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랑님과의 사약게임으로 탄생하게 된 사약, [이마후쿠 히코시로X타케야 하치자에몽] 글입니다.
- 캐붕주의
- 스압주의.
- 타케야가 개새끼인 것 주의
그래도 괜찮으신 분들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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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는 버릇을 가진 동급생의 것을 그대로 베껴낸 가발을 뒤집어 쓴 너는, 언제나 뒤돌아 선 채다. 그와 꼭 닮은 얼굴로, 그와 전혀 다른 표정으로, 언제나처럼, 그렇게 웃고 있을까. 아무리 손을 뻗어도 이름을 불러도 뒤돌아봐주는 일은 없다. 단 한 번조차. 그럼에도 나는 바보처럼 또 손을 뻗는다. 죽음과 가장 가까운 이 순간에 오직 너만을 시야에 담으며. 너의 이름을.. 눈앞의 형체가 흔들렸다. 어지러울 정도로 흐릿한 시야에 느릿하게 감았다가 천천히 다시 뜬 눈에 비춰지는 것은 여전히 뿌연 세상, 그 안에 있는 단 하나의 인영이었다. 조금 전까지 그 자리에 있던, 너무나도 익숙하기에 아픈 그가 아닌 다른 이. 다른 아이. 어린 아이. 그것이 눈을 뜨고 첫 번째로든 생각이었다. 두 번째는 추워. 그리고 세 번째는 그래도 따듯해. 스스로도 모순된 생각이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반창고가 붙지 않은 뺨에 닿는 공기는 차가워 몸을 떨면서도, 왼손만큼은 어째서인지 무척이나 따듯해 안도감에 깊은 숨을 내쉬었다. 삐걱, 하고 온 몸이 비명을 질렀다. 살아있구나, 나. 깊은 호흡에 크게 오르내린 복부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지는 지독한 통증에 잠시 숨을 고르고, 느릿하게 두어 번 눈을 감았다 뜨며 초점을 되찾았다. 어디인지 모를 이곳은 어두웠다. 폐쇄된 공간의 갑갑한 어둠이 아닌, 늦은 밤의 고요한 어둠이 방안을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환기를 위해서인지 아주 조금만 열어놓은 창문 너머에서 차디찬 밤의 공기가 들어와 한바탕 방 안을 휘젓다가 유유히 다시 흘러나갔다. 흐르는 공기에 짙은 약초 냄새가 섞여있었다. 약방인가? 아니면 의원? 어째서인지 무척이나 익숙한, 그리움마저 베여있는 냄새에 사고가 유려히 흐르지 않았다. 아니, 사고가 흐르지 않는 것은 멍하니 울리는 듯 한 두통 때문인가. 시각도, 후각도, 청각도, 모든 감각이 둔탁하게 저려오는 것과 같은 유쾌하지 않은 감각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손가락은, 움직였다. 대체 얼마동안이나 움직이지 않은 건지 감각은 굉장히 무뎠지만 그래도 분명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언제나 죽음의 순간을 넘기고 난 후에 가장 먼저 하는 것은 감각을 확인하는 행동이다. 손가락을 까딱, 발가락도 까딱, 오른쪽 눈을 감고 깜빡, 왼쪽 눈을 감고 깜빡, 다시 한 번 숨도 쉬어보고,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 주변의 소리도 들어본다. 그 모든 것이 끝나면, 그 모든 것이 아무 이상 없이 무사히 이루어지면 그제야 진정으로 안도한다. 사지가 잘 붙어있구나, 눈도 두 짝 다 붙어 있구나, 숨도 제대로 쉬어지는 구나, 귀도 잘 들리는구나, 이번에도 나는 제대로 잘 살아남았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선은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 다음은 왼손의 다섯 손가락. 그렇게 차례대로 움직여가려던 찰나에 손가락에 걸리는 무언가를 알아챘다. 왼손이었다. 까딱, 하고 움직이는 다섯 손가락이 무언가를 건드리고 있었다. 제 손보다는 작았으나 분명한 크기를 가지고, 그럼에도 있는 듯 없는 듯 살포시 왼손을 덮고 있는 그것은 굉장히, 따듯했다. 생각은 눈을 뜬 그 순간에 미쳤다. 아파, 추워, 그리고 따듯해. 따듯해? 왼손이? 어째서? 그 순간 둔하게 가라앉아 있던 사고능력과 감각이 깨어나는 걸 느꼈다. 본래 어둠에 익숙해져있던 시야가 밝아지고, 그제야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머리에 차오르는 의문에 뻣뻣하게 굳어져있는 고개를 내려 왼손을 봤다. 손이 있었다. 내 것이 아닌, 내 손을 잡고 있는 손이. 누구? 가장 처음으로 떠오른 얼굴은 역시나 그 녀석이었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멍청하게 기대하며 긴장해버린다. 하지만 역시 아니겠지. 제 멋대로 기대하고, 제 멋대로 긴장하고, 제 멋대로 실망하고, 제 멋대로 아파한다. 지긋지긋한 되풀이에 쓴웃음이 지어질 무렵, 머릿속에는 또 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어째서일까. 언제나 한 사람 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바보 같은 머리였는데. 죽음과 가장 가까운 순간에도, 겨우 살아남아 눈을 뜨는 순간에도, 바보처럼 오직 한 사람만을 생각하던 머리였는데. 언제부터, 나는 너를 떠올리게 되었나. 느릿하게 눈을 끔뻑이며 내게 온기를 전해주던 손을 따라 올라가자 보이는 얼굴은 역시나 방금 전 떠올려버린 그 얼굴이었다. 아프게 아른거리지도 않고, 나를 등지지도 않고, 선명하게 내 앞에 서서, 나를 보며, 나를 부르는 후배. 연인이나 연모하지 못했던 아이. 그럼에도 웃으며 내 손을 잡아오던 아이는 이 순간에도 내 손을 잡은 채 잠들어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이부자리 끝에 걸터앉아, 손을 놓치지 않기 위해 구부정히 허리를 숙인 채 불편하게 잠들어 있는 아이의 모습에 가슴 한 구석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연인이라면, 이불속에 들어오지는 못해도 그 옆에 몸을 뉘여 잠들어도 괜찮을 텐데. 연인이니까, 붕대투성이의 몸을 끌어안지는 못해도 그 옆에 붙어 누워 체온을 나누며 잠들어도 괜찮을 텐데. 그저 소박하게. 그나마도 강하게 쥐지 못하고 그저 위에 포개는 정도로만 닿아있는 아이의 손에서 전해져오는 아릿한 온기가 눈물이 날 정도로 따듯했다. 끔뻑끔뻑 바보처럼 작에 입을 벌리고, 멍하니 내 얼굴만 바라보며 눈을 깜박이던 아이의 얼굴에 울음이 번지는 것은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포개져 있던 왼손에 다른 한 손마저 포개며 마치 기도하는 것처럼 아이는 고개를 숙였다. 물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고 잠시 숨을 고른 후, 아이는 조심스럽게 나의 왼손에서 한 손을 떼 뒤쪽에 놓여있던 물 컵을 들었다. 그제야 나는 굉장히 목이 마르다는 것을 눈치 챘다. 한 손에 물 컵을 들고, 잠시 동안 아이는 난감한 표정으로 물 컵과 누워있는 나를 번갈아보고 있었다. 누워있는 사람에게 물 컵을 들이 댈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일으켜서 마시게 하면 될 텐데, 내 상태가 그렇게 좋지 않았던 것일까. 아이는 물 컵을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고는 그 옆에 있던 둥근 수저를 들었다. 한 모금에도 미치지 못할 적은 양의 물이 천천히 갈라진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 젖은 입술에 닿아 온 두 번째 수저에는 역시 한 모금에는 미치지 못하나 첫 번째 수저의 것보다는 많은 양의 물이 있어, 작게 입을 벌리자 조심스레 들어와 입 안을 적시고 목을 축였다. 그렇게 두어 번 반복해서 넘어간 물에, 빡빡해진 고철에 기름을 칠한 듯 그제야 내 몸이 내 몸 같아진 기분이 들어 옅게 숨을 내쉬자 아이는 수저를 내렸다. 손도, 발도, 목도, 전부 제대로 움직였다. 미처 끝내지 못했던 확인 작업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천천히, 오른손으로 이불을 짚고 몸을 일으켜보려하자 온 몸이 비명을 질렀다. 이불에서 손가락 한마디조차 떨어지지 몸은 금세 다시 푹신한 이불에 파묻혀야만했다. 크윽, 하고 짧게 신음을 하자 아이가 놀라 제 몸에 손을 얹었다. "아직 움직이시면 안돼요..! 니이노선생님께서 지금으로썬 다행히 생명에 큰 지장이 없다고 하셨지만, 상처가 심해 덧나게 되면 굉장히 위험할 수 있으니까.. 당분간은 절대 안정을 취하라고 하셨어요. 누워 계세요." "니이노..선생님..?" 놀라는 내 모습에 덩달아 눈을 동그랗게 뜨던 아이가 그제야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듯 했다. 아이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내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차분하게 정돈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이가 말한 것은 옳았다. 임무 중인 닌자는 그 일이 끝나지 전까지 함부로 자리를 이탈해서는 안 된다. 임무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자리를 이탈하는 것은 곧 임무 실패로 연결되고, 프리닌에게 임무실패는 곧 신용을 잃는 것을 의미한다. 신용을 잃은 프리닌은 죽는다. 잔인하고 매정한 세계에서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가 한 일은, 어쩌면 자신을 죽이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너는 그곳에서 나를 살렸다. 진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건네는 아이의 모습은 흐트러짐 하나 없어, 그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아이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감정에 죄송함은 있을지언정 후회는 없었다. 사람을 살렸던 그 행동이 감사받아야 할 것이 아닌 지탄받아야 할 것임을 분명하게 알고, 그럼에도 행하고, 후회하지 않는다. 언제 이렇게 어른이 되었나. 자신이 기억하는 아이는 이렇게나 어른이 아니었다. 본래 이반의 학급위원장으로서 여느 또래 아이들보다는 어른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하반에게 지는 것이 싫다며 울기도 하고, 시험에서 100점을 맞았다며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랑하러 달려오다 넘어지기도 하고. 한없이 작게만 보였던 어린아이가, 언제 이렇게나 강한 어른이 되었나.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아이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뭐라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살려주어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아이가 사과한 그것을 다시 강조하며 야단을 쳐야하나. 어느 것도 답이 되지 않았다.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아이의 성장에 분명 맑게 깨었을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결국 한참을 멍하니 있던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비겁한 회피였다. "아.. 마침 그 날 이반의 실습장소가 에고노키타케성이어서." 작게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 온 밤바람이 왼손을 스치는 서늘한 감각에 움츠리며, 그제야 나는 손에 닿아있던 따스함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자욱하게 깔린 피안개, 지독하게 풍겨오는 피냄새, 짐승 한 마리 다가오지 않는 처참한 지옥 속에서 흐릿한 시야너머로 익숙한 형체가 아른거리는 것을 보며 조소가 흘러나왔다. 미련이도 이런 미련이가 없다. 그렇게나 오랜 세월을 아팠으면 이제 그만 포기할 때도 되었건만, 어떻게 해도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언제나 죽음의 순간에는 네가 보인다.
'선배'
어..라..?
'타케야선배'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한 애정을 담고,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아파.
"히..코..시로.."
삐걱이는 손가락에 힘을 줘 포개어진 손을 맞잡으며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뻑뻑하게 마른 목에서는 소리가 매끄럽게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건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분명하게 아이의 귀에 닿은 듯 했다. 움찔, 하며 아이가 움직였다. 그리고 수초도 흐르지 않아 성급하게 눈을 뜬 아이는 홱,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살폈다. 눈이, 마주쳤다.
"다행이다..."
아이는 잠시간 그러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손만을 잡고. 울고 있을까. 숙여진 고개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천천히 들어 올려진 얼굴에는 더 이상 울음이 묻어있지 않아, 단지 그 사실에 안도했다. 밤의 어둠이 색을 가려 어쩌면 붉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눈가가 보이지 않아 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디고 있자 들려온 걱정 어린 말 사이에 섞여있는 익숙한 이름에 놀랐다. 니이노 히로카즈. 3년 전 즈음에 졸업한 인술학원의 보건교사의 이름이었다. 졸업하고 나서도 자주는 아니었지만 가끔 아이를 만나기 위해 학원에 얼굴을 비추었었다. 그 때마다 미처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자잘한 상처들을 봐 주시던 상냥한 선생님. 그 이름이 어째서 지금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일까. 어렴풋하게 익숙하던 방안의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여기, 인술학원의 의무실이에요. 사흘 전, 우연히 에고노키타케에서 쓰러져계신 타케야선배를 발견하게 되서.. 보통의 경우, 그 근처에서 안전한 곳을 찾아 치료를 하는 것이 옳았겠지만 프리닌으로 계시는 타케야선배를 함부로 아무 의원에게 보일 수는 없었고, 이반에는 전문적인 치료가 가능한 보건위원도 없어서 여기까지 모셔오게 되었어요. 설령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임무 중이셨을 선배를 멋대로 내린 판단으로, 멋대로 이곳까지 모셔와서 죄송합니다."
조곤이 말을 끝내고 아이는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런 아이의 태도에 솔직히 상당히 당황했다.
"우연히..라고?"
짧게 말을 마친 아이의 한 손이 이마 위에 내려왔다. 이전에는 이마를 겨우 가릴 정도로 작았던 손이 지금은 이마를 덮고 눈가를 가릴 정도로 커졌다는 것에 놀랄 틈도 없이 잠시간만 닿았다 떨어져 간 손은 옆에 놓여있던 물이 한가득 담겨 있는 바가지를 들고,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미열이 남아 있어요. 새로 물을 떠올 테니 조금 더 주무세요."
상냥하게 웃으며 말한 아이는 천천히 걸어 의무실을 나갔다. 드르륵, 문이 닫히며 그 틈으로 작아지는 아이의 뒷모습에 어쩐지 굉장히 울적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아이는 분명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 울음보다 더 슬프게 보였던 것은 왜일까.
연분홍 꽃잎이 흩날렸다.
하늘거리며 눈처럼 날리는 꽃잎 아래 서 있는 것은 그을은 듯 가라앉은 황록색의 닌복을 입은 나와 선명한 바닷빛의 청색 닌복을 입은 아이. 먼저 입을 연 것은 누구였더라. 나였던 걸로 기억한다. 한 손에는 졸업장을 들고, 다른 한 손을 가볍게 올리며 나는 웃었다.
'배웅 나와 준거야? 고마워라-'
고작 2년밖에 함께하지 못한 제 위원회 선배들을 보내며 울었던 걸까, 붉어져있는 아이의 눈가에 미소가 나왔다. '졸업 축하드려요' 하고 물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아이가 귀여워, 들어 올렸던 손을 아이의 머리 위에 가볍게 얹고 쓰다듬어 주었다.
'2년간 고마웠다, 히코시로.'
그렇게 말했었다.
진심어린 감사를 담아. 정말로 고마웠으니까. 나에게로 보내 준 한없이 순수한 애정이.
나 자신이 눈치가 빠른 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4살이나 어린 아이의 마음을 보지 못할 정도로 둔하지도 않았다. 한없이 순수하게 나를 바라보던 아이의 시선 안에 깃들어 있는 것이 분명한 애정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모를 리 없었다. 나와 같았으니까. 내가 그 녀석을 보는 시선과 너무나도 닮아있었으니까.
그것을 단순한 동경이라고 치부할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다만, 바라고는 있었다. 이 작은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깨닫지 못하기를. 존경하는 선배를 향한 동경이라 생각하고 그 포근하게 부푼 마음을 가지고 자라, 내가 없을 훗날에 그 의미를 잃어버리기를. 아이 안에서 그것이 정말로 단순한 동경이 되어버리기를. 그렇게 바랐다.
비겁하고 치졸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아이가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위원회의 후배는 아니었으나, 2년간 제법 많은 시간을 함께 한 아이었다. 그런 아이가 이룰 수 없는 감정에 아파하는 일은 없기를 바랐다. 나와 같은 아픔을 겪는 일은 없기를, 진심으로 그렇게 소원했다.
하지만 학급위원장이란 얼마나 우수한 녀석들뿐이었나.
'타케야선배..'
내 손에 거칠게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할 생각도 않고 올곧게 나를 올려다보는 시선에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흩날리는 꽃잎과 같이 옅게 물든 뺨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물기가 스며들어 있는 젖은 목소리의 울림이 귓가에 닿은 순간, 나는 그만 주저앉고 싶어지는 것을 참아내야만 했다.
'좋아해요'
잔인하게만 들려오는 아이의 순수한 고백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무릎을 꿇어 몸을 낮춰 아이를 끌어안았다. 긴장한 것인지 뻣뻣하게 굳어진 채, 바르르 떨리고 있는 손이 보였다. 종종 울던 아이를 달래었던 것처럼 조심스레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언제나 나의 이 서툰 손길에 안심하며 긴장을 풀고 품으로 몸을 기대 오던 아이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날 만은 나의 서툰 달램도 아이의 굳은 몸을 녹이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교차해 시야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떨어지는 꽃잎이 어지럽기만 했다. 나, 어떻게 하면 좋아. 아이를 달래는 척 숙인 고개 안으로 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것을 간신히 억누르고 물었다. 닿지 않는 나의 사랑에게 물었다.
너를 좋아하는 내가, 나를 좋아한다 말하는 이 아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가슴으로 수백 번, 수천 번을 물어도 들려오지 않는 대답에, 들려올 리가 없는 대답에 나는 또 다시 멍청하게 아파한다. 눈을 감아도 눈꺼풀 너머로 나를 등진 너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해 숨이 막혀왔다.
이런 아픔을, 이 아이가 겪게 해야 하나.
진심으로 부딪혀오는 아이의 마음을, 나는 거절해야만 했다. 고개를 저으며, 그 애정을 받아줄 수 없음에 미안해해야했다. 씁쓸하게, 그러면서도 미소 지으며, 나에게 보내준 애정에 감사를 고해야만 했다. 하지만 좌우로 저어야할 고개는 굳어진 채 움직이지 않았고, 감사의 말을 내뱉어야할 목소리는 그저 조용히, 아이를 부르고 있었다.
'히코시로'
취한 것이 분명했다. 지독하게 코끝을 찌르는 꽃내음에. 오랜 시간을 보낸 정겨운 공간을 떠나왔다는 쓸쓸함에. 끝끝내 닿지 못한 채 후회와 아픔으로 범벅되어버린 연정을 끌어안고, 등을 보이며 떠나가는 너를 그저 바라보는 것 밖에 하지 못했던, 그 구토가 치밀 만큼 고통스러운 슬픔에, 나는 분명 취해있었다. 아니면 미쳐있었거나.
아이를 끌어안고 있던 두 팔을 풀고, 손가락 한마디 정도밖에 되지 않는 공간을 둔 채 아이와 떨어져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작은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거짓말을 내뱉고 말았다.
'좋아해'
입술을 뚫고 흘러나온 나의 독에 아이는 무슨 말을 했었더라. 감사의 말을 했던가. 의심의 말을 했던가.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놀라움으로 크게 뜨여진 아이의 눈동자가 어째서인지 눈물로 젖어 들어가던 것만큼은 기억 속에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 눈이 잊혀지는 일은 없겠지.
몽롱한 정신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웅성거림에 내가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밖으로 나가는 아이의 등을 보았던 것 까지는 기억이 나니, 잠든 것은 그로부터 조금 후인가. 후회밖에 남지 않은 과거의 꿈을 꾼 탓에 정신은 몽롱하게 뜬 상태로 기분은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울적한 기분은 얼마 가지 못했다.
"타케야선배..! 죽지마세요-!!"
"죽으시면 안 돼요...!!"
"응, 토라와카, 산지로. 알았으니까 일단 내려와주지 않을래."
몸을 누르는 묵직한 고통과 소란스러운 주변에 눈을 뜨고, 제 몸을 누르고 있던 후배들에게 간청했다. 후배들도 내 몸 상태를 완전히 간과하지는 않았는지 직접적으로 몸을 누르지는 않았지만, 양 옆에서 내게 매달리듯 앉아 있는 후배들의 무게 탓에 아까까지만 해도 차디 찬 바람으로부터 내 몸을 포근히 감싸주던 이불은 이미 흉기가 되어 중상의 몸을 압박하고 있었다. 솔직히, 죽을 만큼 아팠다.
"아..! 타케야선배..! 토라와카! 산지로! 빨리 내려와! 타케야선배 힘드시잖아!"
"잇페이, 여기 의무실이니까. 조용히 해야 해.."
"그런 건 알고 있어, 마고지로! 그것보다 토라와카! 산지로! 빨리 내려오라니까!!"
눈물콧물 범벅이 되어 엉엉 울고 있는 토라와카와 산지로, 그런 두 사람에게 호통 치는 잇페이와 잇페이에게 조용하게 당부하는 마고지로가 보였다. 본래 조용해야 할 공간에 시끌시끌한 소리가 채워짐에 갓 깨어난 머리가 멍하니 울렸다. 눌리고 있는 몸은 정말 굉장히 아팠다. 하지만, 그럼에도 걱정스러움을 한껏 담아 아직까지도 울먹이며 저를 보는 후배들의 모습에 그만 웃음이 나와 버리는 것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뜨문뜨문 학원을 방문했을 때에도 후배들을 따로 만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만나는 것은 졸업이래인가. 몇 년 만의 선배와의 재회가 이런 식이라면 울만도 했다.
처음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하지만 아직까지도 삐걱이며 비명을 지르는 몸을 애써 무시하고 두 팔을 들어 올려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자, 난 괜찮으니까."
예전처럼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토라와카와 산지로의 눈에서는 그렁그렁하게 맺혀있던 눈물이 다시금 또르르 떨어져 버렸다. 선배..! 하며 품으로 파고드는 후배들이 이제는 한 팔로 안아줄 수 없을 만큼 커졌다는 것에 놀라기도 잠시, 예전과 다름없이 어리광부리듯 안겨오는 후배들이 귀여워 결국 끌어안아주는 것 대신 팔 안에 감쌀 수 있는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옆에서도 훌쩍이며 눈물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이지..! 놀래키지 말아주세요..!! 놀라는 건 하반 녀석들의 바보짓만으로도 충분하단 말이에요!"
"뭣..! 야!!!"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두 손으로 훔치며 내뱉는 잇페이의 말에 그만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에고노키타케에서 쓰러져 있던 나를 발견한 것이 이반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이 후배는 피칠갑을 한 채 숨이 멎어가던 나를 봤다는 것이 된다. 그 누가, 자신의 선배의 그런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응. 걱정시켜서 미안해."
잇페이의 말에 품안에 있던 두 하반의 후배들이 벌떡 일어나 준 덕에 비게 된 손을 뻗어 머리를 토닥여주자 잇페이는 그런 내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꼭 맞잡아 왔다.
"정말.. 무서웠다고요.."
두 손을 모아 내 왼손을 포개고, 잇페이는 기도하듯이 고개를 숙였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를 옆에 앉아 있던 마고지로가 잡아주고 있었다. 울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무서웠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는 후배의 모습과 겹쳐지는 누군가가 보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아이는 잇페이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죽어가던 나를 보고, 그 아이 역시 두려움에 눈물지었을까. 내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던 한 아이를 떠올리며,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잇페이의 손을 꼭 잡아주는 것뿐이었다.
오전 수업시간을 알리는 헤무헤무의 종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후배들은 허겁지겁 의무실을 뛰쳐나갔다. 분명 굉장히 급하게 뛰어간 것일 터인데도 예전처럼 우당탕 하고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새삼스럽게도 저 아이들이 이제는 예전의 나와 같은 5학년이구나, 하고 놀랐다. 정말 많이 컸구나.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아이들은 성장해 있었다.
후배들이 모두 나가고, 그제야 의무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조용해진 공간에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아직 서늘했지만 바람과 함께 들어와 방 안을 감싸는 햇볕이 따스해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조용함은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코끝을 간질이는 그리운 장소의 냄새가 되려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후배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내가 이곳에 온지 벌써 닷새가 지났다고 했다. 처음 눈을 떴을 때 그 아이가 말했던 사흘과 함께 계산해보면, 다시 잠들고도 이틀이나 더 지났다는 것이 된다. 임무는, 분명 실패겠지.
이번 임무의 실패로 나의 프리닌으로서의 신용이 얼마나 떨어졌을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나는 이미 그곳에서 죽은 걸로 되어있을 지 모른다. 가지고 있던 에고노키타케의 기밀문서는 빼앗겨 버린 걸까. 처음 눈을 떴을 때, 몸의 감각을 확인하며 함께 확인 해 보았을 때, 품 안 깊이 넣어 두었던 문서는 찾을 수 없었다. 치료를 위해 빼 두었다면 그 아이가 나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러니 이곳으로 올 때 이미 문서는 나에게 없었다는 것이다.
한심했다. 임무를 실패해 버린 것도, 형편없이 다쳐 후배들 걱정이나 시키고 있는 것도. 무엇보다 한심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은 그 아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다.
어째서일까. 이틀 전, 의무실을 나가기 직전까지 내 손에 포개어져 있던 그 온기가, 온기가 달아나던 그 소름끼치는 감각이, 잊혀지지를 않는다. 울음과도 같던 아이의 웃음도 가슴 한 곳에 바위처럼 얹혀 도무지 사라지지를 않았다. 단 한 점의 후회도 없다는 목소리로 나를 살린 것에 고개를 숙이던, 이제는 아이라 부르기조차 민망할 만큼 성장해버린 아이의 모습이 잔향처럼 남아 떠나가질 않았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이렇게나 그 아이가 머릿속에 남아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그저 어린아이일 뿐인데. 형편없는 내 욕심에 희생된 가여운 아이일 뿐인데. 그랬었는데.
복잡하게 꼬여 무겁게 맴돌던 상념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그 때 드르륵, 하는 문소리가 들려왔다.
"아, 깨어있었군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깊은 상념이 깨어짐과 동시에 의무실 안으로 누군가 두 사람이 들어왔다. 과연 인술학원 관계자답게 발소리는 없이, 하지만 분명하게 존재를 드러내며 다가오는 기척에 눈을 뜨자, 앞서 다가오던 사람이 빙긋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니이노선생님이었다. 언제나처럼 자상하게 미소 지으며, 이불 옆에 앉아 인사하는 내 머리위에 손을 얹어 열을 재시고는 니이노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제 열은 전부 내린 것 같아 안심입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니 당분간은 얌전히 누워 계세요. 아, 그전에 붕대를 갈아야하니.. 쿠로키군, 조금 도와주시겠어요?"
니이노선생님의 말씀에 이어 공손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그 이름에, 움찔하며 굳어지는 몸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니이노선생님은 새로운 붕대를 가지러 가신다며 몸을 일으켜 선반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덕에 눈을 마주칠 수 있게 된 또 한 명의 방문자는, 역시나 그리운 얼굴.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타케야선배.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그 아이와 같은 학급위원장. 언제나 침착하고 어떤 일에도 냉정함을 잃지 않았던 학급위원장위원회의 또 다른 후배. 줄곧, 줄곧, 그 녀석의 시선이 향하고 있던, 어쩌면 아직까지도 향하고 있을 그곳에 있는 아이. 내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후배가, 그곳에 있었다.
니이노선생님이 만드신 약의 효과는 확실해서, 처음 눈을 떴을 때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웠던 것과 비교해 지금은 후배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온몸이 비명을 지르며 통증을 호소하는 것은 여전했지만, 일어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충분한 발전이었다. 그럼에도 참기 어려운 통증에 작게 신음을 흘리며 미간을 찌푸리자 쿠로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금 더 일으키는 속도를 늦춘다. 나와 비교했을 때는 아직 작았지만, 굳게 자란 팔이 내 몸을 단단하게 받치고 있었다.
쿠로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단순히 몸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겨운 숨을 고르고 있자 니이노선생님이 새 붕대를 들고 다가왔다. 조심스럽지만 능숙한 손길로 붕대를 푸르고, 약을 바르고, 깨끗한 붕대로 다시 상처를 감았다. 깊고, 넓은 상처부위에 붕대를 가는 작업만 해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겨우 치료가 전부 끝났을 즈음에는 나는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지쳤다.."
"아직 쓰러지지 말아주세요."
차분하게 말하며 쿠로키는 니이노선생님에게 무언가를 받아 내 눈 앞으로 가져왔다. 약그릇이었다. 독한 약냄새를 풍기며 그릇 가장자리까지 넘실거리고 있는 짙은 고동색의 액체에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나 보다. 등을 받치고 있던 쿠로키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쓴웃음 지으며 작게 입을 벌리자 용서 없이 다가 온 그릇은 입가에 닿고, 기울여져, 담겨 있던 액체를 입 안으로 흘렸다.
"수고하셨습니다."
혀를 마비시킬 듯 한 쓴맛에 절로 구겨지는 미간을 억제하지 못한 채 간신히 그릇을 비우자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로 말하는 쿠로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을 옆으로 치우고 물에 적신 수건으로 입가를 닦아주는 손놀림에는 아까와 같은 엄함은 사라지고 상냥함이 흘렀다. 이 상냥함에 그 녀석은 반한 것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쿠로키에게도 나는 그렇게 유쾌한 존재가 아닐 터인데, 그저 상냥하게, 차분하게 나를 대했다. 나보다도 한참은 어른스러운 그 태도에 되려 다시 쓴웃음이 흐르려는 것을 참고, 나는 쿠로키가 건네는 물 컵을 받아 입안으로 흘렸다. 입안의 쓴맛은 지워지지 않았다.
사용한 붕대와 약재들의 정돈을 끝내고 약상자를 닫으며 그런 나와 쿠로키를 보고 있던 니이노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시고는 몸을 일으켰다. 다시 한 번 충분한 휴식을 강조한 뒤, 니이노 선생님이 홀로 의무실을 나가는 것을 보며 작게 한 숨이 흘러나왔다. 애초부터 치료를 도울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었던 듯, 쿠로키는 니이노선생님이 나가는 순간에도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다만 내가 건넨 물 컵을 받아 옆에 치워둔 그릇과 함께 놓고, 받쳐주는 팔이 없어도 내가 충분히 혼자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 등을 받쳐주던 팔을 거두고 구겨진 이불을 정리하며 옆으로 물러나 앉았을 뿐이었다.
이불 옆에 자세 바르게 앉은 쿠로키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 너머로 과거에 그가 했던 말이 들려오는 듯 했다.
'히코시로를 울리지 말아주세요.'
그렇게 말했었던가. 동그란 눈을 바로 뜨고, 겁 없이 선배를 올려다보며, 또렷하게, 강하게, 그렇게 말했었다. 제 친구를 울리지 말아 달라 부탁하는 그 목소리는 지독할 정도로 차분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듯 했었다. 이 아이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 내게 얼마나 잔인한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는 있는 걸까. 알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렇게나 곧은 눈빛을 할 수 있었던 거겠지.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어린아이의 순수함은 때로는 공포로 다가온다.
순수하게 보내오는 애정. 순수하게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 그 모든 것이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됨을 아이들은 모른다. 그렇기에 깨끗하고 올곧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봐 온다. 숨이 막혀왔다.
내가 좋아하는 그 녀석이, 너를 좋아하고 있어.
치졸하게 차오르는 독을 목구멍 너머로 삼켜 넘겼다.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봤자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모든 것이 수렁으로 빠지게 될 뿐이다. 그럼에도 이렇게나 목이 간질거리는 것은, 추악하기 짝이 없는 질투라는 놈 때문이겠지. 이렇게나 형편없는 나에게, 그 아이는 어떻게 그렇게나 따듯한 애정을 보내줄 수 있는 걸까.
"타케야선배"
차분하게 불리는 목소리가 다시 잠겨 들어가던 상념에서 나를 깨웠다. 눈앞에 있는 후배는, 정갈한 자세로 허리를 곧게 펴고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타케야선배, 선배에게 반드시 드려야 할 말이 있어요. 고된 치료로 피곤하시겠지만, 시간을 조금 내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애초에 거부권 따윈 없는 주제에. 비틀리게 돌아가는 사고에 조소가 튀어나왔다. 한심한 것에도 정도가 있다. 후배를 상대로 이게 뭐하는 건지.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삼킨 채 복잡한 표정으로 시선을 맞추자, 쿠로키는 별 다른 반응 없이 언제나처럼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우선 하나. 선배는 모르셨겠지만, 아니, 다른 아이들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사실 이번 실습에서 에고노키타케에 가기로 되어있던 건 우리 하반이었어요."
".....뭐..? 하지만 에고노키타케는 이반의 실습 장소였다고.."
"네, 히코시로가 그렇게 말씀드렸겠죠. 다른 아이들도 그렇게 알고 있고요. 하지만, 사실은 에고노키타케에 가야 했던 건 우리 하반이었고, 이반의 원래 실습 장소는 챠미다레아미타케였어요. 그것을 바꾸기를 원했던 것은 히코시로였고, 저는 받아들였죠. 애초에 온전히 학생들에게 맡겨졌던 실습이어서 따로 선생님들께 말씀 드릴 필요도 없이, 결과적으로 이반과 하반의 실습장소가 바뀌어 이반이 에고노키타케로, 하반이 챠미다레아미타케로 가게 된 겁니다."
"잠..깐만.. 뭔가.. 이상하잖아. 실습장소를 바꿨다고? 어째서..? 히코시로가? 왜..?"
조용한 의무실을 울리는 쿠로키의 말들에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분명 열은 전부 내렸을 텐데도, 마치 열이 있었을 때처럼 멍하니 울리는 사고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본래라면 하반이 가야했을 실습장소. 그곳에 그 아이의 부탁으로 이반이 가서, 그곳에서 죽어가던 나를 발견했다? 말도 안 된다. 닷새 전, 내가 임무를 수행하던 곳은 에고노키타케성의 북쪽 외곽지역으로, 숲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본래라면 짐승들만의 터전이어서 인술학원의 학생이 실습으로 올 리가 없는 곳이었다. 게다가 때마침 내가 임무를 하던 시기에, 때마침 이반이 실습으로 적당한 많은 곳을 놔두고 그곳에 가, 때마침 아슬아슬하게 목숨이 붙어있던 나를 그 아이가 발견했다? 우연일 리가 없었다. 우연일 수가 없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상한 것들 투성이 인 것을. 가볍게 넘겼던 그 아이의 말들 속에 감춰져 있던 많은 모순을 그제야 깨닫고 헛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쿠로키의 목소리가 여전히 차분하게, 나의 질문에 답을 한 것은 그리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정보가 있었으니까요. '타케야 하치자에몽은 그 날, 그 시간에 에고노키타케성 북쪽 외곽 지역 숲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닌자에게 쫒길 것이다. 추적자들이 노리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에고노키타케의 기밀문서. 그라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 문서를 빼앗기진 않겠지만, 그의 목숨은 장담하기 어렵다' 라는 정보가."
흐트러짐 하나 없는 표정으로 엄청난 것을 뱉어내는 쿠로키를 보며 나는 경악했다. 말도 안 될 정도로 정확한 정보였다. 너무 정확해서 위험할 정도로, 쿠로키의 입을 통해 나온 정보는 엄청난 것이었다. 에고노키타케의 기밀문서가 내 손안에 있다는 것은 나와 의뢰주 이외에는 알아서는 안 되는 사실이었다. 내가 그 숲에 있었다는 것도, 알려져서는 안 될 정보였다. 추적자들은 분명 전부 제거했다고 생각했는데.
"누구냐."
안락한 공간에서의 생활에 무뎌져 있던 감각이 곧추서는 것이 느껴졌다. 빙글빙글 도는 머릿속에서 다른 것들을 판단할 여력은 없어, 오로지 방금 전 쿠로키의 입에서 나온 정보에 대한 생각만이 맴돌았다. 남아있는 놈이 있다면, 죽여야 한다. 그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기밀문서를 빼앗겼다 하더라도, 내가 그곳에서 기밀문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그 사실 자체가 들켜서는 안 되는 정보였다. 죽여야 한다. 반드시.
그런 생각을 품고 눈앞에 있는 쿠로키를 바라보자, 아이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억눌린 듯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는 모습에 아차, 했다. 초조한 마음에 아이를 겁주어 버린 걸까. 미안한 마음에 최대한 눈가를 느슨하게 풀자 그럼에도 긴장감이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 굳게 한 번, 눈을 감았다 뜬 쿠로키가 다시 내게 시선을 맞춰왔다. 그런 쿠로키의 행동에 더욱 미안해져 조금 유한 말이라도 한 마디 건네 보려는 순간, 쿠로키의 입이 열리며 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오하마선배입니다."
"...... 하..?"
"그리고 오해하실까봐 미리 말씀드리자면, 오하마선배에게 그 정보를 주신 것은 타케야선배의 의뢰주이신 에고노키타케성의 성주님입니다. 타케야선배에게 기밀문서의 보호를 맡기셨지만 그 정보가 세어나가 상당수의 추적자가 타케야선배에게 집중될 것을 짐작하시고는 오하마선배에게 지원의뢰를 하셨다고, 오하마선배가 본인 입으로 저희에게 말씀해 주셨어요. 아, 타케야선배가 마지막까지 지켜낸 기밀문서는 오하마선배를 통해 무사히 에고노키타케 성주님께 되돌아갔으니, 그 점은 안심해주세요."
내 살벌한 기운에 놀랐을 아이를 달래기 위해 열었던 입은 아무런 말도 뱉지 못한 채, 다물어지지도 못했다. 예상치도 못했던 이의 개입, 예상치도 못했던 사건의 경과, 그리고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해결된 실패라 확정지었던 임무. 그 모든 것이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그 당혹스러움이 조금씩 가라앉아, 복잡하게 엉켜있던 실을 풀기 시작했다. 칸에몽. 그래. 칸에몽이었구나.
우수한 이반의 학급위원장이었던 녀석이었다. 그 아이와 같은, 학급위원장 위원회의 위원이자 쿠로키와 그 아이의 또 한명의 자랑스러운 선배. 짐짓 순진한 듯 장난스레 입 꼬리를 올리며 아이처럼 웃던 친우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헛웃음을 참지 못했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칸에몽의 개입은 많은 의문을 해결했다. 나의 임무와는 전혀 무관했던 인술학원의 아이들이 어떻게 나의 임무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지. 아이들이 어떻게 나를 찾아낼 수 있었는지. 그리고..
헛웃음 뒤에 내 입을 타고 흘러나온 것은 긴 한 숨이었다. 매끄럽게 풀린 의문에 대한 충족감과 분명 실패라 여기고 있던 임무가 성공한 것에 대한 안도감, 그리고 그 가운데 씁쓸하게 싹 터 있는 불만에 한 숨이 흘러나오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다. 지끈, 하고 또다시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왜 그런 중요한 일들은 아직 어린 후배들한테 말해버리는 거야, 망할 칸에몽녀석."
지끈 거리는 머리에 손을 얹고 조그만 목소리로 투정 같은 불만을 터트렸다. 그러자 가만히 그런 나에게 시선을 보내오던 쿠로키의 옅은 웃음이 배인 말이 들려왔다.
"오하마선배는, 후배에게 상냥하신 분이니까요."
"그런 건 알고 있.."
"타케야선배."
나의 말을 가르고 들어온 단호한 쿠로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말을 가로채는 것이 나쁜 버릇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이번 것은 어떻게 봐도 고의적이어서, 되려 놀라 쿠로키를 바라보자 언제 목소리에 웃음기를 담았냐는 양 그는 아까보다도 더욱 차분하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하마선배가, 어째서 저희들에게 굳이 그 정보를 주었다고 생각하세요?"
따갑게 한 마디.
그리고 한 마디 더, 그 입에서 내게는 버거운 말이 튀어나왔다.
"어째서 히코시로가 저에게 실습장소를 바꾸어 주기를 부탁했다고 생각하세요? 오하마선배에게 함께 정보를 들은 제가, 타케야선배의 위험을 알고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을 텐데. 하반에 있는 두 생물위원이 어떻게 해서라도 타케야선배를 구하고자 할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쿠로키가 내뱉는 말들이 하나 둘, 사슬이 되어 목을 졸라왔다.
어째서 칸에몽이 자신의 일을 후배들에게 알려줬을 거라 생각 하냐고?
씁쓸하게 피어오르는 해답이 숨을 막았다. 칸에몽이 자신의 두 후배를 굉장히 아끼고 귀여워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5학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학급위원장위원회에 들어가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귀여운 두 후배가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칸에몽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우리들의 관계를 눈치 채고 있었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해 보이는 그 웃음 뒤에 얼마나 빠른 눈치와, 얼마나 깊은 생각을 숨기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물론, 칸에몽이 직접적으로 나에게 그것과 관련된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마냥 무대포에 거침없는 것처럼 보여도 상냥한 녀석이었으니까. 내가 그 아이를 바라봐 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침묵해 주었을 터였다. 그것이 칸에몽이 나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최고의 상냥함이었다. 소중한 자신의 후배를 아프게 하는 나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의. 하지만 그런 칸에몽의 상냥함을 배신한 것은 내 쪽이었다.
바라봐 줄 수 없으면서도, 어설픈 상냥함이란 껍질을 뒤집어 쓴 욕심으로 그 아이를 받아들이고 말았으니까.
아이들에게, 그 아이에게 나의 상황을 알렸던 것은 그 나름대로의 복수였을까. 막혀오는 듯 한 숨에, 한 손으로 목을 감싸자 입 꼬리가 쓰게 올라갔다.
그리고, 어째서 히코시로가 실습장소를 바꿔주기를 청했다고 생각 하냐고, 그렇게 물었나.
지끈거리던 머리가 멍해지며 사고가 붕 뜸을 느꼈다. 슬픔과, 안타까움과, 그 외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파도처럼 몰려와 쓰게 미소 짓던 입술이 괴롭게 앙다물어졌다.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이반이라는 자긍심이 강한 그 아이가 어떤 마음으로 자존심을 숙여가며 하반에게 실습장소를 바꾸어 줄 것을 부탁했을지, 어떤 마음으로 에고노키타케로 달려왔을 지.
나도 모르게 그러쥔 주먹이 욱신거리며 통증을 호소했다. 만약 그 녀석이 나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답은 정해져 있었다. 달려갔을 것이다. 그 아이처럼. 자존심도 무엇도 다 버리고, 그저 그 하나만을 생각하며, 그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그 아이가 나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타케야선배."
다시 또 한 번, 강하게, 그럼에도 그 안에 분명한 상냥함을 담아 쿠로키는 나를 불렀다.
"히코시로는 선배를 좋아해요. 선배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이것이 제가 선배에게 반드시 말씀드려야 했던 것의 또 하나."
마주친 눈빛 속에 엄격함이 보인 것 같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 착각인 걸까. 어째서 알아주지를 않느냐고 책망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마 내 착각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짧게 심호흡하고, 두 손을 그러쥔 채, 쿠로키는 입을 열었다. 어쩐지 조금, 화가 나 보였다.
"히코시로는,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당신들이 생각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좋아서 당신들을 보고 있는 게 아니에요. 알고 있어요. 모르지 않아요. 그래도 좋으니까, 어쩔 수 없을 만큼 좋아하니까. 아파도, 힘들어도, 포기할 수 없는 거예요."
줄곧 곧고 단정했던 목소리가 흔들렸다. 가지런히 무릎위에 올려져 있던 두 주먹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분했던 걸까. 슬펐던 걸까. 똑바르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쿠로키의 눈에 물기가 아른거린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세상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알고 있어?
무엇을?
속이 울렁거렸다. 아까 마신 쓰디 쓴 약이 목구멍을 쑤시며 올라오는 듯이 목이, 입 안이 썼다. 도대체 지금 이 아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대체 무엇을 알고 있다고, 내게 이토록 절실하게 말하고 있는 건가. 크게 울렁이는 세상 속에 정신마저 울렁이는 것을 느끼며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토할 것 같았다.
"타케야선배"
도대체 몇 번이나 부르는 거야. 이제는 횟수를 거듭하기도 지칠 만큼 들려오는 부름에 귀를 막고 싶어져버렸다. 다그치듯 들려오는 부름에 그만하라며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틀어막은 입은 벌어지지 못하고, 그저 입술만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죄인처럼 숙인 고개 너머로 느껴지는 시선에, 차마 토해낼 수 없는 울음이 목구멍을 맴돌았다.
너는, 그 아이는, 전부 알고 있었나.
"히코시로는,"
움찔, 몸이 떨렸다. 차분한 음성을 타고 들려오는 이의 이름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파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편안해져, 울렁거리던 정신이 가라앉아 와, 그것에 또 놀라 두 눈이 크게 뜨여졌다. 숙여져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고, 아리는 눈으로 쿠로키를 시야 안에 담았다. 쿠로키는, 미소 짓고 있었다.
"선배를 좋아해요."
조용하게, 부드럽게. 아이를 어르듯, 어른께 간청하듯, 쿠로키는 목소리에, 표정에, 눈빛에 상냥함을 담아, 간절함을 담아, 내게 말했다.
"선배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훨씬 더 많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쿠로키의 곧은 시선을 피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리던 눈가가 뜨거워지며 코끝이 아파왔다. 어그러지며 젖어 들어가는 시야에 무릎을 세우고 두 팔을 세워 무릎에 기대어 숙인 고개를 묻었다. 최대한 숨을 죽이고 입술을 물어 보았지만 잇새사이로 새어나가는 신음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아득하게 멀어지는 청각 너머로 옷깃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나는 마음 놓고 숨을 뱉을 수 있었다.
왼손에서부터 번져간 온기가 온 몸을 뒤덮어 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작은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연못가에 앉아, 어린아이답지 않게 폭, 폭, 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처음 그 아이를 보았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저 아, 그 녀석네 후배구나. 그렇게 생각했었다. 저 어린 아이가 무엇이 저토록 심란한 걸까, 궁금하기도 했었다. 같은 위원회의 후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선배로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줄 수 있을까 싶어 다가가 물었었다.
'무슨 일이야?'
나의 물음에, 아니, 어느새 내가 뒤에 있었다는 것에 놀랐던 걸까. 우와악,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 휘청이다 연못에 빠져버리던 그 광경을 아직도 기억한다.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연못으로 뛰어 들어가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오자 그런 나의 품에 안겨 나를 보며 눈을 멀겋게 뜨던 아이의 모습 또한 생생했다.
작은 아이었다.
내 손바닥을 겨우 쥘 수 있을 정도로 작고 보드라운 손으로 내 손을 잡고 수줍게 뺨을 붉히며 웃던 작은 아이었다. 하지만 그 작았던 손은 어느 순간엔가 내 손을 포갤 수 있을 만큼이나 크고 단단해졌다. 늘 고개를 내려야 보였던 아이가 어느 순간엔가 고개를 돌리면 그 곳에 있었다. 마주 보면, 더 이상 아이는 크게 고개를 올리지 않아도 되었다. 나 역시 더 이상 고개를 크게 내리지 않아도 되었다.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져 어느새 그저 옆을 보면, 네가 있었다.
아이라고 생각했었다.
언제까지나, 그저 어린아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그래. 그것은 핑계였다. 어린아이니까. 그렇게 안일하고 비겁한 핑계를 대며 나는 줄곧, 줄곧 도망치고 있던 거였다. 한 곳만을 바라보기에도 벅차고 괴로운 이 가슴에 조금씩, 조금씩, 침투해오는 따스함이 너무도 버거워, 나는 고개를 돌린 채 아이를 보지 않고 있었다. 맞닿아오는 온기를 외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할 만큼 선명해 진 것은 언제부터였나.
늘 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아파하고, 괴로워하던 이 눈에 다른 이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죽음과 가장 가까운 그 순간에 그 녀석을 부르던 내 목소리만이 울려 퍼지던 그 아픈 공간에 나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언제부터였나.
그 역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대체 언제부터 나의 세상은, 그 아이의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나.
연분홍 꽃망울이 맺혀있었다.
자그맣게 고동색 가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 꽃망울들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날이 많이 따듯해졌다. 자신이 인술학원에 왔던 첫날만 해도 바람은 서늘했던 것에 비해 이제는 바람마저 포근했다. 아직 날이 완전히 따듯해지지는 않았지만, 봄의 기운이 완연하게 실려 오는 바람에 절로 입가가 느슨해졌다.
임무 중 심한 부상을 입고 후배에 의해 인술학원에 온 지도 벌써 시간이 제법 지났다. 이제 부상은 상당히 많이 호전되어 더 이상 몸을 일으키는 것에도, 음식을 먹는 것에도 후배의 도움은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 뿐인가. 지긋지긋할 정도로 오래 누워있었던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나, 지금처럼 정원으로 걸어 나와 채 피지 못한 꽃망울을 보는 것도 가능해졌다. 이제 그만, 이곳과 작별해야 할 때였다.
"타케야선배"
가만히 서서 벚나무 바라보고 있던 내 등 뒤로 기척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지런히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자 심해를 닮은 깊은 푸른색의 닌복을 입은 히코시로가 있었다. 저 색을 보는 것도 어쩌면 오늘로 마지막이었다. 그러자 많은 것들이 담겨있는 저 색이 어쩐지 종종 그리워 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아쉬운 마음을 담아 손을 뻗어 두건 끝자락을 만지자 히코시로가 당황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나올 것 같은 씁쓸함에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거두자 잠시 후, 히코시로의 입이 열렸다.
"가시는 건가요?"
조용하게 들려오는 물음에 짧게 응, 하고 대답하자 히코시로의 얼굴에 쓸쓸함이 번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으로, 금세 쓸쓸한 기색을 갈무리한 히코시로는 내게 빙그레 웃어 보였다.
"부디 몸 조심히."
그렇게 말하며 언제나처럼 웃고 있는 히코시로의 모습에 거두었던 손을 뻗어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조금 거칠게 흐트러지는 머리 아래로 히코시로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그렇게 있자 히코시로가 천천히 손을 뻗어 왔다. 느릿하게 뻗어진 두 손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쥐었다. 입술이 오물거렸다.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 조금 열렸다가 금세 닫히고, 또다시 열렸다가 닫히던 입술은 이내 굳게 다물려 옅은 호선을 그려내었다.
결국 히코시로는 다시 웃었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빙그레 웃으며 잡았던 손을 놓고, 나를 배웅했다.
그런 히코시로의 행동에 다시금 쓴웃음이 흘렀다. 분명 연인임에도 히코시로의 행동은 한 없이 조심스러웠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생각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자신의 생각을 요구한 적조차, 딱 한 번에 그쳤다. 언제나 가만히, 그저 빙그레 웃으며, 그 자리에서 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나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너는 홀로 아파했던 건가.
"히코시로"
내가 쉽게 떠날 수 있도록 한 걸음 물러서 있던 그 거리에 내가 발을 내딛었다. 딱 한 걸음이었다.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히코시로에게 다가가 두 팔을 뻗었다.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팔을 낮게 내리지 않아도 닿는 거리에 있는 히코시로를 끌어안았다. 히코시로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이 옷자락 너머로 선명하게 느껴져 왔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포옹한 것이 언제였더라. 그래, 그 때였다. 우리가 연인이 된 날. 이름뿐인 연인이 된 그 지독한 날에도 나는 히코시로를 이렇게 끌어안았었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가끔 만났을 때에도 그저 얼굴을 보며 차를 마시거나, 그것도 아니면 서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거나, 그것이 전부였다. 히코시로는 단 한 번, 가끔 만나달라는 그 사소한 부탁을 제외한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아니, 히코시로는 바라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바라지 못한 것이었다.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나를 보며 피멍울이 드는 가슴을 쥐어 잡은 채 웃었던 거다. 조심스레 바라보는 시선을 알아채지 못하는 나를 보며 쓸쓸하게, 아프게 웃었던 거다.
나와 같은 아픔을 겪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는 히코시로에게 나보다 더 큰 아픔을 안겨주고 말았다. 그것이 미안해서, 너무 미안해서, 그리고 고마워서. 그런 아픔 속에서도 나를 바라봐 준 것이, 포기하지 않고 곁으로 다가 와 준 것이 너무 고마워서, 사랑스러워서. 나는 품에 안은 히코시로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분명하게 느껴지는 온기가 너무나도 따듯했다.
"진급시험 통과한 거, 축하해."
굳어있던 등이 미약하게 떨리며 아, 하고 발음을 흘렸다. 그리고 다짜고짜 건넨 그 말에 조금은 풀어진 몸을 울리며 축하에 대한 감사를 돌려주려는 히코시로의 말을 끊고 나는 정말로 하고 싶었던 뒷말을 이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졸업식이겠네."
그것은 내가 히코시로에게 처음으로 한 재회의 약속이었다. 언제나 내가 소리 없이 인술학원으로, 아니면 히코시로가 외출했을 때 우연히, 그런 만남만이 전부였다. 단 한 번도 찾아가겠다는 말도, 만나자는 말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말하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고 싶었다. 멍청하고 비겁한 나의 이 마음이 전해질 거라 믿었다.
그리고 역시나 너는, 나의 믿음을 놓치지 않았다.
"정말..이죠..?"
조금씩 물기가 번져가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흐르고 말았다. 응, 하고 굳게 대답하자 떨림은 가진 팔이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져 나의 등을 감싸왔다. 천천히, 마치 예전처럼 달래듯이 등을 쓸어주자 히코시로가 움찔, 몸을 떠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에 슬퍼지는 마음을 삼키고 히코시로의 어깨에 잠시 고개를 묻었다. 나의 등을 감싸고 있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다시 살짝 고개를 들고, 나는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히코시로"
나의 행동에, 나의 목소리에, 나의 부름에, 무언가 눈치를 챈 것일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는 뜯어질 것처럼 강하게 나의 옷자락을 쥐고 있는 히코시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쩐지 목이 메여왔다. 잘 전달되어야 할 텐데. 너무 오래 아파한 그에게, 이 작은 목소리가 잘 들려야 할 텐데. 괜스레 걱정되어 어설프게 목을 다듬는 동안 어째서인지 눈가가 아려와, 눈을 감아버렸다.
따스하게 느껴지는 체온. 등의 옷자락을 움켜쥔 두 손. 물기가 섞인 듯 한 숨소리와 빠르게 고동치는 심장의 소리. 그 모든 것을 느끼며, 그 모든 것을 그리며, 나는 말했다.
"좋아해."
그 순간, 히코시로의 몸이, 숨이, 소리가 멈췄다. 하지만 이내 아, 으, 아, 하고 채 언어가 되지 못한 말이 히코시로의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얼음이 녹아내리듯이 사르르 풀리며 그제야 내 몸에 완전히 기대오는 몸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다만 등의 옷자락을 세게 움켜 쥔 손은 풀릴 기미도 없이, 강하게, 더욱 강하게 끌어당겨졌다.
귓가에 들려오는 흐느낌이 점차 커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어린아이의 울음과 같이 엉엉 소리를 내며 히코시로가 울음을 터트렸을 때, 나는 그저 다시 한 번 그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연분홍 꽃잎이 흩날렸다.
흐드러지게 피어 하늘하늘 춤추듯 떨어지는 꽃잎들을 보며 나는 찻잔에 입을 대었다. 그리웠던 시절, 그리웠던 이들과 함께 종종 찾아왔던 당고가게의 그리운 차 맛이 입 안에 짙게 퍼지며 깊게 머물렀다. 찻잔을 든 손은 내리고, 다른 한 손을 뻗어 옆에 놓아둔 접시 위의 당고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그 때와 조금도 변치 않은 그리운 단맛이 입 안을 채우는 것에 절로 입가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먹던 당고를 입에 물고, 나는 다시 손을 뻗었다. 접시 위에 놓여있던 당고를 하나 더 집어 들어 뒤쪽으로 건네자, 자연스레 뻗어져 와 내가 건넨 당고를 받아드는 손이 있었다.
"올 줄 알았어."
넌지시 건넨 말에 대한 대답은 조금 늦었다. 당고를 먹고 있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이었는지, 잠시간의 시간을 두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모르는 척하는 것이 참으로 그 다웠다.
"졸업식 말이야."
그의 모르는 척을 눈감아주며, 하지만 분명하게 말하자 또 다시 잠시간의 침묵이 생겨버렸다.
그 침묵에 쓴웃음이 지으며 나는 재촉하는 대신 가만히 정면을 응시했다. 흩날리는 꽃잎들이 부드러운 잔향을 싣고 코끝에 스쳐왔다. 찻잔을 내려놓고 그 옆으로 손을 뻗자 손끝에 걸리는 꽃잎들에 입가의 쓴맛은 사라지고, 절로 달큰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꼈다.
어떤 꽃을 좋아할지 몰라 한 참을 고민했다. 인술학원의 졸업식은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되려 굉장히 서글픈 날이었다. 안락했던 공간에서 쫓겨나, 차디찬 세상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날이니까. 더 이상 자신을 보호해 줄 방패도, 자신의 위험에 함께 맞서 줄 검도 없이, 오로지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그 시작의 날이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 나의 이 손으로 누구를 죽여야 할 지 모른다. 그런 가혹한 세계에 발을 들이는 그런 날에, 어쩌면 꽃은 굉장히 어울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축하하고 싶었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고, 당당하게 어른이 된 것을. 한 발자국 더, 나에게 가까워져 준 것을. 나는 기뻐하며, 축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꽃을 샀다. 답지도 않게 꽃다발을 끌어안고, 약속대로 이곳을 찾았다.
"기다리고 있을 거야, 분명."
지그시 눈을 감으며 조용하게 말했다. 그것은 나에게 하는 말이자 그에게 하는 말이었다. 움찔, 하고 아주 찰나의 아주 미세한 반응이었으나 그는 반응을 보였다. 드물게 솔직한 반응을 보이는 그 모습에 다시금 방금 전과는 다른 웃음이 흘렀다.
"사부로"
목구멍을 지나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너무나 평온해서 되려 내가 놀랐다. 이렇게나 쉽게 부를 수 있게 되었구나. 손끝에 닿아있는 꽃잎을 어루만지며 살며시 등을 기대었다. 상냥한 그는 피하거나 하지 않았다. 등 너머로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아니면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여전히 보이지 않는 그 얼굴에 씁쓸해지는 한 편, 더 이상 심장이 죄는 듯 한 고통은 없어, 그저 가만히 등을 기대고 내 심장이 평온하게 뛰고 있는 것을 느끼며 미소어린 말을 전했다.
"나, 널 좋아했었어."
다른 것을 바라본 여유도 없이, 오롯하게 바라보며. 이 목숨을 바쳐 너를 얻을 수 있다 한다면 기꺼이 그리 했을 만큼, 나는 너를 좋아했었다. 나를 등진 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차디찬 허공에 손을 뻗는 괴로운 나날이었음에도, 그것마저 사랑스러울 만큼 나는 너를 사랑했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팠던 사고가 유려히 흘렀다. 되짚어 본 기억은 고통스러운 것들뿐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그리 아프지 않았다.
"그래..."
그리고 맞대어진 등을 울리며 들려오는 조용한 목소리에 그만 웃어버렸다. 요령 좋은 주제에 곧게 부딪혀 오는 진심에는 언제나 서툴다. 그 뛰어난 연기실력으로 모르는 척 해도 되었을 텐데, 몰랐다며 거짓말을 뱉어도 되었을 텐데. 한없이 서툴게,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부로의 모습에 되려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지 못하며, 나는 등을 더욱 깊게 그의 등에 파묻었다.
사부로, 사부로.
나는 이제 이렇게 뒤돌아선 너의 등에 나의 등을 기댈 수 있게 되었다. 나를 부르지 않는 너의 목소리에도, 나를 향하지 않는 너의 시선에도, 조금의 씁쓸함은 남아있으나, 그럼에도 이렇게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가슴이 벅찰 만큼 좋았지만, 가슴이 찢어질 만큼 아팠던 너와의 시간이 이제는 괴롭지 않았다. 너와의 대화에 더 이상 나는 숨 막히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사부로, 사부로.
솔직히 지금은 아직 조금 아프다. 오랫동안 품어, 오랫동안 나를 태워왔던 불꽃은 아직 작은 불씨로 가슴에 남아, 너를 생각할 때면 가끔씩 데인 듯이 아파왔다. 하지만 사부로, 나는 이제 웃을 수 있었다. 지금 당장 다른 이의 옆자리에 선 너를 볼 자신은 없었지만, 훗날, 네가 그 사람 옆에서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본다면, 마주 웃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 될 만큼. 나는 이렇게나 괜찮아졌다.
그것을 너는 알고 있을까. 알아차렸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감정에 민감하고, 누구보다도 섬세했던 녀석이 나의 말에 담겨 있는 현재를 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부로는 천천히 맞대어진 등을 떨어뜨리고는 차분하게 시선을 마주해 왔다.
"하치자에몽"
고요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망설이는 버릇을 가진 친우의 것을 그대로 베껴낸 얼굴에서 흘러나왔다.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한 시선이 너무도 상냥해서, 어쩐지 눈가가 아릿해져 오는 것 같았다. 그런 나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 사부로는 옅게 눈가를 휘며 미소 지었다.
"고맙다."
상냥한 미소와 함께 내뱉어진 말에 헛웃음이 튀어나오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감사인 것일까. 놓아 보내준 것에 대한 감사일까, 아니면 지금껏 좋아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일까. 어느 쪽이든 지독하기 짝이 없는 외사랑을 제멋대로 완전히 종결지어버리는 그 잔인한 한마디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지었다. 하여간 성격 참 못됐다. 그것을 그대로 입 밖으로 꺼내 전했더니 사부로는 새삼스럽다는 듯이 웃는다. 예전과 같이 짓궂게 올라간 친우의 입 꼬리를 보며 나 역시 웃었다.
끝이었다. 정말로.
어딘가 후련한 듯한, 아린 듯한, 복잡하고 미묘한 감각을 느끼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보이는 하늘에 해는 어느새 중천에 떠 있어, 이제 그만 가야할 때를 알리고 있었다. 자리를 털고 몸을 일으켰다. 옆에 두었던 꽃다발을 손에 꼭 쥐고, 꽃을 보자 바보처럼 피어오르는 미소를 애써 억누르고 있자 일어선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부로의 시선이 느껴졌다.
굳게 다물린 입술과 가라앉은 시선으로 내 손에 든 꽃다발을 바라보고 있는 사부로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읽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아, 나는 방금 전의 복수로 조금 주제넘은 한마디를 건넸다.
"사부로, 후배를 울렸다간 무서운 너구리씨가 쫒아올지도 모른다?"
씨익,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사부로의 눈이 잠시 동그랗게 떠지더니 이내 바람 빠지는 듯 한 소리를 내며 피식, 웃었다.
"그것만은 사양하고 싶은데."
고개를 절래 절래 지으며 말하는 그 말에 동감하며 나는 웃었다. 사부로를 바라보며, 시선을 맞추고, 웃어보였다. 그런 나를 보며 사부로 역시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꽃다발을 든 반대 쪽 손을 들어 보이며 새삼스러운 인사를 했다.
"잘 지내!"
그렇게 말한 뒤, 몸을 돌렸다.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렇게 몇 걸음 전진하자 뒤에서 잔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야말로'.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하지만 분명한 상냥함을 담아 들려오는 목소리에 절로 웃음이 나와 웃으며, 나는 뒤돌아보는 일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꽃잎이 흩날렸다.
익숙한 흙길을 밟으며 나는 소중한 꽃다발을 한 번, 눈앞에 흩날리는 꽃잎들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 날, 오늘과 같이 어여뻤던 날에 네가 나에게 했던 것과 같은 축하의 말을 내뱉으며 이 꽃다발을 건네면, 너는 웃을까. 참을 수 없이 포근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