠는 손을 뻗었다. 입을 열어 소리를 뱉었다.
“정말로, 안 되나요..?”
고작 두 손가락으로, 매정한 짙은 회색 코트자락을 겨우 쥐었다. 손은 떨리고 있지 않았다. 다만 목소리가 떨렸다. 살면서 많이 해 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특히나 레이겐에게는. 꼴사납고 비참해질 뿐이라고 생각해서 여태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래서 여태 흘려내지 못한 애원이었다. 정말로, 안 되는 건가요. 목 끝까지 차올라 혀를 적시는 울음을 입 안에서 굴리며 리츠는 간절하게 물었다. 절실하게 빌었다.
“너, 좋은 녀석이니까.”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어찌도 그리 형식적인지.
“분명 나 같은 것보다 훨씬 좋은 사람 만날 거야.”
돌아보지 않는 등은 어찌도 그리 매정한지. 어찌 그리 상냥해서, 바보처럼 상냥해서 매정한지.
“그래서, 제가 행복할 거라 생각하나요.”
견딜 수 없는 헛된 상냥함에 리츠는 이를 악물어 입안에 고인 울음을 씹어내다가, 결국 주르륵 흘려내고 말았다.
“당신이 바라는 대로, 평범하게 귀여운 여자를 만나서, 평범하게 귀여운 여자와 사랑을 하는 제가, 당신이 그리는 미래의 저의 모습이, 당신의 눈에는 행복해 보이나요. 당신은 정말, 정말로, 그걸로 좋은 건가요?”
메마른 바람이 불었다. 거칠게 일렁이는 파도소리, 서글프게 우는 갈매기소리. 차갑게 얼어붙은 뺨을 적시는 소금기 어린 바람의 짭조름한 울음소리가 귓가를 적시는 가운데, 그럼에도 선명하게 목소리는 들려왔다. 리츠에게 선명한 목소리였다. 언제, 어느 때라도, 어떤 말이어도 어쩔 수 없이 선명하게 귓속으로 파고들어 가슴에 맺히는 목소리였다.
응, 이라고. 리츠가 사랑하는 잔인한 목소리는 말했다. 일렁이는 파도처럼 떨리는 목소리가, 서글프게 울음 짓는 바닷바람만큼이나 젖어있는 목소리가.
“그게 좋아. 그걸로 됐어. 난, 그거면 돼..”
그렇게 말했다.
숨을 삼키며, 리츠는 짙은 회색 코트자락을 쥔 제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한 걸음. 떨어져 있던 거리를 좁혔다. 마른 모래가 밟히는 소리에 레이겐이 움찔하며 등을 떨었지만 여전히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 매정한 등에, 그 바보 같은 등에, 어깨에, 리츠는 제 이마를 얹었다. 젖은 눈을 기대며 천천히, 리츠는 입을 열었다.
“제가 선택한 건 레이겐씨에요.”
볼품없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파도처럼 일렁이는 목소리로, 그럼에도 분명하게.
“현실이 어떻던, 사회가 어떻던, 당신이 아니면 안 돼요. 당신이 아니면, 난 행복할 수가 없어. 아직도 그걸 몰라요?”
떨리는 등에, 흔들리는 어깨에 단단히 저를 묻고. 리츠는 말했다.
“제가 선택한 건 레이겐 아라타카, 당신이에요.”
간절하게 빌었다.
“그러니 당신도 아무 생각 말고, 바보 같은 생각 말고. 그저, 그저 저를 선택해 주면 안 되나요?”
그렇게 해 줄 수는 없나요.
소원하며 리츠는 느릿하게 레이겐의 어깨에 묻었던 제 고개를 들었다. 짙은 회색 코트자락만을 겨우 잡고 있던 손가락을 떼고 팔을 뻗었다. 떨리는 어깨를 잡고 빙그르. 몸을 돌리자 그제야 리츠의 눈 안에 매정한 등이 아닌 선명한 얼굴이 담겼다. 짭조름한 바닷바람에 한껏 젖은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져 울음을 토해내고 있는 얼굴이, 레이겐의 얼굴이 보였다. 리츠는 두 손을 뻗었다.
리츠.
젖은 뺨에 손을 대고 닦다가, 닦아내다가, 그러다 들려온 선명한 목소리에 리츠는 대답했다. 네. 짧지만 분명한 대답이었다. 굳게 감겨 있던 레이겐의 눈이 스르르 떠지며 리츠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시선이 맞았다. 레이겐의 입이 열렸다. 도로 닫혀, 제 입술에 이를 박아 넣었다가, 다시. 바르르 떨리며 벌어진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이 리츠를 향했다.
“후회할 거야.”
“그럴지도 모르죠.”
“그 때 헤어졌으면 좋았다고, 왜 그 때 놓아주지 않았냐고, 날 원망할 거야.”
“그럴 수도 있겠네요.”
“많이 힘들고, 어려울 거야.”
“알아요. 하지만 레이겐씨. 그래도 저는, ”
눈물 젖은 두 뺨을 제 손으로 감싸고, 울먹이는 눈에 볼품없이 눈물을 흘려내고 있는 제 눈을 맞추며, 그럼에도 리츠는 입을 열어, 분명히 말했다. 더 이상 목소리는 떨리고 있지 않았다.
“당신을 사랑해요.”
바람이 불었다. 짙은 소금기를 머금은 청량한 바람이 얼어붙은 손끝을 스치는 그 가운데에 두 사람은 있었다. 마른 모래사장에 두 발을 디디고, 해가 완전히 저물어 어둠이 깔린 바닷가에서. 금색 실로 제법 멋들어지게 수를 놓은 듯 별이 떠 있는 까만 하늘이 스카프처럼 넓게 펼쳐져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작년이었나, 재작년이었나. 언제나 갑갑하다며 목을 훤히 내놓고 다니는 레이겐을 위해 크리스마스 날에 리츠가 선물한 스카프였다. 단 한 번도 레이겐의 목에 둘러지지 못하고, 딱 한 번 리츠의 눈에 감겼다가, 지금은 리츠의 주머니에 있는 스카프. 그와 같은 색 하늘. 리츠를 닮은 검은 바탕에 레이겐을 닮은 금색 실로 제법 멋들어지게 수놓아 진 것이 마치 함께 있는 것 같았던, 그 스카프처럼. 금실로 수놓아진 까만 하늘에 둘러져 귓가를 간질이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두 사람은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서로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제야, 온전한 사랑을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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