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신이 말하길.
붉은 실은 인연의 상징이요, 운명의 증표일지니.
새끼손가락에 매인 붉은 실 끝자락에 있는 이가 곧 그대의 운명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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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선한 아침이었다. 회색 아스팔트 차도에는 색색의 자동차가 줄 지어 늘어져 있고 탁한 적갈색 판판한 벽돌이 깔린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쁜 걸음을 옮기는 아침. 역 안에 있는 카페에서는 저마다 사람들이 노란 달걀이 들어간 샌드위치 따위의 간단한 아침거리를 먹으며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갈색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검은색, 회색, 군청색 등등. 부쩍 단정한 색색의 옷을 차려입고 오가는 사람들이 밖에서 급히 묻혀 온 바람색을 털어내는 공간이었다. 열차를 기다리며 회색 신문을 펼치거나 고급스런 색감의 북 커버를 씌운 책을 꺼내들기도 하는 공간. 온갖 색이 뒤섞여 자칫하면 어지러워질 것만 같은 번잡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공간에서 조금 비껴간 곳에 우뚝 서 있는 소년이 하나.
카게야마 시게오, 통칭 모브라 불리는 소년이었다.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어깨를 치거나 다리를 밟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쓰는 어수선한 역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 곳에서 묘하게 비껴난 위치에 모브는 그저 가만히 서서 오로지 역 입구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어딘가 이질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또 그리 특별한 모습은 아니었다. 검은 가쿠란은 입은 채 옅은 감색 가방을 손에 들고 역 입구를 빤히 지켜보다가 가끔씩 시계를 힐끗. 어느 모로 보나 함께 등교할 친구를 기다리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주변에 있는 같은 목적의 사람들이 스마트폰이나 책, 신문 따위를 보고 있는 것과는 달리 구멍이라도 뚫을 듯 역 입구를 주시하고 있다는 점이 조금 독특하다면 독특한 점이랄까.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까. 10분? 아니 그보다 조금 더 흘렀을 즈음이었다. 역 입구 쪽에 그득한 수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가을 갈대밭을 고스란히 담아낸 머리가 모브의 눈에 비쳤다. 모브와 같은 검은 가쿠란, 모브와 같은 옅은 감색 가방. 목 끝까지 단정하게 단추를 채운 모브와는 달리 첫 번째 단추 하나 정도는 끌러 숨통을 튼 소년이 느긋하게 출구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교통카드가 든 감색 카드지갑을 단말기에 찍고, 열린 공간으로 가뿐히 제 몸을 통과시켜 산뜻하게 빠져 나오고는, 소년은 카드지갑을 대충 제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었다.
그 반복적이고 가벼운 과정마저 모브는 하나도 빠짐없이 몽땅 제 눈에 담아내었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그저 오롯하게 바라보며, 소년의 시선이 어서 빨리 저를 찾기만을 가만히 기다렸다. 허나 그런 모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긋하게, 또 태평하게. 역 입구 앞에 떡하니 서 고개를 숙인 채 부스럭거리던 소년은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제서야 익숙하게 누군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조금 더 있다가. 엉뚱한 곳을 헤매는 소년의 시선에 모브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어 소년을 부르려던 차였다. 갈댓잎처럼 가느다란 머리칼이 사르르 흔들렸다. 느긋하게 돌아가던 고개가 딱 멈추며, 소년의 시선이 정확하게 모브를 담아내었다. 눈이 마주쳤다. 깜빡, 깜빡. 그리곤, 씨익. 소년의 입이 열렸다.
“여- 모브. 좋은 아침.”
가늘게 눈가를 휘어 웃으며 소년은 모브에게 다가왔다. 한 손을 가볍게 흔들어 인사를 건네는 모양새가 일견 시원스럽기까지 했다. 그런 소년의 모습에 모브 역시 입술을 양끝으로 힘껏 끌어당기며 웃어 보였다. 소년을 향해 걸음을 디디며 파아란 아침 하늘에 퍽 어울리는 인사를 건네었다.
“아라타카군도 좋은 아침.”
첫 만남은 언제였더라. 모브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였을 거다. 병아리 같은 노란 유치원복을 벗고 회색 반바지 정장을 입고. 모브의 어머니가 백화점에서 큰 맘 먹고 산 검은색 단정한 란도셀을 등에 메고 아버지처럼 보라색 넥타이도 맸었다. 연분홍 바람은 따스하지만 아직 공기 중에는 눈처럼 새하얀 추위가 조금 남아 있던 때였다. 색색의 깜찍한 정장을 입은 아이들과 그와 맞춰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부모님들이 오가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너도나도 사진을 찍는 학교 정문에서 였던가. 차에 카메라를 두고 왔다며 가지러 간 어머니 대신 형이 가버린다며 울먹이던 동생을 달래다가, 그러다가 발견했을 거다. 연분홍 꽃잎이 하늘거리며 춤추는 그 아래에 서서, 갈대처럼 웃고 있던 사내아이를.
온통 봄이 가득한 주변에서 오직 혼자만 가을인 아이였다. 청량한 가을하늘 아래 넓게 펼쳐진 갈대밭을 고스란히 머리위에 얹고 있는 아이. 가을바람에 잘게 흔들리는 갈댓잎처럼 간지럽게 웃으며 카메라를 향해 자그마한 두 손을 들어 브이 자를 만들어내던 그 아이를 본 순간이었다. 모브는 제 심장이 멈춰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무서운 착각을 했더랬다. 쿵, 하고 멈춰버렸던 심장은 아이가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쳤을 때에는 또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었지. 아이가 등에 멘 하늘색 란도셀을 고쳐 메며 모브에게 달려왔을 때에는 우유처럼 하얗던 얼굴이 딸기우유처럼 변해 있었다. 그런 모브에게, 아이는 손을 내밀었던가.
‘안녕? 나는 레이겐 아라타카라고 해.’
갈대처럼 간지럽게, 아니, 길가에 핀 색색 깔의 코스모스 꽃처럼 어여쁘게도 웃으며 아이는 제 이름을 말했었다.
‘나, 나는 카게야마 시게오야..’
내가 이 예쁜 손을 잡아도 될까.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쥐어짜 두 손으로 덥석 그 손을 잡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모브 역시 제 이름을 말했을 거다. 형의 관심을 빼앗겨 버린 한 살 어린 동생이 제 허리를 꼬옥 붙잡아 당기는 것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 순간 모브는 긴장해 있었다. 떨렸고, 설렜으며, 이 만남이 너무나 기뻐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잘 부탁해. 아, 우리 같이 사진 찍을까? 하고. 서슴없이 말하며 모브를 잡아끄는 아이는, 레이겐은 모브의 눈에 너무도 어여뻤으니까. 모브가 여지껏 봐 왔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정말로 가장 예쁘다고 생각했던 츠보미와도 버금갈 정도로,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그래.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첫사랑이었다.
물론 그 어린 때에는 제 감정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지만.
모브가 제 감정이 어떤 것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건 언제였더라. 중학교에 입학할 때 즈음이었을 거다. 아니,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즈음이었나? 아무튼. 그 때에, 모브는 레이겐이 이사를 간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입학식 때 처음 만나고, 넉살좋은 레이겐의 성격 덕에 함께 사진도 찍고. 모브 이름의 한자를 보고서는 모브, 라는 별명까지 냉큼 지어버렸던 레이겐은, 우연의 일치인지 운명인지 모브와 집도 가까웠었다. 덕분에 거의 매일같이 함께 등교하고, 하교하고. 한 살 어린 동생인 리츠가 입학한 후로는 언제나 셋이서 등하교를 함께했다. 특히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운도 좋게 쭉 같은 반이 되었던 모브와 레이겐은 거의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다녔다 해도 좋을 정도였다. 6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그랬는데.
처음 레이겐의 입에서 이사라는 말이 나왔을 때, 모브는 레이겐을 처음만난 이후로는 겪어보지도 못했던 제 심장이 멈춰버리는 것만 같은 감각을 또다시 맛보아야만 했다. 쿵, 하고. 하지만 그때처럼 위로 솟다가 턱에 부딪혀버린 것만 같은 감각이 아니라, 반대로. 아래로 뚝 떨어져 발밑에 붉은 피를 흘리며 으깨져 버린 것만 같은 감각.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한 감각이었다. 손끝이 떨리고, 눈앞이 아찔해지는 소름끼치는 감각이었다. 떨리는 두 손으로, 모브는 레이겐의 팔을 꽉 붙잡았었다. 가지마. 그렇게 말했을 거다. 나도 가기 싫어, 그렇게 대답이 돌아왔었다. 어린나이에 곧 찾아올 얼음장 같이 시퍼런 이별이 두려워 모브와 레이겐은 부둥켜안고 한참을 투명한 눈물방울을 뚝뚝 떨구며 서로의 어깨를 적셨었다.
하지만 아이의 사정이 안타까울 지언정 어른의 사정이라는 것도 녹록치가 않아서. 결국 이삿짐을 싣는 시퍼런 트럭에 몸을 함께 싣고 떠나버리는 레이겐을 바라보며, 모브는 그야말로 엉엉 울었었다. 뚝뚝 떨어지는 투명한 물방울이 두둥실 떠올라 초록빛 나뭇잎을 적시고, 회색 콘크리트 담벼락을 적시고. 마침 담벼락 위를 산책하던 하얀 고양이도, 모브 옆에서 제 코끝이 벌게지려는 것을 꾹 참듯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지르고 있던 리츠도. 굴러다니던 짙은 회색 돌멩이도, 전봇대 아래에 부쩍 빨리 피어있던 노란 민들레도. 모브의 서글픈 울음과 함께 주변의 모든 것들이 공중으로 두둥실 떠올라 버렸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주택가의 집들이 흔들리고, 땅도 조금 갈라졌던가. 당황한 모브의 어머니가 모브를 끌어안고 달래어 봐도 한참동안 울음을 그치지 못했었지. 꼭 전화해야 해? 하며 서로 나눈 핸드폰 번호로 전화가 왔을 때에서야 겨우 울음을 뚝 그쳤더랬다. 하지만 울음을 그치고도 모브는 한참을, 레이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핸드폰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놓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말 많고 탈 많은 이별을 하고 고작 며칠. 검은 가쿠란에 옅은 감색 가방을 손에 들고, 입학식 현수막이 연분홍 꽃잎과 함께 흔들리는 교문으로 들어서던 모브는 언제나 주머니에 꼭 넣고 다니는 핸드폰으로 온 한 통의 전화를 받았었다. 여- 모브.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를 들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제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도. 묘하게 겹쳐지는 목소리에 설마, 하고 돌아 선 그 앞에는 거짓말처럼 레이겐이 있었지. 저와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가방을 든 레이겐이 있었다. 주변은 온통 봄인데, 혼자서만 가을을 몽땅 품고 있는 레이겐이, 다시 모브의 눈앞에 있었다. 알고 보니 이사 간 곳이 고작 몇 정거장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나.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귀에 대고 있던 검은색 폴더식 핸드폰을 탁, 하고 닫던. 처음 만난 그 날처럼 손을 내밀며 길가에 핀 색색 깔의 코스모스 꽃처럼 웃는 그 얼굴을 바라보다, 바라보다가.
‘다시 잘 부탁해?’
레이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모브는 달려가 그 몸을 있는 힘껏 안았었다. 응, 응. 눈가에 맺힌 기쁜 눈물이 꽃잎처럼 떨어질까 꾹 참으며 레이겐의 어깨에 제 고개를 묻었더랬다.
‘또 매일, 같이 학교가자.’
‘엑. 나 이제부턴 역에서 내려서 갈 텐데?’
‘내가 매일 역으로 마중 갈게.’
‘그게 뭐야.’
울먹이며, 웃으며. 레이겐이 쑥스럽다고 싫어해 어릴 적처럼 손은 맞잡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깨를 나란히 하며 둘은 교실까지 함께 갔었다. 마치 운명처럼 또 같은 반이었지.
그 때, 한 번 레이겐을 떠나보낼 뻔 했을 때. 잃을 뻔 했을 때. 모브는 그 때 깨달았다. 아, 나 아라타카군을 좋아하는 구나. 제 심장이 오롯이 그만을 향해 반응하는 이유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쭉 제 안에서 간질거리며 싹트던 것의 이름을, 그 때에서야 모브는 알아챘었다. 그리고 그 때 즈음에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또 하나.
태어날 때부터 초능력이라는 남다른 힘을 가지도 태어난 모브의 눈에 가끔, 아주 가끔 보이던 것이 있었다. 유령처럼 보려고 하면 볼 수 있는 것도, 그저 눈을 뜨면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남들의 눈에는 분명 보이지 않지만 모브의 눈에만 보이는 것.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다가 아주 가끔 헛것처럼 보이는 것. 붉은 실이었다. 그것도 하얀 거미줄처럼 어딘가에 수놓아진 것이 아닌 반드시 누군가의 새끼손가락에만 그저 매여 있는 붉은 실. 정확히는, 누군가와 또 누군가를 잇는 붉은 실이었다. 마치 심장에서 혈관을 타고 흘러나온 피가 흐르던 형태 그대로 굳어버린 듯 언뜻 붉고, 언뜻 투명하고, 깨끗한, 그런. 심장이 이어진 듯 이어진 실의 끝과 끝에 존재하는 두 사람의 관계가 무엇인지, 그 붉은 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때까지 모브는 알지 못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아니, 네 번 정도일까? 고작 그 정도밖에 본 적이 없던 붉은 실이 매인 손가락을 가진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굳이 깊게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다. 그 붉은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제 담임선생님의 새끼손가락에 나타났을 때도 말이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붉은 실이 갑자기 나타난 순간, 모브는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을지언정 놀라거나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오늘 학교 끝나면 아라타카군하고 같이 서점에 갈까. 읽고 싶은 책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저 그런 생각에 빠져 담임선생님이 교탁에서 무언가 말을 할 때마다 눈앞에서 흔들거리는 붉은 실을 거의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팽팽하던 붉은 실이 조금씩 헐렁해지며, 복도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을 때. 조례를 마친 담임선생님이 교실을 나가, 복도에서 누군가와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창문 너머로 보았을 때. 마치 두 사람의 새끼손가락을 잇고 있는 붉은 실처럼 수줍게 뺨을 붉히며 참 어여쁘게도 마주 웃고 있는 두 어른을 보며 모브는 눈을 동그랗게 떴었다. 아, 하고. 그 때서야 자신이 아주 가끔씩 보아왔던 붉은 실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옛날이야기 중 그런 게 있었던가.
운명인 두 사람의 새끼손가락에는 보이지 않는 붉은 실이 매여 있다는 이야기.
새끼손가락에 매인 붉은 실의 끝자락에는 운명의 사랑이 있다는, 그런 이야기.
거리를 걷다 보면 종종 보이는 연인들에게서도, 교내에서 가끔 눈에 띄는 연인들에게서도, 심지어 자신의 부모님에게서도 보이지 않아 몰랐었다. 보였다가 사라졌다가, 같은 사람의 새끼손가락에 매여 있는 모습조차 한결같지는 않아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서로가 가까이 있어야만 보이는 거였구나. 그렇게 생각하던 그 때에 알았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붉은 실이, 이야기에서나 나오는 그 붉은 실이라는 것을. 운명의 신이 손수 묶었다고 하는 인연의 상징이라는 것을. 서로를 마주보며 그저 행복하게 웃는 담임선생님과 그 연인의 어여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고서야 알았다. 아직 미래까지는 보지 못한 모브였지만, 저들의 미래가 보이는 듯 했다. 수억의 인연을 뚫고 맺어진 진정한 운명의 상대. 행복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함께 거니는 길은, 온통 봄날의 꽃잎으로 가득할 터였다. 그 미래가, 순간적으로 모브의 눈에 보였다. 보였고, 제 양 손을 들어 보았고, 레이겐을 보았다.
푹, 고개를 숙여버렸다.
제 두 손 중 어느 손가락에도, 레이겐의 두 손 중 어느 손가락에도, 운명의 붉은 실은 매여 있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뭐,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모브의 부모님은 붉은 실 따위 없어도 충분히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고 있다. 모브도, 리츠도 제 가정에 불만을 가진 적은 없었고 가정에 큰 분란이 있던 적도 없었다. 그리고 그건 옆 집 아주머니 댁도, 레이겐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그야 물론 붉은 실로 이어진 운명의 사람이라면 좋겠지. 정말 좋을 거다. 운명의 신이 정해준 나만의 사람이라는 게 어떻게 기분 좋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운명이 아니라고 해서 불행해지는 건 아니지 않나. 오히려 운명의 상대를 찾아, 새끼손가락에 붉은 실이 매인 손을 맞잡는 것이 더욱 특별하고 드문 일이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응? 운명의 붉은 실?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냥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라고. 모브의 사랑이 그리 말했었다. 붉은 실 따위보다 몇 배나 어여쁜 붉은 입술 옆에 하얀 밥풀을 묻히고 주먹밥을 우물우물 씹어 먹으며. 태평하게 내뱉는 레이겐의 말에 모브는 제 가슴을 쓸어내렸더랬다. 턱 끝까지 차올라 혀뿌리를 잡아당기는 안도의 한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레이겐의 입가에 묻은 하얀 밥풀을 떼어 익숙하게 제 입 안으로 집어넣던 모브의 눈은 희망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운명의 붉은 실 따위가 무어 그리 대수일까.
그 까짓 것이 없어도 모브는 운명의 신이 하는 말 따위는 들리지도 않을 만큼 레이겐을 사랑했다. 그리고 레이겐도, 분명. 붉은 실 따위에 연연하지 않을 터였다. 설령 레이겐의 새끼손가락에 붉은 실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레이겐의 운명의 상대가 나타나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다 할지라도. 그런 것 따위에는 개의치 않고, 분명 모브를 택할 거라고.
“있잖아, 모브. 이건 다른 녀석들한테는 비밀인데..”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
청량한 가을 하늘 아래, 담벼락 밑에 수줍게 피어난 채송화 꽃잎처럼 붉게 물든 뺨을 긁적이며 쑥스럽게 웃는 레이겐의 얼굴과,
“어제 옆 반에 새로 전학 온 애 말이야. 검은 단발머리의 귀여운..”
모브가 난생 처음으로 보는 표정으로 사랑스럽게 웃는 그 얼굴과,
“나도 처음 알았는데, 첫 눈에 반한다는 건 이런 느낌이었나봐.. 아! 정말로 다른 녀석들한테는 비밀이다? 분명 엄청 놀려댈 테니까. 너한테만 특별히 말해주는 거야.”
눈앞에서 살랑거리는 붉은 실 자락은, 왜 이리도 선명한지.
운명의 붉은 실.
고작 그까짓 것이 무어 그리 대수일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전부 다 산산조각이 나 잘게 부서져 버릴 정도로, 운명은 잔인하리만큼 선명하게 모브를 뒤흔들었다.
하루, 또 하루. 고작 한 번만 보고 좋아하게 되었다던 옆 반에 전학 온 소녀와 레이겐은 앗, 할 틈도 없이 너무나도 빨리 서로에게 가까워져 갔다. 어제는 분명 둘 사이에 다섯 발자국의 거리가 있었는데 오늘은 고작 네 발자국의 거리만 있는, 그런 나날. 마치 서로의 새끼손가락에 매인 붉은 실에 이끌리듯 레이겐과 소녀는 가까워져 갔고, 딱 그만큼 모브와는 멀어져 갔다.
점점 그 운명의 소녀와 가까워지는 레이겐을 바라보며 모브는 제 주먹을 꾹 쥐었다. 레이겐이 멀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유독 분위기를 잘 읽지 못하는 모브조차 알아차릴 정도로 선명한 현실이었다. 오늘 학교 끝나고 뭐 하고 놀까? 언제나 먼저 물어오던 레이겐이 말을 꺼내는 횟수가 점점 줄어갔다. 같이 하교하는 날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점심에 같이 밥을 먹는 날도, 점점.
그러다가, 레이겐 안에서 모브의 자리가 좁아져만 가다가. 그러다가 생긴 일이었다. 그러다가, 레이겐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미안, 모브. 내일은 마중 나오지 않아도 되니까... 그 애랑 역에서 만나서 같이 가기로 했거든.”
쑥스럽다는 듯, 기쁘다는 듯. 숨김없이 제 어여쁜 선분홍색 감정을 두 뺨에 잔뜩 칠한 채 모브를 향해 웃는 레이겐을 보는 그 순간, 모브는 제 심장이 태어나서 두 번째로 땅바닥에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꼈다. 손끝이 떨리고 눈앞이 아찔해지는 그 소름끼치는 감각은 레이겐을 잃는 줄만 알았던 그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아니, 이토록이나 참담했던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제 발밑에 으깨져 있는 검붉은 심장의 조각들이, 제 하얀 신발을 온통 투명하게 적시고 있는 눈물 같은 핏자국이. 시리도록 선명하게 검은 눈 안으로 파고들어오고 있었다. 모브는 떨리는 제 마른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응..”
그 말밖에 흘려내지 못하고, 다시 다물고 말았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모브가 누구보다 사랑하는 레이겐이 너무나도 행복하게, 어여쁘게 웃고 있는 걸. 늘 함께 있었던 모브조차 난생 처음 보는 표정으로,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웃고 있는 걸. 고맙다 말하며 제게 등을 돌리는 그 모습조차 너무도 어여뻐서, 검은 등 뒤로 살랑거리는 붉은 실이 너무도,
거슬려서.
덤덤한 검은 표정 아래 하얀 두 손가락을 세워, 모브는 가위를 만들었다.
그리고,
싹둑.
연분홍 꽃잎이 하늘거리며 춤추는 봄날이었다. 불어오는 연분홍색 바람은 따스하지만 아직 공기 중에는 눈처럼 새하얀 추위가 조금 남아있는 날. 똑같은 검은색 가쿠란을 입고, 똑같은 하얀 실내화를 신고. 모브와 레이겐은 회색 아스팔트 옥상 한 켠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모브의 단정한 검은 머리카락도, 남들은 다 봄인데 저 혼자만 가을을 끌어안은 레이겐의 옅은 갈색 머리카락도 연분홍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꽃잎이 흩날렸다. 눈을 닮은 하얀, 허나 보드랍게 연분홍색을 담은 꽃잎이 바람에 날려 옥상까지 올라와 두 사람의 하얀 실내화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뚝, 뚝. 투명한 눈물방울도 뚝, 뚝.
“날 좋아한다고, 그랬으면서...”
“아라타카군..”
옆 반에 전학 온 검은 단발머리의 소녀와 레이겐이 헤어졌다. 아니, 그 소녀가 전학을 온 지도 벌써 반년 정도가 지났으니 이제는 그냥 옆 반 소녀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아주 잠깐 사귀었던 그 소녀에게 레이겐이 차인 것은 바로 어제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으니까. 관계에 있어 충분히 있을 수는 있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들어 부쩍 서먹해진 두 사람 사이에서는 얼마든지 피어날 수 있는 새로운 감정이었다. 그야 정이 많은 레이겐은 그럼에도 열심히 사랑하려 했었지. 그 소녀를 사랑하려 최선을 다했었다. 모브도 알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이별이었다. 더 이상 두 사람을 잇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일어난, 어쩔 수 없는 이별.
검은 소맷자락으로 얼마나 문질렀는지 벌겋게 부어오른 두 눈 아래로 채 닦이지 못하고 흘러넘친 투명한 눈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모브는 손을 뻗어, 그런 레이겐의 등을 쓸어주고, 어깨를 매만져 주었다. 눈 아파. 계속 물기가 어리는 눈을 문질러대고 있는 팔을 잡아 내리고, 대신 제 손으로 눈가를 닦아 주었다. 닦아주다, 닦아주다가. 모브는 뜨끈하게 열이 오른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계속 숙이려고만 드는 레이겐의 고개를 들어 제게로 향하게 했다. 곧장 시야 한가득 울음 고인 어여쁜 검은 눈동자가 들어찼다. 모브는 떨리는 제 마른 입술에 꾹 힘을 주었다. 조금만 정신을 놓았다가는 사랑스러운 물기로 범벅이 된 이 눈가에 입 맞춰 버릴 것만 같았다. 모브는 아쉬운 듯 느릿하게 레이겐의 뺨에서 두 손을 거두었다. 아직은, 아니었으니까.
대신 두 팔을 뻗어 모브는 레이겐을 끌어안았다. 레이겐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순순히 모브의 가슴팍에 제 머리를 기대었다. 그런 레이겐의 등을 손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모브는 입을 열었다. 괜찮아. 괜찮아. 귓가에 상냥한 위로를 속삭였다.
“모브, 모브. 넌, 나 떠나면 안 돼..? 나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고 말하기 없기야..?”
울음 색이 잔뜩 칠해진 떨리는 목소리로 가엾게도 그리 말하는 레이겐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모브는 울음으로 잘게 떨리는 귓가에 사랑스러움을 듬뿍 담아 속삭였다.
“물론이지. 나한테 아라타카군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제 가슴팍을 적시며 등에 둘러지는 두 팔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살랑거리는 붉은 실이 한 가닥. 인연의 상징, 운명의 붉은 실이었다. 검은 등판에 둘러진 검은 소매, 그 끝에 삐져나온 하얀 손, 새끼손가락에 매인 붉은 실 자락이 눈앞에서 선명하게 살랑이고 있었다. 제 새끼손가락에 매인 붉은 실이, 레이겐의 새끼손가락에 매인 붉은 실이. 헐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가운데에 꽉 엉켜버린 매듭을 두고, 서로 이어진 채, 그렇게.
‘아아.’
제 품에 가득한 사랑스런 온기 뒤로 살랑거리는 붉은 실 자락을 손끝으로 가볍게 잡아 모브는 입을 맞추었다.
‘운명의 신이 말하길.’
짙게, 웃음 지었다.
‘우리는 붉은 실로 이어진
운명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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