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일본식의 나이를 세는 법(생일이 지나야 한 살 먹음)을 따랐으나 토도로키가 빠른 생일이 아니라는 가정하에 썼습니다. 즉, 소설 안에서는 토도로키가 데쿠군보다 6개월 정도 먼저 태어난 아주 조금 형입니다.
있잖아, 알고 있어?
저어기 마을 뒤에 있는 녹색 숲에는 말이야.
무서운 괴물이 살고 있대.
괴물을 만나면
어른이 되지 못하고 죽어버린대.
무서운 무서운 괴물이래.
그러니까,
절대 혼자서 그곳에 가면 안 돼. 알겠지?
태어난 지 4년 하고도 아주 조금. 늘 어른들이 제게 들려준 말입니다. 옛날이야기인지 노랫말인지.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그냥 이야기 말인 것 같은 그 말은, 딱히 외우려 한 적이 없는데도 이제는 그냥 술술 불러집니다.
그래서 일까요. 저는 옛날부터 제가 사는 마을 뒤에 있는 녹색 숲이 무서웠습니다. 캇쨩은 그런 말 따위 어른들이 다 꾸며낸 말이라고 했고 다른 친구들도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녹색 숲에 가서 놀고는 하지만, 그래도 저는 무서웠습니다.
녹색 숲은 일 년 내내 녹색입니다. 가을이 와도, 겨울이 와도, 다른 곳은 다 색깔이 변하는데 녹색 숲은 늘 녹색입니다. 계속 계속 녹색입니다. 그래서 녹색 숲이라고, 엄마가 말해줬지만 왜 그런지는 엄마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 모든 걸 알고 있는 엄마가 모른다고 했어요. 고개를 갸웃하면서 이상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상했습니다.
녹색 숲에는 사람이 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마을에서만 살고 녹색 숲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괴물이 나오니까 살 수 없는 걸까요. 무서웠습니다.
언제나 녹색이고 사람이 살지 않는 녹색 숲. 어렸을 때부터, 지금도 어리지만 더 어렸을 때부터, 저는 그곳이 싫었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아팠습니다. 녹색 숲을 보면 왼쪽 가슴이 따끔따끔 아파 와서, 그래서 녹색 숲이 무서웠습니다. 절대로 녹색 숲 가까이에는 가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요.
주변이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 여름인데, 낮에는 그렇게 더웠는데 지금은 어째서 이렇게 추운 걸까요. 바람이 차가워서 몸이 부르르 떨렸습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지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가 않습니다. 큰소리로 캇쨩을 불러 봐도 돌아오는 소리는 없습니다. 아니, 풀벌레 소리가 조금 들리는 것 같습니다. 더 무섭습니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요. 저는 그냥 캇쨩을 따라왔을 뿐인데. 숨바꼭질을 하자며 녹색 숲으로 가던 캇쨩을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을까요. 하지만 숨바꼭질은 하고 싶었습니다. 녹색 숲은 무서웠지만, 모두와 같이 숨바꼭질이 하고 싶었습니다. 열심히 했습니다. 너무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계속 계속 술래만 하다가 겨우 숨을 있게 되어서, 신이 나서. 절대로 들키지 말고 끝까지 숨어있어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달렸던 게 잘못이었을까요. 한참을 달린 다음에 커다란 수풀 사이에 꾸역꾸역 들어가 몸을 숨겼던 게 잘못이었을까요. 저는 끝까지 들키지 않고 숨는데 성공했습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가, 그러다가 추워서 다시 일어날 때까지도 들키지 않고 숨는데 성공해버렸습니다. 어떡하죠.
잠깐 잠들었을 뿐인데 밤이 되어버린 건지 주변이 어두워서 무섭습니다. 바람 소리가 무섭습니다. 풀벌레 소리는 더 무섭습니다. 나뭇잎 소리는 더 더 무섭습니다. 어떡하죠. 어떡해야 할까요. 큰소리로 캇쨩을 불러보고, 다른 친구들을 불러보고, 엄마도 불러봤지만 아무도 저를 찾으러 와 주지 않습니다. 어떡하죠. 숲에서 나가려고 있는 힘껏 달려봤지만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여기는 어딘가요. 무섭습니다. 앗, 넘어져버렸습니다. 아파요. 여기는 어디죠? 아파. 엄마, 엄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바람소리가 멈췄습니다. 풀벌레도 이제는 안 웁니다. 나뭇잎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목소리만 들렸습니다. 귀가 아니라 머리에, 아니, 가슴에 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찾고 부르던 엄마는 아니었습니다. 캇쨩도 아니었습니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습니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왜 그리울까요. 누군가 왼쪽 가슴을 꾹꾹 누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넘어져서 아파서, 그래서 인걸까요.
그 사람의 손이 제 팔에 닿았습니다. 끌어당겨져 일으켜졌습니다. 눈이 마주쳤습니다.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있잖아, 요정님."
"요정 아닌데."
낮게 울리는 기분 좋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요정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꾹 눌러 쓴 후드 때문에 그림자가 져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요정님 품 안에서 올려다보는 거라 처음보다는 훨씬 잘 보였습니다. 멋진 얼굴이 보였습니다. 예쁜 눈이 보였습니다. 제가 그렇게 가만히 얼굴을 보고 있자, 요정님이 살짝 고개를 숙여 저와 눈을 마주쳐 주었습니다. 우와. 예쁜 눈이 눈 앞 한 가득입니다.
"으응, 요정님이야."
요정님은 자신이 요정이 아니라고 했지만, 역시 요정님은 요정님입니다. 그야, 저는 여태 이렇게 예쁜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걸요. 아! 물론 저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제일 예쁘지만! 그렇지만, 이렇게 예쁘고 멋있고.. 또 아픈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입니다. 캇쨩도 분명 멋있지만 요정님과는 조금 다릅니다. 요정님은 어른이고, 캇쨩은 쟤 또래이고, 그런 차이가 아니라 뭔가, 음, 보고 있을 때의 느낌이 다릅니다. 요정님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꾹꾹 눌리는 기분이 들지만 캇쨩을 보고 있을 때는 전혀 그렇지 않은걸요. 요정님은 계속 계속 보고 싶지만, 캇쨩은 그렇지 않은걸요. 앗, 이건 캇쨩이 보기 싫다는 게 아닙니다. 캇쨩은 조금 난폭하지만 좋은 친구니까요. 그러니까 쉿, 쉿.
아무튼, 요정님은 예쁩니다. 눈이 정말로 예쁩니다. 얼굴이 굉장히 멋있어요. 그리고 정말 정말 착합니다.
처음 요정님을 봤을 때, 저도 모르게 엉엉 울음이 터져버렸지만 요정님은 그런 저를 보고 캇쨩처럼 화 내지 않았습니다. 긴 팔을 뻗어서 저를 꼬옥 안아주었습니다. 등을 토닥여 주었습니다. 계속 추웠는데, 요정님의 품 안은 너무 따뜻해서, 그만 더 더 크게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정님이 더 꼬옥, 저를 안아주었습니다.
엄마는 늘 처음 보는 사람은 절대로 따라가면 안 된다고 그랬습니다. 캇쨩네 아주머니도 그랬고, 캇쨩도 낯선 사람 따라가거나 하는 건 얼뜨기나 하는 짓이라고 그랬습니다. 하지만 괜찮겠죠. 이 사람은 사람이 아닌 요정님인걸요. 예쁘고 멋있고 상냥한 요정님인걸요. 무엇보다, 제 손을 놓는 요정님의 표정이 너무 아파서 제가 떨어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겨우 눈물이 멈추고 깜짝 놀라서 요정님의 품 안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을 때, 요정님은 아무 말 없이 제게 뻗었던 팔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그 표정이, 그 눈이, 너무 아파서. 가슴이 쿡쿡 아파 와서. 낯선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는 엄마의 말도 다 잊고 제가 먼저 요정님의 손을 잡아버렸습니다. 깜짝 놀라던 요정님은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습니다. 쉿, 이건 요정님한텐 비밀이에요.
요정님의 손을 꼬옥 잡고 나서야, 저를 안아주기 위해 두 무릎을 굽혀 앉은 요정님 덕분에 저는 요정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요정님은 정말 요정님처럼 멋있었습니다. 정말 요정님처럼 눈이 너무 예뻤습니다. 보자마자 입이 헤- 벌어지려는 걸 막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안 그래도 앞이 잘 안 보이는 깜깜한 밤에, 검은 후드를 꾹 눌러쓴 요정님의 얼굴은 자세하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말 정말 예쁘고 잘생겼다는 건 분명했습니다. 후드의 그림자 때문에 색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반으로 갈라져 색이 나뉘어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는 신기한 머리카락도. 얼굴의 왼편을 뒤덮은 화상자국도. 양쪽의 색이 다른 눈동자. 멋진 얼굴. 예쁜 눈.
저도 모르게 손이 뻗어졌습니다. 요정님에게 닿고 싶었습니다. 그저 그런 마음으로 손을 뻗어, 요정님의 깨끗한 오른쪽 뺨과 일그러진 왼쪽 화상자국을 만졌습니다. 요정님은 제 손을 뿌리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만히, 제 손에 얼굴을 내어준 요정님은 제가 만지는 것에 따라 살며시 눈을 가늘게 할 뿐이었습니다. 색이 다른 눈동자에 희미한 빛이 감도는 것이 보였습니다. 엄마의 보물 상자가 떠올랐습니다. 그 속에 있던 몇 개의 돌멩이 중 가장 색이 예뻤던 돌멩이가, 그 돌멩이를 꼭 닮은 눈동자가, 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찌릿찌릿 아팠던 가슴이 쿵쿵 뛰었습니다. 그 때 확신했습니다.
"응, 요정님이야."
"그러니까 요정이 아니래도.."
처음 제가 요정님을 요정님이라고 했을 때처럼, 요정님은 또다시 곤란하다는 듯 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치만 물러설 생각은 없습니다. 요정님은 요정님인걸요. 상냥하고, 따뜻하고, 어딘가 아픈, 그런 요정님인걸요.
그래서 괜히 신경 쓰였습니다. 마을 어른들이 제게 늘 들려주던 노랫말 같은 말이요.
있잖아, 알고 있어?
저어기 마을 뒤에 있는 녹색 숲에는 말이야.
"있잖아, 요정님. 요정님은,"
무서운 괴물이 살고 있대.
"괴물님이야?"
괴물을 만나면
어른이 되지 못하고 죽어버린대.
"마을 어른들이 녹색 숲에는 괴물님이 산다고 그랬어. 요정님은 여기서 산다고 했고.. 여긴 녹색 숲이고.. 녹색 숲에 사는 건 괴물님이고.. 요정님은 녹색 숲에서 산다고 했으니까.."
무서운 무서운 괴물이래.
"요정님은 괴물님이야?"
그러니까,
"나는,"
절대 혼자서 그곳에 가면 안 돼. 알겠지?
"어른이 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거야?"
그 말을 뱉고, 저는 바로 후회했습니다.
요정님이, 울고 있었거든요.
제가 울 때처럼 눈물이 뚝뚝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분명 요정님은 울고 있었습니다. 괴물이라는 말이 아팠던 걸까요. 그저 마을에서 줄곧 들어왔던 말이 신경 쓰여서 물어본 것뿐이었는데, 요정님에게는 굉장히 아픈 말이었나 봅니다. 어쩌면 좋죠. 제가 요정님을 아프게 해 버린 것 같습니다. 가슴이 다시 아파옵니다. 어쩌면 좋죠. 요정님이 아픈 건 싫습니다. 요정님이 우는 건 더 더 싫습니다. 아픕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또 다시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미안해, 미안해 요정님. 내가 잘못했어. 요정님은 요정님이야. 괴물님 아니야. 미안해, 요정님. 다신 그런 말 안 할게. 요정님,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요. 울지 마.."
다정한 요정님. 따뜻한 요정님.
넘어져서 피가 나는 무릎을 닦아주고, 지쳐서 제대로 걷지 못하는 날 품에 안아 함께 걸어 가 주고. 지금도, 이렇게. 잔뜩 울고도 또 울어 뜨거워진 얼굴에 닿은 요정님의 오른손이 시원했습니다. 밤바람의 차가움과 다른 다정한 시원함. 그저 기분대로 엉엉 울어버린 저보다 요정님이 백배천배 아파 보이는데도, 상냥한 요정님은 제 눈물을 닦아줍니다. 더 눈물이 났습니다.
손을 뻗어, 요정님의 뺨에 대고. 눈물은 나지 않지만 어쩐지 잔뜩 젖어있는 것 같은 요정님의 눈 밑을 벅벅 닦았습니다. 울지 마요. 요정님, 울지 마.
"미도리야."
한참 만에 요정님이 입을 열었습니다. 벅벅 요정님의 눈 밑을 닦아대던 손을 멈추고 요정님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자 요정님이 제 얼굴을 닦아주던 오른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조금 당겨져, 정신을 차리고 보니 쿵쿵, 귓가에서 요정님의 심장 소리가 들렸습니다. 실컷 울었던 것도 잊고, 계속 그대로 있고 싶은 마음에 머리를 더 더 요정님 품에 묻으며 요정님을 꼬옥 끌어안았습니다. 따뜻합니다. 그립습니다. 조금, 가슴이 아픕니다.
얼마동안 그러고 있었을까요. 요정님이 저를 놓았습니다. 발이 땅에 닿고, 요정님의 무릎도 땅에 닿았습니다. 다시 눈이 마주쳤습니다. 요정님은 여전히 조금 아픈 표정입니다.
"한 가지. 약속을 해줬으면 해."
요정님의 말에 저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끄덕 했습니다. 요정님이 바라는 거라면 뭐든지 들어주고 싶습니다. 엄마가 만든 카츠동도 양보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가장 아끼는 히어로 인형도 줄 수 있습니다. 그런 제 마음을 안 걸까요. 요정님이 다시 한 번 제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어른이 되면.. 스무 살이 되면.. 다시 한 번 나를 만나러 와. 이곳으로, 나를 만나러 와 줘."
"어른이 되지 않아도 만나러 올 수 있어. 내일도, 모레도 만나러 올 수 있어!"
다시 만나러 와 달라는 말을 하는 요정님이 너무 아파 보여서, 요정님의 손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매일 매일 요정님을 만나러 오고 싶었습니다. 올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녹색 숲이 무섭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제 말에 요정님은 여전히 아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야, 라고. 어른이 되면, 이라고. 그렇게 말하며 요정님은 제 손을 한 번 꼭 잡은 뒤에, 아주 천천히 놓았습니다. 등에 요정님의 커다란 손이 닿았습니다.
"위험하니까, 다른 곳으로 새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가."
요정님의 그 말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마을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불이 켜진 집이 군데군데 보였습니다. 저어기 우리 집도 보입니다. 역시 엄마가 걱정하고 계실까요. 서둘러야겠습니다. 앗, 그 전에,
뒤를 돌아 봤습니다. 등에서 손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새 요정님은 저 멀리입니다. 집으로 갈 생각에 기뻤던 마음이 어쩐지 조금 무겁습니다. 요정님은 이곳에서 혼자인 걸까요. 줄곧, 혼자였던 걸까요. 또 다시 가슴이 쿡쿡 아파옵니다. 어두운 숲 속에 홀로 들어가는 요정님의 모습이 너무 아파보였습니다. 혼자 두고 싶지 않습니다. 같이 가야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겠죠. 요정님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아직 아니겠죠. 문득 요정님이 약속해 달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안녕, 녹색 숲의 요정님! 또 만나요!!"
꼭, 꼭. 다시 만나요.
그렇게 외치고 집으로 달려가는 동안, 오늘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사람들은 요정님을 괴물님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걸요. 그렇게 상냥하고 예쁜 요정님이 괴물님이라고 불리는 건 싫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일은 비밀. 엄마한테도, 캇쨩한테도 비밀입니다. 어른이 되어서, 다시 요정님을 만날 때까지 절대로 비밀입니다.
그런데, 제가 요정님한테 제 이름을 말했던가요?
안녕, 녹색 숲의 요정님.
그렇게 말하며 나를 떠나가는 '이번의' 너를, 나는 '이번에도' 돌아보지 못했다.
시작이었는지 끝이었는지도 모를 처음이 언제였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네가 길고 긴 여행을 떠났고 난 이곳에서 널 기다리고, 그 뿐. 유일하게 잊혀지지 않는 기억 속의 네가 나에게 웃으며 말했었다. 내가 갈게. 그러니 나는 기다린다. 그 뿐이었다.
그야 처음에는 놀랐었지. 나를 떠났던 네가 조금 긴 시간이 지나 어린아이가 되어서 내 눈 앞에 나타났을 때는. 그 날도 여름날이었다. 막 네 살이 되었다고 했었나. 폐허가 되어버린 곳에, 회색 마을에, 노란 옷을 입은 어린 네가 한 아름 꽃을 안고 서 있었다. 꽃을 심으러 왔다고 했다. 과거, 민간인 사망자 제로라는 기적을 일으키고 홀로 떠나버린 한 히어로를 기리는 꽃을. 너를 기리기 위해 어린 네가 꽃을 피우러 왔노라고.
비가 왔었나. 어린 너의 목소리가 들리던 세상은 뿌연 회색이었다.
사실, 나는 그 때 내 기다림이 끝난 줄 알았어. 나는 너를 기다렸고, 너는 약속대로 나를 찾아와 주었으니까. 나에 대한 건 까맣게 잊어버린 어린 너였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지. 멈춰버린 내 시간이 다시 흘러갈 거라고 생각했어. 너와 함께 흘러갈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지. 다시 만난 네가 너무 어렸으니까, 네가 어른이 될 때까지 조금만 더 있다가 내 시간이 너와 함께 흘러갔으면 좋겠다고, 태평하게도 그런 걸 바랐었어. 그런 걸, 바랐었다.
다시 만난 네가, 또 다시 어른이 되기 전에 스러져버리는 그 순간까지도.
처음에 네가 떠났을 때, 너는 열아홉 살이었다. 나는 스무 살. 너보다 생일이 조금 빠른 내가, 너보다 조금 더 일찍 어른이 되었었다. 그리고 네가 어서 나와 같은 선상에 서기를, 함께 어른이 되기를 기다렸었지. 그 기다림이 이렇게나 길어질 줄 알았을까. 그 기다림이 이렇게나 지독할 줄, 상상이라도 했을까.
어째서일까.
나는 여태껏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너를 만났지만 그 어떤 너도 어른이 되지 못한 채 나를 떠나갔다. 처음처럼 열아홉 살에 떠날 때도 있었고 보다 더 일찍 떠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떠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너는 늘 스무 살이 되지 못하고 떠났다. 나는 스무 살에서 멈춰, 이토록 너를 기다리고 있는데.
원망 하냐고? 물론.
수도 없이 나를 떠나가 버린 너를 원망했다. 수도 없이 너를 빼앗아간 이 세상을 원망했다. 수도 없이, 등신처럼 멈춰 서서 너를 기다리는 것 밖에 못하는 나를 원망했다. 너를 구하지 못한 나를 원망했다. 너를 홀로 떠나게 해 버린 나를 원망했어. 어떻게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어.
원망하고, 갈망하다, 미쳐버릴 뻔 한 적도 있었지.
너를 떠나보내지 않기 위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결국 너는 늘 떠나버리니까, 내게 온다고 약속했으면서 네가 오지를 않으니까. 초조하고, 불안하고, 괴로워서. 더 이상 널 떠나보낼 자신이 없어서. 차라리 미쳐버리고 싶어서.
어린 널 꽉 끌어안은 채 놓지 않았던 적이 있었어. 어린 널 내 눈 밖으로 절대 보내지 않았던 적이 있었지. 차라리 너를 꽁꽁 얼려버려 내 곁에만 둔다면, 더 이상 너를 잃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미친 생각에 어린 너를 얼려버리려 했던 적도 있었다. 정말로 하려고 했었어. 그 때의 네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더라면, 나는 정말로 너를 얼려버렸을 거야. 그 때 비가 왔었던가.
뿌옇게 변해버린 세상에서, 얼어붙은 손으로 내 얼굴을 닦아주던 네 모습은 아직도 뚜렷하다.
그 때 이후로 나는 어린 너에게 내 이름을 가르쳐주는 걸 그만두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만큼 성장한 너를 본 것도 그 때가 마지막이었지. 너를 기다리는 것을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어. 다만, 네가 어른이 되어가는 것을 보는 것은 그만두었다. 나와 같은 어른이 되지 못할 걸 알아서, 죽고 싶을 만큼 잘 알아서, 그래서 그만두었다.
그런데, 미도리야. 참 이상하지.
나는 너를 찾아 헤매이는 것을 그만두었는데, 너는 끊임없이 나를 찾아왔다. 어린 너는 언제나 스스로 내게 왔다. 막 네 살이 되었다고 했었나. 너를 닮은 여름날에, 어린 너는 언제나 홀로 내 앞에 나타났었다. 그리고는 떠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지. 아무리 약속을 되풀이해도, 너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잘 모르겠어. 네가 이전과 같이 어른이 되지 못하고 떠나버렸는지, 아니면 어른이 되었는데 나를 잊어버린 건지. 어른이 되어가는 너를 보는 것을 관두고 너를 잃은 숲 속에만 틀어박혀버린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전자라고 생각했다. 후자인 것은 싫었다. 어른이 된다면, 어른이 되기만 한다면, 그 선만 넘을 수 있다면 네가 나를 기억해 내 줄 거라고. 이 토할 것 같이 지독한 기다림이 끝날 거라고, 그렇게 믿었다.
언제였더라. 내가 너를 기다리는 이곳이 녹색 숲이라고 불린다는 말을 들었다. 나를 찾아온 몇 번째인지 모를 어린 너에게 들었다. 일 년 내내, 가을이 와도 겨울이 와도 계속 녹색이라고. 그래서 녹색 숲이라고 부른다고. 그리고 녹색 숲 안에는 괴물이 살고 있다고.
그 말을 듣고 웃음이 나올 뻔 한 것을 간신히 참았었지.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괴물이었다. 죽지도, 나이를 먹지도 않는. 오직 너만을 기다리는.
무너진 콘크리트가 철거되고 너를 기리는 많은 사람이 피워낸 꽃과 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룰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그 울창한 숲이 나를 닮아 너를 닮은 녹색에서 멈춰버린 것은 또 언제였는지. 숲 앞에 마을이 생긴 것은 언제였더라. 그곳에서 태어난 어린 네가 네 살이 되면 마치 관례처럼 홀로 나를 찾아오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지? 내가 괴물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나와 약속을 하고 숲을 등진 네가 결국은 어른이 되지 못하고 죽어버린 것 때문이라는 것은 안 것은, 대체 언제였는지.
네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네가 와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바람때문이었을까. 어린 너는 계속 숲을 찾아왔고, 어른이 되지 못한 너는 내게 돌아오지 못했다.
오늘은 유독 날씨가 좋아 밖으로 나왔다. 따스한 햇살이 녹색 숲을 적시는 모습이 너의 상냥함을 닮아서, 그래서 밖으로 나왔다. 언젠가의 어린 네가 나의 열상자국을 보고 겁을 먹어버린 후로 습관처럼 깊게 눌러쓰고 있던 갑갑한 후드도 벗어버리고, 오랜만에 너의 상냥함을 맞았다. 눈이 부셨지만, 그래서 더욱 너와 같아서.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문득 이번의 어린 네가 떠올랐다.
안녕, 녹색 숲의 요정님.
어울리지도 않게 나를 그렇게 불렀었다. 그 전 번의 어린 네가 나를 보고 괴물님이라고 불렀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그 어린 네가 숲을 등진 지도 십 육년인가. 어차피 의미가 없어 시계는 두지 않지만 달력은 두고 있어 알았다. 날짜대로라면, 떠나버리지 않았다면 딱 이쯤.
저가 사는 마을에서 괴물이라고 불릴 나인데도 무서워하기는커녕 예쁘다며 배시시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번의 어린 너는 내가 기다리는 너와 유독 닮아있었다. 엉망진창으로 엉엉 울면서도 울고 있지도 않은 내 얼굴을 닦아주던 상냥함도, 내 손을 잡고 몇 번이고 다시 나를 찾아오겠다고 말하던 단호함도. 그 조그마한 입으로 자신의 죽음을 말하면서도, 그 원흉일 터인 나를 조금도 두려워 않던 강함도. 이번의 어린 너는, 정말로 너를 많이 닮아있었다.
너는 어른이 되었을까. 아니면 또다시 떠나버렸을까.
몇 번이고 찾아오겠다던 어린 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뻔 한 것을 어떻게 참았는지 모른다. 시린 가슴에 닿아오던 따뜻하고 작은 너를 어떻게 놓을 수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아. 그동안 만나왔던 어린 너 중에서도 가장, 가장 네 모습이 짙던 그 아이를 어떻게 보낼 수 있었는지.
미도리야.
그 아이는 너 일까. 나의 너일까.
이번에야말로 살아서, 내게 돌아와 주는 걸까. 이번에야말로 이 지독한 그리움에서 나를 구원해 주는 걸까.
수 십, 수백 번도 더 하고 더 잃었던 기대였다. 간절한 바람이었다. 어쩔 수 없잖아. 너인걸. 나를 구원해 준, 나를 구원해 줄 단 하나뿐인 너인걸. 내가 어떻게 너를 기다리지 않을 수 있겠어. 내가 어떻게 너를 포기해. 미도리야. 미도리야.
말라버린 눈에서는 더 이상 눈물도 흐르지 않아, 그저 텅 빈 허공을 보며 조용히 불렀다. 이제껏 수도 없이, 하루도 빠짐없이 부른 이름이었다. 언제나처럼 그늘진 수풀 속으로 사라져 버릴 이름이었다. 부는 바람소리에, 새소리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에 묻혀 오늘도 사라져 버릴 부름이었다.
구름이 걷히며 그림자가 물러가는 것이 보였다. 너의 상냥함을 닮은 햇살이, 다시금 너를 닮은 녹색 숲을 적시는 것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 때,
"안녕, 녹색 숲의 요정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소리가 멈췄다. 새소리도 그쳤다. 시끄럽게 귀를 때리던 나뭇잎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귀가 아닌 머리에, 아니, 가슴에 울리는 목소리. 낯익은 목소리였다. 낯선 목소리였다. 가슴이 저릴 정도로 그리운, 그런.
"내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나요?"
아아. 미도리야. 비가 오고 있나봐.
세상이 흐려졌다. 뿌옇게 이지러졌다. 그 안에서 너만, 너만이. 오직 너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