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직거리는 잡음 하나 없이 깔끔하게 소리를 내는 최신형의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이미 몇 십 번이고 돌려 본 동경하는 히어로의 잔상. 웃는 얼굴로 수많은 사람들을 구해내는 넘버 원 히어로. 세운 무릎을 끌어안고 그 안에 자신을 온전히 묻어버린 채 고개만 살며시 들어 화면을 바라보는 미도리야는 그저 멍하니, 습관처럼 생각했다. 구해줘요, 히어로.
고급스러운 방이었다. 성인 남자 서넛은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침대가 한 켠에 놓인, 눈부시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밝기로 방 안을 비추는 전등이 있는. 밟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보드라운 카펫이 바닥에 깔리고, 조금만 일어나 걸으면 갖출 것 모두 갖춘 부엌도 있었다. 커다란 텔레비전도, 성능 좋은 컴퓨터도 있었다. 책장에는 미도리야의 취향이 담뿍 담긴 책들이 한 가득, 옆에 놓인 책상조차 허투로 만들어지지 않은 고급진 목제. 난방도, 에어컨도 확실하게. 사치스러울 정도로 고급진 방이었다. 누구나가 꿈꾸는 멋진 방이었다. 자유만이 박탈당한, 안락한 공간이었다.
문은 있었다. 침대에서도 부엌에서도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닿을 수 없는 곳에 출입구는 분명히 존재했다. 창문은 없었다. 창문의 흔적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열리지 않는 문이었다. 밖을 내다 볼 수조차 없는 막이었다.
이곳에 온 지 얼마나 지났는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것은 미도리야가 가장 좋아하는 히어로의 오래된 재방송 뿐. 뉴스를 보는 것도, 그 외 다른 어떤 것을 보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영화는 가끔 보았다. 그와 함께. 컴퓨터는, 글쎄. 가끔 하기는 하지만 기껏해야 요리 레시피를 검색해 보거나 재미없는 영화를 찾아보거나, 그 정도일까. 마우스를 움직이는 제 옆에 딱 붙어 저와 같은 화면을 응시하는 그는 미도리야가 바깥의 정보에 조금이라도 접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핸드폰은, 물론, 꽁꽁 얼어 산산이 부숴진지 오래였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오로지 자유만을 박탈당한 공간에서 미도리야의 일과는 단순했다. 잠에서 깨어나 그가 차려 놓고 간 아침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고, 점심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고, 저녁밥을 먹고, 씻고,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 사이 아침 일찍 출근했다가 저녁 즈음에 퇴근한 그는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식사준비도 하고.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조금 늦게 오는 날도 있기 마련이거늘 그는 언제나 저녁 즈음에 방으로 돌아와 미도리야를 위한 저녁식사를 만들었다. 그 뒤 미도리야가 씻는 동안 청소나, 빨래 등등.
방에 갇히고 처음 며칠은 그런 그를 계속 눈으로 쫒으며 대화를 시도했었다. 싸움도 했다. 기회를 봐서 도망치려 한 횟수는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제는, 그것마저 지쳐버려서. 미도리야는 그를 보는 것 자체를 그만두었다.
달그락. 달그락.
아득한 바깥에서 들려오는 빗소리와 함께 그가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소리가 멀게 들여왔다. 미도리야는 움직이지 않았다. 침대 위에 몸을 구기고 앉아, 그저 멍하니 텔레비전의 화면만 보고 있을 뿐. 끼익, 하고 수도꼭지를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가스불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도자기로 된 고급스런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다가오는 발소리.
"미도리야."
불러진 이름에 미도리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그 시선은 여전히 텔레비전을, 그 안의 최고의 히어로를 향한 채. 그런 미도리야를 보고 그는 미소지었다. 쳇바퀴 돌리는 것에 정신이 팔려, 넣어준 식사를 눈치 채지 못한 귀여운 귀여운 제 햄스터라도 보는 양. 사랑스러움을 한껏 담은 눈동자가 옅게 휘며 쿡쿡 낮은 웃음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뻗어져, 파묻혀있던 고개를 들어 올린 양 손이 미도리야의 뺨에 닿았다. 상냥한 접촉이었다.
"밥 먹자, 미도리야. 오늘 저녁은 네가 가장 좋아하는 가츠동이야."
다정한 목소리, 상냥한 눈빛. 실크로 된 이불만큼이나 매끄럽고 보드라운 어투로 아이를 어르듯 그는 미도리야의 뺨을 어루만졌다. 조금 말랐나, 잠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던 그의 얼굴이 천천히 텔레비전에서 자신에게로 옮겨지는 미도리야의 시선에 환하게 피어났다. 눈이 마주쳤다. 메마른 입술이 조금 벌어지며, 갈라진 이름이 흘러나왔다.
본 글은 일본식의 나이를 세는 법(생일이 지나야 한 살 먹음)을 따랐으나 토도로키가 빠른 생일이 아니라는 가정하에 썼습니다. 즉, 소설 안에서는 토도로키가 데쿠군보다 6개월 정도 먼저 태어난 아주 조금 형입니다.
있잖아, 알고 있어?
저어기 마을 뒤에 있는 녹색 숲에는 말이야.
무서운 괴물이 살고 있대.
괴물을 만나면
어른이 되지 못하고 죽어버린대.
무서운 무서운 괴물이래.
그러니까,
절대 혼자서 그곳에 가면 안 돼. 알겠지?
태어난 지 4년 하고도 아주 조금. 늘 어른들이 제게 들려준 말입니다. 옛날이야기인지 노랫말인지.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그냥 이야기 말인 것 같은 그 말은, 딱히 외우려 한 적이 없는데도 이제는 그냥 술술 불러집니다.
그래서 일까요. 저는 옛날부터 제가 사는 마을 뒤에 있는 녹색 숲이 무서웠습니다. 캇쨩은 그런 말 따위 어른들이 다 꾸며낸 말이라고 했고 다른 친구들도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녹색 숲에 가서 놀고는 하지만, 그래도 저는 무서웠습니다.
녹색 숲은 일 년 내내 녹색입니다. 가을이 와도, 겨울이 와도, 다른 곳은 다 색깔이 변하는데 녹색 숲은 늘 녹색입니다. 계속 계속 녹색입니다. 그래서 녹색 숲이라고, 엄마가 말해줬지만 왜 그런지는 엄마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 모든 걸 알고 있는 엄마가 모른다고 했어요. 고개를 갸웃하면서 이상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상했습니다.
녹색 숲에는 사람이 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마을에서만 살고 녹색 숲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괴물이 나오니까 살 수 없는 걸까요. 무서웠습니다.
언제나 녹색이고 사람이 살지 않는 녹색 숲. 어렸을 때부터, 지금도 어리지만 더 어렸을 때부터, 저는 그곳이 싫었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아팠습니다. 녹색 숲을 보면 왼쪽 가슴이 따끔따끔 아파 와서, 그래서 녹색 숲이 무서웠습니다. 절대로 녹색 숲 가까이에는 가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요.
주변이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 여름인데, 낮에는 그렇게 더웠는데 지금은 어째서 이렇게 추운 걸까요. 바람이 차가워서 몸이 부르르 떨렸습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지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가 않습니다. 큰소리로 캇쨩을 불러 봐도 돌아오는 소리는 없습니다. 아니, 풀벌레 소리가 조금 들리는 것 같습니다. 더 무섭습니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요. 저는 그냥 캇쨩을 따라왔을 뿐인데. 숨바꼭질을 하자며 녹색 숲으로 가던 캇쨩을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을까요. 하지만 숨바꼭질은 하고 싶었습니다. 녹색 숲은 무서웠지만, 모두와 같이 숨바꼭질이 하고 싶었습니다. 열심히 했습니다. 너무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계속 계속 술래만 하다가 겨우 숨을 있게 되어서, 신이 나서. 절대로 들키지 말고 끝까지 숨어있어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달렸던 게 잘못이었을까요. 한참을 달린 다음에 커다란 수풀 사이에 꾸역꾸역 들어가 몸을 숨겼던 게 잘못이었을까요. 저는 끝까지 들키지 않고 숨는데 성공했습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가, 그러다가 추워서 다시 일어날 때까지도 들키지 않고 숨는데 성공해버렸습니다. 어떡하죠.
잠깐 잠들었을 뿐인데 밤이 되어버린 건지 주변이 어두워서 무섭습니다. 바람 소리가 무섭습니다. 풀벌레 소리는 더 무섭습니다. 나뭇잎 소리는 더 더 무섭습니다. 어떡하죠. 어떡해야 할까요. 큰소리로 캇쨩을 불러보고, 다른 친구들을 불러보고, 엄마도 불러봤지만 아무도 저를 찾으러 와 주지 않습니다. 어떡하죠. 숲에서 나가려고 있는 힘껏 달려봤지만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여기는 어딘가요. 무섭습니다. 앗, 넘어져버렸습니다. 아파요. 여기는 어디죠? 아파. 엄마, 엄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바람소리가 멈췄습니다. 풀벌레도 이제는 안 웁니다. 나뭇잎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목소리만 들렸습니다. 귀가 아니라 머리에, 아니, 가슴에 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찾고 부르던 엄마는 아니었습니다. 캇쨩도 아니었습니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습니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왜 그리울까요. 누군가 왼쪽 가슴을 꾹꾹 누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넘어져서 아파서, 그래서 인걸까요.
그 사람의 손이 제 팔에 닿았습니다. 끌어당겨져 일으켜졌습니다. 눈이 마주쳤습니다.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있잖아, 요정님."
"요정 아닌데."
낮게 울리는 기분 좋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요정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꾹 눌러 쓴 후드 때문에 그림자가 져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요정님 품 안에서 올려다보는 거라 처음보다는 훨씬 잘 보였습니다. 멋진 얼굴이 보였습니다. 예쁜 눈이 보였습니다. 제가 그렇게 가만히 얼굴을 보고 있자, 요정님이 살짝 고개를 숙여 저와 눈을 마주쳐 주었습니다. 우와. 예쁜 눈이 눈 앞 한 가득입니다.
"으응, 요정님이야."
요정님은 자신이 요정이 아니라고 했지만, 역시 요정님은 요정님입니다. 그야, 저는 여태 이렇게 예쁜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걸요. 아! 물론 저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제일 예쁘지만! 그렇지만, 이렇게 예쁘고 멋있고.. 또 아픈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입니다. 캇쨩도 분명 멋있지만 요정님과는 조금 다릅니다. 요정님은 어른이고, 캇쨩은 쟤 또래이고, 그런 차이가 아니라 뭔가, 음, 보고 있을 때의 느낌이 다릅니다. 요정님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꾹꾹 눌리는 기분이 들지만 캇쨩을 보고 있을 때는 전혀 그렇지 않은걸요. 요정님은 계속 계속 보고 싶지만, 캇쨩은 그렇지 않은걸요. 앗, 이건 캇쨩이 보기 싫다는 게 아닙니다. 캇쨩은 조금 난폭하지만 좋은 친구니까요. 그러니까 쉿, 쉿.
아무튼, 요정님은 예쁩니다. 눈이 정말로 예쁩니다. 얼굴이 굉장히 멋있어요. 그리고 정말 정말 착합니다.
처음 요정님을 봤을 때, 저도 모르게 엉엉 울음이 터져버렸지만 요정님은 그런 저를 보고 캇쨩처럼 화 내지 않았습니다. 긴 팔을 뻗어서 저를 꼬옥 안아주었습니다. 등을 토닥여 주었습니다. 계속 추웠는데, 요정님의 품 안은 너무 따뜻해서, 그만 더 더 크게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정님이 더 꼬옥, 저를 안아주었습니다.
엄마는 늘 처음 보는 사람은 절대로 따라가면 안 된다고 그랬습니다. 캇쨩네 아주머니도 그랬고, 캇쨩도 낯선 사람 따라가거나 하는 건 얼뜨기나 하는 짓이라고 그랬습니다. 하지만 괜찮겠죠. 이 사람은 사람이 아닌 요정님인걸요. 예쁘고 멋있고 상냥한 요정님인걸요. 무엇보다, 제 손을 놓는 요정님의 표정이 너무 아파서 제가 떨어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겨우 눈물이 멈추고 깜짝 놀라서 요정님의 품 안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을 때, 요정님은 아무 말 없이 제게 뻗었던 팔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그 표정이, 그 눈이, 너무 아파서. 가슴이 쿡쿡 아파 와서. 낯선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는 엄마의 말도 다 잊고 제가 먼저 요정님의 손을 잡아버렸습니다. 깜짝 놀라던 요정님은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습니다. 쉿, 이건 요정님한텐 비밀이에요.
요정님의 손을 꼬옥 잡고 나서야, 저를 안아주기 위해 두 무릎을 굽혀 앉은 요정님 덕분에 저는 요정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요정님은 정말 요정님처럼 멋있었습니다. 정말 요정님처럼 눈이 너무 예뻤습니다. 보자마자 입이 헤- 벌어지려는 걸 막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안 그래도 앞이 잘 안 보이는 깜깜한 밤에, 검은 후드를 꾹 눌러쓴 요정님의 얼굴은 자세하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말 정말 예쁘고 잘생겼다는 건 분명했습니다. 후드의 그림자 때문에 색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반으로 갈라져 색이 나뉘어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는 신기한 머리카락도. 얼굴의 왼편을 뒤덮은 화상자국도. 양쪽의 색이 다른 눈동자. 멋진 얼굴. 예쁜 눈.
저도 모르게 손이 뻗어졌습니다. 요정님에게 닿고 싶었습니다. 그저 그런 마음으로 손을 뻗어, 요정님의 깨끗한 오른쪽 뺨과 일그러진 왼쪽 화상자국을 만졌습니다. 요정님은 제 손을 뿌리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만히, 제 손에 얼굴을 내어준 요정님은 제가 만지는 것에 따라 살며시 눈을 가늘게 할 뿐이었습니다. 색이 다른 눈동자에 희미한 빛이 감도는 것이 보였습니다. 엄마의 보물 상자가 떠올랐습니다. 그 속에 있던 몇 개의 돌멩이 중 가장 색이 예뻤던 돌멩이가, 그 돌멩이를 꼭 닮은 눈동자가, 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찌릿찌릿 아팠던 가슴이 쿵쿵 뛰었습니다. 그 때 확신했습니다.
"응, 요정님이야."
"그러니까 요정이 아니래도.."
처음 제가 요정님을 요정님이라고 했을 때처럼, 요정님은 또다시 곤란하다는 듯 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치만 물러설 생각은 없습니다. 요정님은 요정님인걸요. 상냥하고, 따뜻하고, 어딘가 아픈, 그런 요정님인걸요.
그래서 괜히 신경 쓰였습니다. 마을 어른들이 제게 늘 들려주던 노랫말 같은 말이요.
있잖아, 알고 있어?
저어기 마을 뒤에 있는 녹색 숲에는 말이야.
"있잖아, 요정님. 요정님은,"
무서운 괴물이 살고 있대.
"괴물님이야?"
괴물을 만나면
어른이 되지 못하고 죽어버린대.
"마을 어른들이 녹색 숲에는 괴물님이 산다고 그랬어. 요정님은 여기서 산다고 했고.. 여긴 녹색 숲이고.. 녹색 숲에 사는 건 괴물님이고.. 요정님은 녹색 숲에서 산다고 했으니까.."
무서운 무서운 괴물이래.
"요정님은 괴물님이야?"
그러니까,
"나는,"
절대 혼자서 그곳에 가면 안 돼. 알겠지?
"어른이 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거야?"
그 말을 뱉고, 저는 바로 후회했습니다.
요정님이, 울고 있었거든요.
제가 울 때처럼 눈물이 뚝뚝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분명 요정님은 울고 있었습니다. 괴물이라는 말이 아팠던 걸까요. 그저 마을에서 줄곧 들어왔던 말이 신경 쓰여서 물어본 것뿐이었는데, 요정님에게는 굉장히 아픈 말이었나 봅니다. 어쩌면 좋죠. 제가 요정님을 아프게 해 버린 것 같습니다. 가슴이 다시 아파옵니다. 어쩌면 좋죠. 요정님이 아픈 건 싫습니다. 요정님이 우는 건 더 더 싫습니다. 아픕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또 다시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미안해, 미안해 요정님. 내가 잘못했어. 요정님은 요정님이야. 괴물님 아니야. 미안해, 요정님. 다신 그런 말 안 할게. 요정님,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요. 울지 마.."
다정한 요정님. 따뜻한 요정님.
넘어져서 피가 나는 무릎을 닦아주고, 지쳐서 제대로 걷지 못하는 날 품에 안아 함께 걸어 가 주고. 지금도, 이렇게. 잔뜩 울고도 또 울어 뜨거워진 얼굴에 닿은 요정님의 오른손이 시원했습니다. 밤바람의 차가움과 다른 다정한 시원함. 그저 기분대로 엉엉 울어버린 저보다 요정님이 백배천배 아파 보이는데도, 상냥한 요정님은 제 눈물을 닦아줍니다. 더 눈물이 났습니다.
손을 뻗어, 요정님의 뺨에 대고. 눈물은 나지 않지만 어쩐지 잔뜩 젖어있는 것 같은 요정님의 눈 밑을 벅벅 닦았습니다. 울지 마요. 요정님, 울지 마.
"미도리야."
한참 만에 요정님이 입을 열었습니다. 벅벅 요정님의 눈 밑을 닦아대던 손을 멈추고 요정님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자 요정님이 제 얼굴을 닦아주던 오른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조금 당겨져, 정신을 차리고 보니 쿵쿵, 귓가에서 요정님의 심장 소리가 들렸습니다. 실컷 울었던 것도 잊고, 계속 그대로 있고 싶은 마음에 머리를 더 더 요정님 품에 묻으며 요정님을 꼬옥 끌어안았습니다. 따뜻합니다. 그립습니다. 조금, 가슴이 아픕니다.
얼마동안 그러고 있었을까요. 요정님이 저를 놓았습니다. 발이 땅에 닿고, 요정님의 무릎도 땅에 닿았습니다. 다시 눈이 마주쳤습니다. 요정님은 여전히 조금 아픈 표정입니다.
"한 가지. 약속을 해줬으면 해."
요정님의 말에 저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끄덕 했습니다. 요정님이 바라는 거라면 뭐든지 들어주고 싶습니다. 엄마가 만든 카츠동도 양보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가장 아끼는 히어로 인형도 줄 수 있습니다. 그런 제 마음을 안 걸까요. 요정님이 다시 한 번 제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어른이 되면.. 스무 살이 되면.. 다시 한 번 나를 만나러 와. 이곳으로, 나를 만나러 와 줘."
"어른이 되지 않아도 만나러 올 수 있어. 내일도, 모레도 만나러 올 수 있어!"
다시 만나러 와 달라는 말을 하는 요정님이 너무 아파 보여서, 요정님의 손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매일 매일 요정님을 만나러 오고 싶었습니다. 올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녹색 숲이 무섭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제 말에 요정님은 여전히 아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야, 라고. 어른이 되면, 이라고. 그렇게 말하며 요정님은 제 손을 한 번 꼭 잡은 뒤에, 아주 천천히 놓았습니다. 등에 요정님의 커다란 손이 닿았습니다.
"위험하니까, 다른 곳으로 새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가."
요정님의 그 말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마을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불이 켜진 집이 군데군데 보였습니다. 저어기 우리 집도 보입니다. 역시 엄마가 걱정하고 계실까요. 서둘러야겠습니다. 앗, 그 전에,
뒤를 돌아 봤습니다. 등에서 손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새 요정님은 저 멀리입니다. 집으로 갈 생각에 기뻤던 마음이 어쩐지 조금 무겁습니다. 요정님은 이곳에서 혼자인 걸까요. 줄곧, 혼자였던 걸까요. 또 다시 가슴이 쿡쿡 아파옵니다. 어두운 숲 속에 홀로 들어가는 요정님의 모습이 너무 아파보였습니다. 혼자 두고 싶지 않습니다. 같이 가야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겠죠. 요정님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아직 아니겠죠. 문득 요정님이 약속해 달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안녕, 녹색 숲의 요정님! 또 만나요!!"
꼭, 꼭. 다시 만나요.
그렇게 외치고 집으로 달려가는 동안, 오늘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사람들은 요정님을 괴물님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걸요. 그렇게 상냥하고 예쁜 요정님이 괴물님이라고 불리는 건 싫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일은 비밀. 엄마한테도, 캇쨩한테도 비밀입니다. 어른이 되어서, 다시 요정님을 만날 때까지 절대로 비밀입니다.
그런데, 제가 요정님한테 제 이름을 말했던가요?
안녕, 녹색 숲의 요정님.
그렇게 말하며 나를 떠나가는 '이번의' 너를, 나는 '이번에도' 돌아보지 못했다.
시작이었는지 끝이었는지도 모를 처음이 언제였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네가 길고 긴 여행을 떠났고 난 이곳에서 널 기다리고, 그 뿐. 유일하게 잊혀지지 않는 기억 속의 네가 나에게 웃으며 말했었다. 내가 갈게. 그러니 나는 기다린다. 그 뿐이었다.
그야 처음에는 놀랐었지. 나를 떠났던 네가 조금 긴 시간이 지나 어린아이가 되어서 내 눈 앞에 나타났을 때는. 그 날도 여름날이었다. 막 네 살이 되었다고 했었나. 폐허가 되어버린 곳에, 회색 마을에, 노란 옷을 입은 어린 네가 한 아름 꽃을 안고 서 있었다. 꽃을 심으러 왔다고 했다. 과거, 민간인 사망자 제로라는 기적을 일으키고 홀로 떠나버린 한 히어로를 기리는 꽃을. 너를 기리기 위해 어린 네가 꽃을 피우러 왔노라고.
비가 왔었나. 어린 너의 목소리가 들리던 세상은 뿌연 회색이었다.
사실, 나는 그 때 내 기다림이 끝난 줄 알았어. 나는 너를 기다렸고, 너는 약속대로 나를 찾아와 주었으니까. 나에 대한 건 까맣게 잊어버린 어린 너였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지. 멈춰버린 내 시간이 다시 흘러갈 거라고 생각했어. 너와 함께 흘러갈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지. 다시 만난 네가 너무 어렸으니까, 네가 어른이 될 때까지 조금만 더 있다가 내 시간이 너와 함께 흘러갔으면 좋겠다고, 태평하게도 그런 걸 바랐었어. 그런 걸, 바랐었다.
다시 만난 네가, 또 다시 어른이 되기 전에 스러져버리는 그 순간까지도.
처음에 네가 떠났을 때, 너는 열아홉 살이었다. 나는 스무 살. 너보다 생일이 조금 빠른 내가, 너보다 조금 더 일찍 어른이 되었었다. 그리고 네가 어서 나와 같은 선상에 서기를, 함께 어른이 되기를 기다렸었지. 그 기다림이 이렇게나 길어질 줄 알았을까. 그 기다림이 이렇게나 지독할 줄, 상상이라도 했을까.
어째서일까.
나는 여태껏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너를 만났지만 그 어떤 너도 어른이 되지 못한 채 나를 떠나갔다. 처음처럼 열아홉 살에 떠날 때도 있었고 보다 더 일찍 떠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떠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너는 늘 스무 살이 되지 못하고 떠났다. 나는 스무 살에서 멈춰, 이토록 너를 기다리고 있는데.
원망 하냐고? 물론.
수도 없이 나를 떠나가 버린 너를 원망했다. 수도 없이 너를 빼앗아간 이 세상을 원망했다. 수도 없이, 등신처럼 멈춰 서서 너를 기다리는 것 밖에 못하는 나를 원망했다. 너를 구하지 못한 나를 원망했다. 너를 홀로 떠나게 해 버린 나를 원망했어. 어떻게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어.
원망하고, 갈망하다, 미쳐버릴 뻔 한 적도 있었지.
너를 떠나보내지 않기 위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결국 너는 늘 떠나버리니까, 내게 온다고 약속했으면서 네가 오지를 않으니까. 초조하고, 불안하고, 괴로워서. 더 이상 널 떠나보낼 자신이 없어서. 차라리 미쳐버리고 싶어서.
어린 널 꽉 끌어안은 채 놓지 않았던 적이 있었어. 어린 널 내 눈 밖으로 절대 보내지 않았던 적이 있었지. 차라리 너를 꽁꽁 얼려버려 내 곁에만 둔다면, 더 이상 너를 잃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미친 생각에 어린 너를 얼려버리려 했던 적도 있었다. 정말로 하려고 했었어. 그 때의 네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더라면, 나는 정말로 너를 얼려버렸을 거야. 그 때 비가 왔었던가.
뿌옇게 변해버린 세상에서, 얼어붙은 손으로 내 얼굴을 닦아주던 네 모습은 아직도 뚜렷하다.
그 때 이후로 나는 어린 너에게 내 이름을 가르쳐주는 걸 그만두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만큼 성장한 너를 본 것도 그 때가 마지막이었지. 너를 기다리는 것을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어. 다만, 네가 어른이 되어가는 것을 보는 것은 그만두었다. 나와 같은 어른이 되지 못할 걸 알아서, 죽고 싶을 만큼 잘 알아서, 그래서 그만두었다.
그런데, 미도리야. 참 이상하지.
나는 너를 찾아 헤매이는 것을 그만두었는데, 너는 끊임없이 나를 찾아왔다. 어린 너는 언제나 스스로 내게 왔다. 막 네 살이 되었다고 했었나. 너를 닮은 여름날에, 어린 너는 언제나 홀로 내 앞에 나타났었다. 그리고는 떠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지. 아무리 약속을 되풀이해도, 너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잘 모르겠어. 네가 이전과 같이 어른이 되지 못하고 떠나버렸는지, 아니면 어른이 되었는데 나를 잊어버린 건지. 어른이 되어가는 너를 보는 것을 관두고 너를 잃은 숲 속에만 틀어박혀버린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전자라고 생각했다. 후자인 것은 싫었다. 어른이 된다면, 어른이 되기만 한다면, 그 선만 넘을 수 있다면 네가 나를 기억해 내 줄 거라고. 이 토할 것 같이 지독한 기다림이 끝날 거라고, 그렇게 믿었다.
언제였더라. 내가 너를 기다리는 이곳이 녹색 숲이라고 불린다는 말을 들었다. 나를 찾아온 몇 번째인지 모를 어린 너에게 들었다. 일 년 내내, 가을이 와도 겨울이 와도 계속 녹색이라고. 그래서 녹색 숲이라고 부른다고. 그리고 녹색 숲 안에는 괴물이 살고 있다고.
그 말을 듣고 웃음이 나올 뻔 한 것을 간신히 참았었지.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괴물이었다. 죽지도, 나이를 먹지도 않는. 오직 너만을 기다리는.
무너진 콘크리트가 철거되고 너를 기리는 많은 사람이 피워낸 꽃과 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룰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그 울창한 숲이 나를 닮아 너를 닮은 녹색에서 멈춰버린 것은 또 언제였는지. 숲 앞에 마을이 생긴 것은 언제였더라. 그곳에서 태어난 어린 네가 네 살이 되면 마치 관례처럼 홀로 나를 찾아오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지? 내가 괴물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나와 약속을 하고 숲을 등진 네가 결국은 어른이 되지 못하고 죽어버린 것 때문이라는 것은 안 것은, 대체 언제였는지.
네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네가 와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바람때문이었을까. 어린 너는 계속 숲을 찾아왔고, 어른이 되지 못한 너는 내게 돌아오지 못했다.
오늘은 유독 날씨가 좋아 밖으로 나왔다. 따스한 햇살이 녹색 숲을 적시는 모습이 너의 상냥함을 닮아서, 그래서 밖으로 나왔다. 언젠가의 어린 네가 나의 열상자국을 보고 겁을 먹어버린 후로 습관처럼 깊게 눌러쓰고 있던 갑갑한 후드도 벗어버리고, 오랜만에 너의 상냥함을 맞았다. 눈이 부셨지만, 그래서 더욱 너와 같아서.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문득 이번의 어린 네가 떠올랐다.
안녕, 녹색 숲의 요정님.
어울리지도 않게 나를 그렇게 불렀었다. 그 전 번의 어린 네가 나를 보고 괴물님이라고 불렀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그 어린 네가 숲을 등진 지도 십 육년인가. 어차피 의미가 없어 시계는 두지 않지만 달력은 두고 있어 알았다. 날짜대로라면, 떠나버리지 않았다면 딱 이쯤.
저가 사는 마을에서 괴물이라고 불릴 나인데도 무서워하기는커녕 예쁘다며 배시시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번의 어린 너는 내가 기다리는 너와 유독 닮아있었다. 엉망진창으로 엉엉 울면서도 울고 있지도 않은 내 얼굴을 닦아주던 상냥함도, 내 손을 잡고 몇 번이고 다시 나를 찾아오겠다고 말하던 단호함도. 그 조그마한 입으로 자신의 죽음을 말하면서도, 그 원흉일 터인 나를 조금도 두려워 않던 강함도. 이번의 어린 너는, 정말로 너를 많이 닮아있었다.
너는 어른이 되었을까. 아니면 또다시 떠나버렸을까.
몇 번이고 찾아오겠다던 어린 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뻔 한 것을 어떻게 참았는지 모른다. 시린 가슴에 닿아오던 따뜻하고 작은 너를 어떻게 놓을 수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아. 그동안 만나왔던 어린 너 중에서도 가장, 가장 네 모습이 짙던 그 아이를 어떻게 보낼 수 있었는지.
미도리야.
그 아이는 너 일까. 나의 너일까.
이번에야말로 살아서, 내게 돌아와 주는 걸까. 이번에야말로 이 지독한 그리움에서 나를 구원해 주는 걸까.
수 십, 수백 번도 더 하고 더 잃었던 기대였다. 간절한 바람이었다. 어쩔 수 없잖아. 너인걸. 나를 구원해 준, 나를 구원해 줄 단 하나뿐인 너인걸. 내가 어떻게 너를 기다리지 않을 수 있겠어. 내가 어떻게 너를 포기해. 미도리야. 미도리야.
말라버린 눈에서는 더 이상 눈물도 흐르지 않아, 그저 텅 빈 허공을 보며 조용히 불렀다. 이제껏 수도 없이, 하루도 빠짐없이 부른 이름이었다. 언제나처럼 그늘진 수풀 속으로 사라져 버릴 이름이었다. 부는 바람소리에, 새소리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에 묻혀 오늘도 사라져 버릴 부름이었다.
구름이 걷히며 그림자가 물러가는 것이 보였다. 너의 상냥함을 닮은 햇살이, 다시금 너를 닮은 녹색 숲을 적시는 것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 때,
"안녕, 녹색 숲의 요정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소리가 멈췄다. 새소리도 그쳤다. 시끄럽게 귀를 때리던 나뭇잎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귀가 아닌 머리에, 아니, 가슴에 울리는 목소리. 낯익은 목소리였다. 낯선 목소리였다. 가슴이 저릴 정도로 그리운, 그런.
바람이 불었다. 어여쁜 다홍치마 너울거리고 그 아래 고운 꽃신이 단단한 나무 바닥을 디뎠다. 한 발짝, 두 발짝. 셀 수 없이 많은 발짝. 보드라운 비단자락 아래로 빠끔히 드러난 고운 꽃신 무색하게도 미도리야 이즈쿠는 뜀박질과도 닮은 종종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비."
귀한 소리가 들려왔다. 서늘한 듯 다정한 온기를 품은 목소리가 미도리야의 뒤를 쫒으며 그녀를 불렀다. 보드라운 비단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고귀한 발걸음이 미도리야가 지나간 바닥 길을 그대로 그리며 따라가고 있었다. 미도리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되려 더욱 다급해진 걸음이, 뒤에서 그녀를 쫒아가고 있는 이의 눈에 고꾸라지기라도 하면 어쩌나하는 걱정을 일게 할 뿐이었다.
"비."
다시 한 번.
잔잔한 목소리가 너른 복도를 울렸다. 허나 돌아오는 소리는 그가 애정해 마지않는 어여쁜 목소리가 아닌 바람결에 스치는 푸른 나무의 소리여서. 한참을 그 뒤를 쫒던 토도로키 쇼토의 입가에 옅은 한숨이 맺혀, 이내 나무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쳤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부름이었다. 익애하는 이를 부르는 일이야 얼마든지 기꺼워하겠지마는, 돌아오는 것이 없는 부름을 반복하는 것은 제 성미와는 그리 맞지 않았다. 저를 향하여진 등이 그녀답지도 않게 매몰차기까지 한 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토도로키는 미도리야를 쫒던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다물렸던 입술이 열리며 또 한 번, 제 앞을 가는 이를 부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즈쿠."
너울거리던 치맛자락이 가라앉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다정함을 함빡 묻힌 귀한 이의 목소리는 푸른 나무의 목소리를 넘어 바람결을 따라. 미도리야는 제 귓가에 방울지는 부름에 재촉하던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걸음 내내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저 결 좋은 나무 바닥만을 바라보던 시선이 천천히 앞을 향했다. 어여쁜 다홍치마가 다시 한 번 작게 넘실거렸다. 그제야 마주하게 된 얼굴에, 만난 시선에, 토도로키는 맺혀있던 한숨의 흔적을 감쪽같이 지우곤 입가를 옅게 휘며 미소 지었다.
"치사하십니다."
입술을 꾹 물며 잘 익은 홍시마냥 붉게 물든 얼굴로, 미도리야는 그리 말하였다. 감히 그 귀한 부름을 몇 번이고 외면하는, 다른 이가 보았더라면 경을 치고도 남을 죄를 무릅쓰면서까지 피하고자 했던 것을. 그리도 다정하게, 그리도 사랑스럽다는 듯 제 이름을 불러온다면, 어찌 감히 그녀가 그를 향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무어에 그리 뿔이 난 건지, 언질조차 아니 준채 나를 등지고 가버린 그대가 먼저 치사하였습니다."
"그건..!"
담담하게, 조금은 짓궂게. 미소어린 다정한 얼굴로 그리 말하는 토도로키를 보며 미도리야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가 이내 무언가에 생각이 미친 것인지 도로 입술을 꾹 물며 말을 삼켰다. 어여쁜 치맛자락이 애꿎게도 자그마한 두 손에 꽈악 움켜쥐어져 짙은 주름을 만들어냈다. 조금 전보다 더욱 붉어져버린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런 미도리야의 귀여운 행동거지에 토도로키의 입가에 머물러 있던 미소가 자그마한 웃음꽃을 피워냈다.
손등으로 살며시 가린 입술에서 옅은 웃음꽃 향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귀한 향에 미도리야의 시선은 더욱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지만, 그마저도 사랑스러워 토도로키는 부러 웃음을 거둘 생각은 하지 않았다. 조금 전의 그녀가 지금과 같은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것이 문득 뇌리에 떠올랐다. 아하.
"싫으셨습니까."
"싫지 않았습..!....앗..! 아니, 아니.. 그게 아니오라..."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튀어나와버린 목소리에 미도리야는 당황했다. 무심코 점잖지 못한 대답을 해 버린 것에 대한 자책인지, 한식경도 채 지나지 않은 일을 떠올린 부끄러움 때문인지. 치맛자락 꼭 쥐던 자그마한 손을 제 입술 위에 포개어 누르며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 결국 고개를 푹 숙여버리는 미도리야의 얼굴은, 이제는 잘 익은 홍시가 아닌 무르익은 산딸기와 같은 빛깔을 띠고 있었다. 울먹이듯 옹알거리는 목소리가 겨우 말을 이었다.
"싫지.. 않았습니다.. 허나..! 이리도 밝은 시각에.. 그리도 트인 곳에서...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이곳은 나의 궁입니다. 내 집에서, 내가, 내 사람에게 입을 맞춘 것이니. 누가 본들 무어 어떻겠습니까."
겨우겨우 끝마친 말에 냉큼 돌아온 토도로키의 대답에, 미도리야는 제 얼굴에 당장이라도 터져버리는 건 아닐까 할 정도로 열이 몰리는 것을 느꼈다. 단정한 얼굴로, 덤덤한 목소리로. 그 귀한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너무나도 당당하고 또 낯 뜨거운 것이어서. 미도리야는 포개어진 손아래의 제 입술이 유독 뜨겁다는 것을 손가락에 달구는 열기로 알아야만 했다. 앙다문 입술을 열기라도 하면, 입을 눌러 막고 있는 두 손을 치우기라도 하면 당장이라도 쏟아져 나올 듯 심장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새하얘진 머릿속을 서서히 뒤덮어가는 것은 그 순간의 감각이었다. 하늘거리며 불어오는 산뜻한 바람. 제 뺨을 스치며 흩날리는 색색의 고운 꽃잎, 푸른 잎사귀. 따사로운 햇살에 젖어, 눈앞의 파릇한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겨. 그저 바보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제 손을 감싸오던 커다란 손의 감촉이 생생했다. 뭇 여인네들처럼 곱지도 어여쁘지도 않은 미운 손을 마치 천하에 가장 귀한 보석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레 감싸 쥐고, 고귀한 목소리로 낮게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이즈쿠.
가까워지는 사내의 얼굴은 여즉 보아왔던 그 어떤 이보다 아름다웠고, 짧게 맞닿았던 입술은 너무나도 따스하고 또 감미로왔어서.
잠시 활짝 피었던 웃음꽃을 지운 채 그 잔향만을 입가에 두르고, 마치 그 순간처럼 제게 가까워지는 사내의 다정한 시선에 그만 잔뜩 긴장하여 곧추서있던 어깨에 힘이 빠지고 말았다. 점잖은 얼굴로 때때로 말을 가리지 않는 그의 언사 역시 치사하다면 치사하였으나, 저를 바라보는 한없이 다정한 그 시선은 정말이지 미도리야로서는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 순간 그 정원에서처럼. 흉하기만 한 오른손을 단단한 왼손이 감싸 쥐었다.
"...아랫것들이 흉을 봅니다."
고개는 들었을 지언정 붉어진 시선만큼은 여전히 허공에 돌리고, 입술을 삐죽이며 볼멘소리를 한 것은 미도리야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항의였다. 이 역시 혹여 다른 이가 보았더라면 경을 치고도 남을 무례함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지금 이곳 있는 이는 당사자인 미도리야와 그런 미도리야의 투정마저 사랑스러운 그녀의 부군뿐이었다. 미도리야의 당돌한 행동에 토도로키의 입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겁을 집어먹은 조막만한 토끼처럼 어깨를 한껏 움츠린 채 시선을 낮추는 미도리야도 귀엽기는 하였으나, 그보다 더, 토도로키는 제 앞에서 당당한 저의 비를 사랑하였다.
겁먹어 몸을 옹송그리고, 눈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하여 늘 갈 곳을 잃은 채 배회하는 시선이 똑바로 자신을 향하는 순간이 있었다. 여름날, 햇살에 젖은 숲이 드리우는 짙은 녹음을 그대로 옮겨와 박아 넣은 것만 같은 커다란 눈동자가, 두려움도 움츠림도 없이 선명히 빛나며 오롯이 자신만을 담는 순간. 고 조막만한 입술이 그 어떤 압박에도 결코 굽어지지 않는 그녀의 굳센 마음을, 그녀의 강인한 본성을 내뱉는 순간이, 그 어떤 값진 보석보다 귀하고 그 어떤 미물보다 어여쁘다고.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기에.
그러니 서글프게도 자신을 한없이 높은 존재로만 여겨 스스로를 곧잘 낮추어버리고 마는 미도리야가 간혹 가다 보여주는 당돌함이 어찌 기껍지 않을 수 있을까.
가슴을 가득 메우는 사랑스러움에 눈가가 절로 느슨해짐을 느끼며, 토도로키는 어여쁜 손을 감싸 쥔 제 손에 조금 아주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대의 흉을 보는 이는 나의 궁에 없습니다."
나지막이 울리는 부드러운 음성이 미도리야의 귓가를 간질였다. 불만을 토로하며 애써 애먼 곳을 향하던 시선이 천천히, 토도로키를 향했다. 숨 막힐 정도로 다정한 시선이 미도리야에게 닿아오고 있었다. 미도리야는 도로 제 입술을 물 수밖에 없었다. 흉한 손을 귀하게 감싸는 온기가 너무도 따스하여, 이미 미도리야의 눈가에는 물기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애초에 서로가 원해서 한, 그런 꿈같은 혼약이 아니었다. 꿈을 꾸기에는 그는 너무도 귀한 사람이었고, 저는 너무도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다.
강대국과의 전쟁을 피하고자 자국의 공주를 그 나라 황자의 측비따위로 바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말이 평화협정으로 맺어진 혼약이지 실상을 보면 볼모나 다름이 없는 신분. 심지어 미도리야는 본국의 공주조차 아니었다. 제 나라의 공주를 볼모로 보낼 수가 없어, 그 대용품으로 택하여진 왕의 멀고 먼 친척. 고귀한 피가 제대로 흐르고 있는지조차 가물할 정도로 먼 사촌의 아이. 그것이 미도리야 이즈쿠였다.
제 아무리 멀고멀다고는 하나 왕족의 핏줄은 핏줄이니 구실로는 알맞았다. 어린나이에 아비를 여의고 현왕의 손에 어미와 함께 거두어져, 마침 또래의 왕자와 함께 공부를 하며 자랐으니 구색도 얼추 갖춘 편. 어차피 볼모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인 혼약에 그 직위도 정비가 아닌 측비였으니, 상대편에서도 미도리야의 출신을 구태여 문제 삼지는 않았다. 딱 적당한 제물이었다. 여차할 때, 얼마든지 잘라버릴 수 있는.
본국에서의 취급이 이러 할진데 타국에서는 어떠할까. 형식뿐인 혼약을 올리고, 초야에서조차 소박을 맞고. 처음 마주하였을 때의 제 부군은 분명 눈이 멀어버리는 건 아닌가 할 정도로 아름다운 사내였지만, 동시에 그 왼쪽 얼굴을 뒤덮고 있는 화상자욱 만큼이나 아린 사내였었다. 그것이 이리도 다정스럽게 변한 것은 대체 언제부터였는지.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줄곧 품어왔던 의문을 조심스레 입에 담았다. 잡히지 않은 쪽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상하십니다.. 어찌, 어찌 저같이 보잘 것 없는 것을..."
"나의 궁에, 감히 그대를 보잘것없다 여기는 이가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단호한 울림이 채 끝마치지도 못한 의문을 잘랐다. 허나 단호한 어투와는 상반되게도 닿는 귓가를 녹일 만치 부드러운 음색에, 단 한순간도 자신을 향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다정한 눈길에. 미도리야는 눈가를 적시는 물기를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그가 싫어할 것을 빤히 암에도 불구하고 제 입술이 붉어질 정도로 아랫입술을 악물어 견딜 수밖에 없었다.
본국에서조차 등진 이름뿐인 왕족. 아무런 가치조차 없는 헌신짝. 측비라 하여도 무엇 하나 내세울만한 것이 없어, 그저 그의 곁에 서는 것만으로도 덜컥 겁이 나 버리는 비천한 여인네였다. 그렇다고 외모가 곱기라도 한가. 박색은 아닐지언정 그의 옆에 서서 붉은 연지 바르고 해사한 웃음 터트리는 다른 고운 여인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볼품없어, 거울을 볼 적마다 미도리야는 한 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야 말았더랬다. 그랬었는데.
"곱지도 않습니다.."
"이상한 소리를 하십니다. 나는 여즉, 그대만큼 고운 이를 보지 못하였는데."
스러지지 않는 부드러운 미소 그대로. 감싸 쥔 고운 손을 더욱 힘주어 잡으며 토도로키는 오른손을 들어 미도리야의 왼뺨을 어루만졌다. 보드라운 살결이 품은 상냥한 온기가 되려 제 서늘한 손을 데우는 듯 한 기분에 토도로키의 눈가가 절로 부드러이 휘었졌다.
쉬이 젖어 들어가 종종 난감할 때도 있지만 어여쁘기 그지없는 눈이었다. 그 녹빛 언저리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쓸어내리고, 여즉 악물고 있는 입술을 작은 불만을 담은 엄지손가락 끝으로 장난스러이 톡톡. 그러자 미도리야의 얼굴에는 삽시간에 붉은 열꽃을 피어올랐다. 그 모습이 얼마나 어여쁜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시원한 웃음꽃을 피워내며, 토도로키는 저의 사랑스러운 사람에게 전하였다.
"나의 천하에서, 그대가 가장 고운 사람입니다."
간단한 설정을 정리해보자면..
-강대국의 황자 토도로키와 약소..는 아니고 중소쯤 되는 왕국 왕의 머어어어어어언 친척인 데쿠양이 일종의 비즈니스 결혼(...)을 했다가 서로 폴인럽 한 후의 이야기입니다.
-처음 데쿠양이 측비로 들어왔을 때, 토도로키군은 무관심했었습니다. 첫날밤도 소박 맞혔습니다. 훗날 엄청 후회합니다.(토도로키's 후회록 best3 중 하나)
-토도로키군이 폴인럽 하게 된 계기는 원작처럼.. 토도로키군이 오랜 시간 품어왔던 증오를 데쿠양이 산산히 깨부워버리는 조금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때의 상처로 이곳 데쿠양도 오른손이 일그러져있는...
-데쿠양이 본국에 있었을 때 함께 어린시절을 보내며 공부를 한 소꿉동무 왕자는 당연히....
걱정을 담뿍 묻힌 채 몽롱한 머릿속을 헤집는 목소리에 대답을 할 기운도 나지 않아,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제대로 위아래로 움직였는지 아니면 저도 모르게 양 옆으로 흔들었는지, 마치 달궈진 아스팔트 위의 풍경마냥 이지러져 보이는 눈앞에서 미도리야가 더욱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다.
괜찮아.
그렇게 말할 요량으로 입을 열었다가, 나오는 것이 고구마라도 익힐 수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뜨겁게 달궈진 숨이라는 것을 깨닫곤 도로 입을 다물었다. 이런 숨을 뱉으며 괜찮다느니 하는 소리를 해봤자 눈앞의 상냥한 친우를 더 걱정시킬 뿐이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유리알이라도 되는 양 커다란 눈망울이 걱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젖어 들어가는 모습은, 지금으로서는 그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핑 돌았다. 차라리 빨리 눈앞에서 사라져줬으면 싶었다.
차마 그 솔직한 심정을 말로 하지는 못하고, 그럼에도 더 이상의 시선은 견딜 수가 없어서 물을 듬뿍 먹은 솜이라도 되는 양 무겁기 짝이 없는 손을 들었다. 눈앞에서 종종거리는 몸뚱이에 대고 힘을 주었지만, 역시 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연약한 손짓을, 그 안에 담긴 뜻을 눈이 좋은 미도리야가 놓칠 리는 없어서. 평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없다는 사실에 공연히 더 걱정은 끼쳤을 지언정 미도리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도 이내 몸을 돌려주었다.
"그럼... 난 먼저 교실로 갈 테니까. 푹 쉬어, 토도로키군..!"
대답할 기운조차 나지 않아, 대신 베개에 뉘인 머리를 바로하고 눈을 감았다. 커튼을 치는 소리와 함께 눈꺼풀을 때리던 햇살이 사그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리커버리 걸과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 얇은 커튼 너머로 미도리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장가처럼 잔잔하게 들리는 그 목소리에 취하듯, 그렇지 않아도 몽롱하던 의식이 점점 가라앉아갔다. 목소리가 멀어졌다. 드르륵 하며 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히는 소리가 어딘가 다른 세계의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을 즈음에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다행이다, 라고.
컨디션 난조를 눈치 챈 것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부터였다. 나른하게 눌리듯 무거운 몸이 매트리스에 달라붙어 일으켜지는 것을 거부했을 때에는 잠시 병결을 고민했을 정도로, 오늘 몸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기적거리며 교복으로 갈아입고, 입맛이 없어 아침도 거른 채 등교를 택한 것은 순전히 고집이었다. 고작 이정도 컨디션 난조 따위에 질까보냐, 하는. 결론은 참패였다.
교실에 도착해 자리에 앉기까지의 여정이 평소보다 몇 배는 길고 힘겨웠던 것 까지는 충분히 견딜 수 있는 범위였다고 생각한다. 인사를 건네 오는 급우들에게 어눌하게 인사를 되돌려주며 자리에 앉아, 사실 그 후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뭉툭하게 깎아 낸 몽둥이로 뇌를 비비는 듯이 머릿속이 무겁게 울렸고, 고막을 울리는 모든 것은 주물러진 밀가루 반죽처럼 뭉그러져 있었다. 눈앞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는 것이 아득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이지러진 시야 안에 한 가지.
오직 한 가지만이 뚜렷했다.
녹음이 내린 숲에 하얗게 드리워진 빛줄기처럼. 더운 햇살에 더욱 하얗게 물든 가는 목이 선명했음을 기억한다.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맑은 이슬 같은 땀방울. 그것을 닦아내는 상처투성이의 울퉁불퉁한 오른손. 제대로 닦이지 않은 채 빛을 받아 도리어 반짝거리는 목으로 다시 한 방울. 가는 목선을 그대로 타고 내려가 하얀 옷깃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버리는 땀방울이 마치 여인내의 요염한 손짓과 닮아있어서. 늘 왼쪽만을 뒤덮던 열이 전신으로 퍼져가는 것을 느꼈었다.
저 목을 쥐어, 끌어당겨, 입술을 묻고, 젖은 혀로 핥아낸다면. 단맛이 날 것 같았다. 그 어떤 설탕과자보다 황홀한 단 맛이 혀끝에 맴도는 듯 한 착각에 갈증이 일었다. 좀 더, 좀 더.
단정치 못하게 구겨진 하얀 옷깃을 잡아당겨 끌러 내리면 제법 단단한 어깨가 드러날까. 동그스름하게 각이 진 어깨에 입을 맞추며 옷가지를 마저 끌러 내리면, 어여쁜 목이 잘게 떨릴까.
자신의 것보다 작지만 부드럽지만은 않을 등에 손을 얹고, 형태를 살피듯 윤곽을 그리듯 더듬어 내려가는 상상을 한다. 단단하게 잘 다져진 등줄기를 지나 아래로, 오목하게 들어간 가는 허리를 지나 더 아래로. 봉긋하게 솟은 두 언덕 사이에, 그 입구 즈음에 걸리는 단단한 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면 어떤 얼굴을 할까. 잘 익은 홍시처럼 붉게 물든 얼굴로 고운 등을 가녀리게 떨까. 부끄러움이 넘치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를까. 입가가 비실비실 올라 가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동그스름한 뼈마디에서 더 내려가지 않고 도로 올라가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아쉬운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보다 더. 두 손가락으로 기어가듯 올라가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에서 손가락 끝으로 원을 그리면 간지럽다며 바르작거릴 것 같았다. 허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 허리에 손가락을 대고, 손바닥을 대고, 조금 힘을 주어 누르면, 아아, 무섭다고 울먹이며 떨지도 몰라.
달래어 주어야할까. 등줄기에 솟은 자그마한 굴곡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며 알사탕 굴리듯 혀로 얼러주면, 강압적으로 누르던 손에 힘을 풀고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면, 울먹이던 그 어여쁜 목소리에 달뜬 숨을 섞어 이름을 불러주면 좋을 텐데.
열에 취해 몽롱해진 의식 너머로 뭉그러진 소리와 함께 다급하게 손이 내밀어 진 것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자신을 잡아 일으키던 손의 온도가 뜨거웠는지, 차가웠는지, 닿은 부분에 녹아버릴 정도로 열이 몰려 그 손길의 감각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뜨거웠고, 또 뜨거웠다.
보건실로 옮겨지는 동안 그가 무언가 말을 했지만, 제대로 알아들은 것은 거의 없었다. 고막을 울리는 소리는 너무 멀었고, 붕 뜬 시야 안에서 선명한 것은 오물거리며 숨과 말을 뱉어내는 작은 입술뿐이었다. 그리고 그걸 인식한 순간.
위험하다, 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온몸은 뜨거웠고, 머리는 더 뜨거웠다. 목이 말랐다. 조금, 호흡이 힘들기도 했다. 시야는 이지러지는 걸 넘어 뿌옇게 변해가고 있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 입술만은 너무나도 또렷해서. 당장이라도 잡아당겨 제 입술을 겹치고 싶은 충동이 목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닿고 싶었다. 만지고 싶었다. 손끝이 달달 떨리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눈앞에서 흔들거리는 그를 밀어낸 것은 충동에 먹혀가던 이성의 남은 한 조각이 이루어낸 쾌거였다. 그대로였다면. 그대로 조금만 더, 제 눈앞에 그가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아아.
머리가 아팠다. 몸이 뜨거웠다. 늘 왼쪽만을 태우던 불꽃이 뇌를 녹여버리기라도 한 듯 눅진하게 의식을 뒤덮는 열기에 목이 말라왔다. 머릿속 한 구석에 조용히 몸을 구기고 있던 것이 의식을 온통 먹어버리는 것을, 막을 이성이 남아있지 않았다.
팔을 들어 감긴 두 눈을 꾹 눌렀다. 잠들지 않으려 흉포하게 날뛰는 의식을 약기운과 함께 몰려온 수마 아래로 억지로 밀어 넣으며 수면이라는 막을 드리웠다. 천천히, 천천히. 잠겨 들어가는 의식 너머로 한 사람의 형상이 흐려지고 있었다. 몸을 달구는 열은 가시지 않았다. 열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