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치→아야칸→히코타케 순서로 한 사람씩 커플링을 맡았으며 아래의 링크를 따라가시면 다음 파트를 맡은 사람의 홈으로 이동됩니다.
저희끼리 놀며만든 사약이라 다소 불편하실 수 있으니 그 점은 미리 양해를..ㅠㅠ
“그리운 꿈을 꿨어.”
나른한 햇살을 쬐는 이불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잔잔했다. 아직 잠기운이 남아있는 것인지 평소보다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는 평온했고, 따스한 온기를 품은 이불 속에서는 뒤척이는 기색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느리게 뜨여지는 눈을 보지 못했다면 잠꼬대라 생각해버렸을 만큼. 칸에몽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는 미동도 없이 조용하고 작았다.
“어떤 꿈이었는데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칸에몽과 눈을 마주한 채 아야베가 물었다. 손을 뻗어 뺨을 쓰다듬자 햇살을 담은 뺨이 여느 때보다 온기를 띄는 것이 기분 좋아 아야베의 표정은 한 결 느슨해져 있었다.
깜빡.
깜빡.
그저 마주한 채 눈을 깜빡이기를 잠시. 제 뺨을 쓰다듬다, 눈가를 어루만지다, 귀를 건드리며 머리카락을 가지고 손장난을 치는 아야베의 손길을 가만히 둔 채 칸에몽은 다시 한 번 조금 굳게 눈을 깜빡였다. 밤잠에 마른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며 흘러나오려는 소리가 목구멍을 울렸다.
“인술학원.”
짧게 끊어진 한 마디에 아야베의 손길이 멈췄다. 마주친 눈은 깜빡이지 않았다. 잠시 그대로 가만히 바라보다, 눈이 가늘어지다, 언제 멈췄냐는 듯 다시금 손이 움직였다.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꼬아 건 채 귓불을 매만지던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갔다. 꼬아진 가닥이 스르르 풀어지며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치의 동물이 사육장에서 탈출해서 다 같이 찾는 꿈이었어. 너구리였나, 토끼였나.
턱 선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그대로 내려와 감싸 쥐듯 목에 손을 얹자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칸에몽의 입술이 벌어질 때 마다, 그 입에서 기분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 마다 옅게 떨리는 목울대의 감촉은 손목 부근을 간질이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는 거야. 인술학원 전체를 샅샅이 뒤져봐도 없었지.
잠시 그 기분 좋은 간질거림을 느끼다 완전히 팔을 뻗어 칸에몽을 감싸 안아버렸다. 아야베가 조금 더 가까이 붙어 고개를 숙이자 칸에몽의 쇄골 언저리에 코가 닿았다. 살내음이 났다. 이불냄새에 햇살냄새도 조금. 그리고 맡아지지는 않지만 분명 자신의 냄새도 가득 묻어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 아야베는 더욱 강하게 칸에몽의 몸을 끌어안으며 코를 묻었다.
그런데 해가 질 때쯤에, 하치가 어디선가 손수건 하나을 들고 왔어. 그 녀석이 매고 있던 손수건이었다나. 흙바닥에라도 구른 건지 더럽더라.
따듯한 온기 위에 제 고개를 얹고, 두 팔 안에 그 온기를 가두고. 이대로 다시 한 숨 잠들어 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아야베의 눈이 조금씩 감기고 있을 때 즈음, 자장가처럼 들려오던 목소리가 멎었다. 내려앉은 침묵 사이로 작은 새소리가 창 밖 멀리서 들려왔다.
짹짹, 짹.
잠시간의 평온한 침묵을 두고, 칸에몽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가버렸다고, 그렇게 말했어. 하치녀석, 엄청 서운한 주제에 ‘무사히 자연으로 돌아갔다면 그걸로 됐어’라면서 웃더라고. 그리고 그 다음에 다 같이 당고 먹으러 갔어.
그리 길지 않은 꿈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었는지, 더 이상 칸에몽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말은 없었다.
짹. 짹짹. 다시금 찾아온 평온한 침묵에 또 한 번 새소리가 내려앉았다. 잠들어 버린 건지 지긋이 감겨있던 아야베의 눈꺼풀이 작게 움직였다. 속눈썹도 함께 작게 떨리며 느릿하게 눈이 떠졌다가, 다시 감겼다. 어린아이가 잠투정이라도 하듯 칸에몽의 쇄골부근에 묻은 고개를 약하게 흔들며 몸을 더 밀착시키자 꿈 이야기를 하는 내에도 전혀 미동이 없던 칸에몽의 몸이 조금 흔들렸다.
차륵.
눈도 채 뜨지 않고, 졸음기 다분한 목소리가 아야베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당고 먹고 싶어요?”
웬일인지 대답은 조금 늦게 들려왔다. 귓가를 울리는 칸에몽의 목소리는 꿈 이야기를 할 때보다 조금 더 가라앉아있었다.
“그러네. 응. 먹고 싶어.”
이미 반쯤은 꿈속에 가 있던 아야베의 눈이 번뜩 떠 진 것은 그 때였다. 아야베는 묻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고, 바로 위에 있는 칸에몽의 얼굴을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깜빡.
깜빡.
서로 눈을 마주한 채 그저 깜빡이기를 잠시, 크게 떠진 아야베의 눈에 기쁨이 서리기 시작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옥죄듯 안고 있던 칸에몽을 망설임 없이 놓고 아야베는 나른하게 뉘여 있던 몸을 일으켰다. 햇살을 받아내던 이불이 걷히고, 그 반동으로 칸에몽의 몸 역시 조금 흔들렸다.
차락.
“지금 가서 사 올까요? 전에 타키가 이 근처 어디가 맛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 맞아. 요즘 단풍도 예뻐요. 예쁘게 핀 걸로 골라 꺾어 올까요? 더 먹고 싶은 건 없어요? 보고 싶은 건요?”
여느 때보다도 조금 빠른 목소리. 여느 때보다 조금 높은 목소리. 드물게 들뜬 얼굴을 햇살 아래에서 빛내며 아야베는 신이 난 아이처럼 칸에몽에게 계속 물었다. 칸에몽이 옅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모습이 또 좋아, 웃는 것이 좋아, 아야베는 일으켰던 몸을 다시 숙여 그 입술에 짧게 입 맞추고는 서둘러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왔다.
대충 옷을 걸쳐 입고 허리에 끈을 묶고 있을 즈음에 뒤에서 바스락거리며 칸에몽이 따라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잘그락.
“아야베”
잔잔하게, 자신을 부르는 칸에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에 또 놀라 세차게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먼저 바라보고 있는 칸에몽의 모습이 보였다. 아아- 사랑스러워라. 아야베는 눈가를 옅게 누그러트리며 다시 칸에몽에게 다가가 이번에는 조금 길게 그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었다.
입술이 떨어지고, 코끝이 닿는 거리에서 깜빡. 눈을 맞추고 깜빡이자 새삼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려버리는 칸에몽을 잠시 바라보다 아야베는 몸을 일으켰다. 뺨을 한 번, 머리를 한 번. 답지 않은 상냥함으로 쓰다듬은 뒤, 아야베는 칸에몽이 먹고 싶다는 당고를 사기 위해 몸을 돌렸다.
집을 나서는 아야베의 입가에는 참을 수 없는 행복함에 옅은 호선이 걸려 있었다.
“좀 더 주무시고 계세요. 금방 사 가지고 올게요.”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없었다.
햇살이 포근했던 아침에 처음으로 무언가를 바라던 칸에몽의 위해, 당고를 사 가지고 오던 길이었다. 지나던 길에 흔히 보이던 단풍나무 중 발견한 유난히 어여쁜 단풍나무. 그 가지를 꺾어 당고상자를 묶은 끈 사이에 끼웠다. 그가 좋아해줄까. 햇살 품은 포근한 집에서, 함께 그가 좋아하는 당고를 먹으면 얼마나 맛이 있을까. 붉은 잎새 송글송글 맺힌 단풍 나뭇가지. 그 어여쁜 가지가 끼워진 당고상자를 한 손에 든 채 아야베는 설레는 마음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오후 즈음에 도착한 집에는 아침의 포근함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텅 빈 이부자리. 풍겨오지 않는 익숙한 살내음. 해의 위치가 바뀌어 더 이상 따사로움이 비춰지지 않는 집안은 서늘하기까지 했다.
그런 그늘진 집 안을 보며 아야베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처음 비어있는 집 안을 봤을 때는 조금 놀라 눈을 크게 했지만, 그 놀라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마음이 가라앉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텅 빈 이부자리를 보며 가만히.
아야베의 시선이 향한 곳은 집안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오직 이부자리 위, 한 곳뿐이었다. 언제나 칸에몽이 누워있는, 앉아있는 그 곳.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다른 무언가를 할 때에도 칸에몽은 늘 그곳에 있었다. 단 한 순간도, 그 이불은 칸에몽의 온기를 잃은 적이 없었다.
아야베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발걸음으로, 여느 때와 다름없는 걸음걸이로, 벗지 않은 신 그대로 집 안에 들어갔다.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 들어가 칸에몽의 흔적이 가득한 이불 위에 앉아 사 들고 온 당고상자는 이불 위에 아무렇게나 두고는 주변을 살폈다.
그리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아도 찾는 것은 바로 근처에 있었다. 아야베의 손이 이불 한 구석으로 뻗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찰그락, 거친 쇳소리가 그늘 진 방 안을 울렸다. 손에 쥔 그것을 잡아당기자 차르륵하는 서슬 퍼런 소리를 내며 딸려오다가 어느 지점에서 그것은 단단하게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제법 힘을 주어 잡아당겨도 팽팽하게 쇳소리만을 내며 끊어지거나 부서지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보며 아야베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빠져나간 걸까.
하지만 그 의문 역시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불 위에 놓여 있던 둥근 머리 부분이 강한 힘에 의해 깨져있는 것이 보였다. 이불을 들춰보자 깨진 쇳조각들 사이사이 단풍처럼 흐드러진 붉은 자국들이 눈에 띄었다. 피어난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듯 자국들은 어여쁘게 붉었고, 하얀 이불자락에 옮겨간 것들도 군데군데 있었다. 아아. 그 무수한 흔적들을 보는 아야베의 눈이 가늘어지며 그 손끝이 자국에 닿았다.
단풍이 보고 싶으셨구나.
아야베의 입가에 다시금 옅은 호선이 걸렸다. 눈가를 느슨하게 풀어 상냥함을 담고, 눈앞에 놓인 단풍을 닮은 자욱들을 보았다. 닿은 부분에 조금 힘을 주어 쓸어내리자 손가락 끝에 색이 묻어나왔다. 참으로 어여쁜 붉은, 검붉은 빛이었다. 밖에서 꺾어가지고 온 나뭇가지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야베는 손가락 끝에 묻어난 색을 입술에 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붉게 흐드러진 단풍, 떨어지는 그 잎새 사이에서 어여쁘게 웃고 있을 사랑하는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저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어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손에 잡힐 것처럼, 당장이라도 그 목소리가 들려올 것처럼 생생해서 안달마저 날 지경이었다. 눈을 떴다.
너무나 어여뻤던 붉은 세계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자신이 그림자 드리워진 서늘한 집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아주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조금 멍하니 두 눈을 깜박, 깜박.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다시금 눈에 들어오는 것은 텅 빈 이부자리와 손에 들린 깨져버린 서늘한 쇳덩어리였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어루만지다, 아야베의 입에서는 짧은 탄성과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데리러 가야...”
으아아아 2014년 봄 즈음에 처음 사약게임으로 히코타케를 만들고... 그 후에 어찌어찌 10월 즈음에 산하치와 아야칸까지 탄생하게 되서.. 2015년을 꼬박 이 사약을 앓으며 살았네요ㅠㅠㅠㅠ 설마하니 소비러인 제가 합작까지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던.....
나름 1주년 기념(?) 이라 초심으로 돌아가보자..!!(????) 하는 마음으로 써내려 갔지만.. 잘 됐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ㅠㅠ
여하튼... 부족하기만 한 양심리스 글이라 많이 죄송하지만.... 함께 해 준 두 분꼐는 정말 감사드립니다..!!! 쓰는 동안 정말 즐거웠어요ㅠㅠ 앞으로도 함께 사약파티><...!(혼남
오후 수업이 끝나고 여느 때 같으면 위원회 활동이 있을 시간이었다. 오늘은 각 위원회의 위원장들이 중요한 실습을 나갔기 때문에 위원회 활동은 취소. 사실 위원장이 없으면 그 대리가 있는 만큼 위원회 활동 자체가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단순히 늘 있는 교장선생님의 변덕이었다. 야외 활동이 많은 생물위원회나 체육위원회가 아닌 이상 어지간한 위원회의 활동은 거의 실내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새삼스레 한탄하시며 내뱉은 갑작스런 위원회 활동 휴식. 이 좋은 날, 방구석에서 썩고 있을쏘냐! 하시며 다른 때보다도 조금 수업을 일찍 끝내고는 각 닌타마들에게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것을 명하셨다. 어떻게 봐도 그냥 본인이 놀러가고 싶은 거였다. 실제로 이미 가셨고.
물론 교장선생님의 의중을 모르는 닌타마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 의견에 반대하는 닌타마도 없었다. 아무렴 조금이지만 수업이 일찍 끝나는데다가 위원회 활동도 없이 주어진 자유시간이 반갑지 않을 닌타마가 어디 있을까. 그것은 교사들 역시 마찬가지 였던지라 왠일로 아무런 반대의견 없이 전원 자유시간이라는 교장선생님의 갑작스런 발상은 순탄하게 이루어졌다.
1학년들은 다 같이 소풍을 간다고 했다. 2학년들은 물가에 놀러 간다고 했던가. 3학년들은, 글쎄. 위원회 후배인 마고헤이가 자신의 애완동물들을 데리고 산책을 간다는 것 외에는 아는게 없었다. 4학년들도 마찬가지. 6학년들은 실습에 갔으니 아쉽게도 이 대대적인 자유시간을 만끽하지 못하고, 우리 5학년은.. 다 같이 사이좋게 헤이스케의 두부파티에 초대되었다. 울고싶었다.
두부파티는 식당 아주머니의 원조를 받아 식당에서 본격적으로 거행된다고 했다. 아니, 거행되고 있었다. 조금 전, 단념하고 터덜터덜 식당으로 향했을 때 진작에 붙잡혀 왔던 건지 칸에몽은 식탁에 엎어져 곧 찾아올 두부지옥에 울고 있었고, 라이조는 이미 각오를 굳힌건지 비장한 표정으로 식기를 나르고 있었다. 사부로는, 보이지 않았다.
도망친 건가!
그렇게 생각하기도 잠시, ‘늘 있는 그 나무 밑에서 자고 있지 않을까? 어제는 야외수업 때문에 정신없었으니까.’ 하는 라이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이미 다 같이 약속을 한 이상 사부로가 혼자만 도망치거나 하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 봬도 성실한 녀석이니까. 아마 라이조 말대로 수업이 끝나고 교실에 남아, 학급일지를 작성해 교무실에 제출한 후에 무의식적으로 자주 가던 나무 아래로 가 느긋하게 쉬다가 그대로 잠들어 버렸으리라. 어제 야외수업 때에도 학급위원장으로서 학급의 모두를 이끌었고, 그 뒤 학원에 돌아와서는 곧장 위원회 활동을 하고, 그 뒤에는 또 학급일지를 썼다고 했으니까, 오늘 쉬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헤이스케는 두부요리 중, 칸에몽은 내보냈다가는 절대로 도망칠 테고 라이조는 식기를 나르느라 바빠 결국 사부로는 내가 데리러 가게 되었다. 이대로 도망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잠시 뇌리를 스친 건 사실이었지만 역시 그건 무리. 그냥 잠든 사부로 옆에서 잠시 시간이나 때우다가 조금 느즈막히 들어갈까, 하던차에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며 ‘요리가 거의 다 됐어서 내가 데리러 갈까 했는데, 하치가 일찍 와 줘서 살았어’ 하며 웃는 헤이스케의 모습에 포기해버렸다. 늦었다간 분명 직접 데리러 올 터였다.
그리하여 두부냄새 폴폴 풍기는 식당에서 멀어진 나는 최대한 느릿한 발걸음으로 사부로가 있을 나무를 향해 걸었다. 중간 중간 마주친 닌타마도 몇 명. 가볍게 인사를 주고 받고 하는 사이 어느새 학원 뒤뜰에 있는 큼지막한 나무가 시야에 들어왔다. 예상대로 그 아래에는 나무 기둥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사부로가 있었다.
“사부로 찾았다!”
바로 앞까지 다가가 앉아 웃으면서 말하자 느릿하게 사부로의 눈이 떠지는 것이 보였다.
“...ㅂ..에는 ㅎ......에ㅁ..이...나.”
잠꼬대인가?
천천히 열린 입술 틈새로 웅얼거리는 듯, 알아들을 수 없는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딱 한 마디. 오직 한 마디만을 흘려보낸 뒤 닫힌 입술은 잠시 그대로 일자로 굳게 닫혀 있다가 이내 언제 그랬냐는 양 옅은 호선을 그려내었다. 잠시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는 듯 하던 사부로의 시선이 똑바르게 나에게 향했다. 언제나처럼, 사부로는 빙긋 웃었다.
“여- 하치. 무슨 일이야?”
태연하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사부로였다. 이제 잠이 다 깬 건지 언제나와 다름없는 미소를 두르고 내뱉어진 느긋하기 짝이 없는 말에 내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한 숨이었다.
도대체 언제 변장한 건지. 무시무시한 도깨비의 얼굴을 들이밀며 섬뜩한 목소리로 저주를 읊는 사부로를 밀어내며 ‘사부로!!!’ 하고 질색을 하자, 그제야 사부로는 키득키득 웃으며 도깨비 가면을 벗었다. 익숙한 라이조의 얼굴에 익숙한 사부로의 웃음기를 띄고 있는 얼굴. 그 짓궂은 얼굴에 절로 한 숨이 나왔다.
“장난은 그만하고 빨리 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다고.”
“에에-”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이는 사부로를 보며 절로 쓴 웃음이 나왔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나 역시 좀 더 사부로랑 노닥거리며 시간을 벌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까, 식당을 나오면서 들었던 헤이스케의 말. 직접 데리러 가려 했다며 환하게 웃던 얼굴을 떠올리자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솔직히, 방금 전 사부로가 썼던 도깨비 가면보다 무서웠다.
“가자, 사부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있는 사부로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싫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곧장 내 손을 잡고 일어날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잠시동안 사부로는 가만히, 내밀어진 내 손을 보고만 있었다.
“왜 그래?”
그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싶어, 쥐라도 난건가 싶어 묻자 사부로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내밀어진 내 손을 잡으며 사부로는 몸을 일으켰다. 사부로는 웃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그 시작은 어느 위원장 회의 날, 굉장히 사소한 대화 속에서였다.
위원장 회의는 각 위원회의 위원장들이 모여 작게는 각 위원회의 간단한 근황, 크게는 예산회의에 관련된 이야기까지 위원회와 관련된 중요한 말이 오가는 자리였다. 하지만 회의다운 회의를 하는 건 초반의 조금뿐, 거의 대부분의 시간이 각 위원회의 위원장들이 회계위원장에게 예산에 대한 불만을 토하거나 회계위원장이 예산에 관련해 각 위원장들에게 화를 내거나 하는 것에 쓰이는 것이 실상이었다. 그리고 아주 조금. 위원회 회의를 마치기 전의 조금은 그냥 가벼운 잡담을 나누기도 하는데, 이상을 느낀 것은 그 때였다.
얼마 전에 실습을 다녀온 6학년들이 닌자로서의 임무내용과는 크게 관련되지 않은 소소한 일들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헤이스케와 나는 다 식어버린 차를 마시며 가만히 듣고 있었다.
내용은 제법 흥미로운 것이었다. 변장을 주로 활용하는 뛰어난 실력의 프로닌자를 만났다는 이야기. 몇 번이고 마주쳤지만 그 사람이 모두 한 사람의 변장이었다는 것을 안 것은 임무가 다 끝난 후에 담당 교사을 통해서였다고.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하며 대단했지, 대단했어, 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6학년들의 모습에 나는 그저 차만 마시며 멍하니 생각하고 있었다.
'변장이라면 사부로도..’
물론 6학년들이 말하는 닌자는 프로인 만큼 아직 닌타마인 사부로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변장의 실력만이라면 사부로도 그리 쉽게 져주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특별히 사부로의 변장실력에 대한 과대평가 같은 것이 아닌 나름 뛰어난 닌자를 목표로 하는 닌타마로서 본 객관적인 시각에서의 생각이었다. 물론 같은 5학년으로서의 자부심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것은 헤이스케도 마찬가지였는지 마침 헤이스케는 중얼거리듯 사부로의 이름을 꺼내고 있었다.
“변장이라면 사부로도..”
그 말에 시선을 돌린 것은 한참 뛰어난 변장실력을 가진 닌자들에 대해 열띈 토론을 하고 있던 6학년들이었다.
“무슨 말 했어?”
“네? 아뇨. 특별히는..”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그 자리에 있던 6학년들 전원의 대화가 끊기고 그 시선이 자신을 향한 것이 부담스러운지 답지 않게 헤이스케의 말끝이 조금 길어졌다. 그러나 이내 그게 뭐 못할 말이었냐는 듯 확실하게 말을 이었다.
“5학년 로반의 하치야 사부로도, 변장의 실력은 뛰어난 편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 말에 대한 반응은 예상치도 못한 것이었다.
“하치야 사부로?”
마치 그게 누군지조차 모른다는 것 마냥 고개를 갸웃. 그것이 한 사람뿐이었다면 조금 짓궂은 장난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6학년 모두가 마치 짜기라도 한 것 마냥 다같이 그 이름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면, 이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헤이스케도 나도, 그 당혹스러움에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이리저리 시선만을 해매고 있었다.
짝.
그 기묘한 침묵을 끝내고 당혹의 늪에서 나와 헤이스케를 구해 낸 것은 손뼉소리였다. 아직까지도 커다랗게 뜨인 채 가늘어지지 못한 눈을 그대로 소리가 난 방향으로 향하자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한 표정을 짓고있는 6학년 보건위원장, 젠포우지 이사쿠선배가 있었다.
“아! 하치야!!”
그 말에 그제야 하나 둘, 6학년들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 하고.
그 다음에는 그냥 예상했던 대화의 흐름이었다. ‘변장’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이 인술학원에서 사부로를 빼 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어째서인지 사부로라는 이름조차 떠올리지 못했던 6학년들은 이후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사부로의 이름을 거론하기도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의문은 남아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던,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마저 그리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던, 도저히 이해가지 않는 의문이.
“왜 생각을 못했지?”
그 이상한 일은 그 때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언제였더라. 여느 때와 조금도 다를 것 없는 오후였다. 오후수업까지 끝내고 하루 일과 중 위원회 활동만을 남겨두고 있는 시간. 그 시간에 사육장으로 향하던 도중 학급위원회의 1학년들과 우연히 마주쳤다. 위원회 시간이 다 되도록 나타나기는커녕 회의 장소마저 공고 받지 못해 어떻게 해야할 지를 몰랐던 후배들은 자신들의 선배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거기까지는 이상하지 않았다. 후배들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기 전까지는.
“오하마 칸에몽선배를 보지 못하셨나요?”
학급위원회의 후배들의 입에서 늘 먼저 나오던 선배의 이름은 사부로였다. 결코 칸에몽을 우습게 알거나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것은 사부로가 학급위원장위원회의 위원장대리 격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칸에몽은 아직 위원회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르는 것이 많기도 했고, 교장선생님이 위원회 활동에 관련된 사항은 조금 더 오랫동안 학급위원회에서 활동해 왔던 사부로에게 먼저 전달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것은 학급위원회의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어서 칸에몽도 종종 위원회관련 일이 있을 때에는 사부로를 찾곤 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걸 뻔히 알고 있는 후배들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칸에몽이었던 걸까. 그 뒤에 이어서 사부로의 이름을 언급했다면, 두 사람 다를 찾고 있다는 생각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배려심 깊은 후배들은 혹시나 사부로만을 찾는 자신들의 행동이 칸에몽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까, 최근에는 두 사람을 함께 찾는 일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조금 시간을 두고 기다려봐도 두 후배들의 입에서 또 한 사람의 선배의 이름이 나올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되려 ‘어디계신지 모르시나요?’ 하고 후배들은 고개를 기울이며 재차 물어 올 뿐.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나.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 다투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사부로는 이미 만났고 그래서 칸에몽만을 찾고 있는걸까.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나 그것을 후배들 앞에서 그대로 드러낼 수도 없어,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글쎄, 칸에몽은 잘 모르겠는 걸? 사부로라면 아까 위원회 일 때문에 교장선생님께 간다는 걸 들었지만. 아, 혹시 이미 만났어?”
사실 조금만 더 생각해 봤으면 후배들이 사부로를 만나고 오지 않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후배들은 분명 회의시간을 공고받지 못해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없어 위원회 선배를 찾고 있다고 했었으니까. 사부로를 만났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고 그냥 칸에몽을 찾고 있다고 말했을 거라는 것쯤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불안했다. 이유 없이 피어오르는 불안감과 초조함,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질적임에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냥, 후배들이 ‘네.’라고 대답해 주기만을 바랐었다. 그 바람이 무너지기까지는 아주 조금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사..부로?”
내 말을 들은 후배들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며 나는 그것이 처음 보는 표정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저번, 위원장 회의시간 때 봤던 6학년 선배들의 표정이었다. 입술을 열어 그 이름을 내뱉고 있으면서도 어색함에 어찌할 줄을 모르는, 마치 전혀 모르는 타인의 이름을 담듯 조심스럽게, 그렇게 흘러나온 친구의 이름은 낯설기만 해서,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 하치야 사부로선배!”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동그랗게 커진 한 후배의 눈에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다른 후배의 눈에도 놀라움이 번졌다. 그리고 아.
그 다음에는 저번과 별 다름 없었다. 방금 전까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양 자연스럽게, 언제나처럼.
“그럼 저희도 교장선생님께 가 보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인 뒤 후배들은 조금 서두르는 걸음으로 교장선생님의 방으로 향했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멀어지는 발소리와 함께 들려온 후배들의 말소리. 의문이 범벅되어 있는 한 마디. 들려와 귓가를 침범하는 그 한 마디가 다시 사육장으로 향하려던 발을 멈춰 세웠었다. 등골이 오싹하게 저려오며 소름이 끼치는 감각을 그 때 처음 느꼈다.
“왜 생각을 못했지?”
그 후로도 그것은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언제부턴가 인술학원의 사람들은 늘 한 사람의 이름만을 부르고 있었다. 내가 라이조와 같이 있을 때에도 ‘후와 라이조’, 내가 사부로와 같이 있을 때에도 ‘후와 라이조’, 저 멀리 지나가는 라이조의 얼굴을 한 닌타마를 볼 때면 언제나 나오는 이름은 ‘후와 라이조’ 였다. ‘후와 라이조’의 가면을 쓴 ‘하치야 사부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들의 머릿속에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이 부르는 이름은 오직 ‘후와 라이조’였다.
한 사람이 있을 때에는 그래, 사부로가 늘 장난스레 ‘난 후와 라이조야.’ 라고 말을 해 왔던 걸 생각하면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처음에는 놀랐다가 그 다음에는 이상해했다가, 그 다음에는 또 아! 하고 무언가를 떠올린 듯 한 표정을 지었다가, 그러고 나서야 전처럼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그런 사람들의 표정 변화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해야할까.
그 뿐만이 아니었다. 5학년 로반의 학급위원장으로서, 한 학급의 리더로서 사부로의 일은 많은 편이었다. 과제가 있는 날에는 그걸 걷어 제출하는 것도, 교사의 전달사항을 받아오는 것도, 학급일지를 쓰는 것은 늘 하는 일이요, 야외수업이나 실습이 있을 때 모두를 이끄는 것 역시 사부로의 일이었다. 그 외에도 분명 내가 모르는 중요한 일들이 많을 터. 그만큼 사부로는 5학년 로반에서 빠트릴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5학년 로반은 사부로 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사부로는 있었다. 다만, 그들에게는 없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많은 일에서 그들은 저도 모르게 사부로를 제외시키고 있었다. 과제를 걷을 때, 그때그때 다른 녀석이 하려다가 중간에 사부로가 나서 그걸 받아들고 나서야 어? 하며 건네는 것은 일상이 이제 되어있었다. 교사는 수업시간에 채 전달하지 못한 사항이나 갑작스럽게 결정된 사항이 있을 때, 사부로를 찾지 않고 우연히 지나가는 학생에게 맡기게 되었다. 학급일지만은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사부로가 늘 제출하지만, 저번에 한 번. 사부로가 제출하는 학급일지를 받아든 교사가 ‘이걸 왜?’ 라는 표정을 짓는 걸 보고 그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야외수업이나 실습이 있을 때, 우리는 늘 사부로에게 의지했었다. 작전을 짜는 건 모두가 함께 했지만 각자가 있을 적재적소를 파악해 배치하고, 해야 할 일을 일러주는 것은 늘 사부로가 했던 일이었다. 모두를 한 데 모으는 것, 각자의 힘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 가장 중요한 그 일은 사부로의 일이었다. 그런 사부로를 제외시키고 위험한 실습을 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행히 작전회의 중간에 내가 사부로를 불러 모두가 사부로의 존재를 생각해 낸 덕분에 최악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 때를 상상하면 언제나 등골이 오싹했다.
한 번은 불같이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좋은 콩이 들어와 좋은 두부를 만들었다며 헤이스케가 저녁에 다 같이 두부전골을 먹자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식당에서 상 위에 놓여진 커다란 냄비 하나를 보고 슬며시 안도하던 것도 잠시, 놓인 의자가 네 개뿐이라는 것에 얼마나 당황했던가. 그 자리에 있는 인원이 헤이스케와 칸에몽, 라이조와 나 뿐이었다는 것에 얼마나 화가 났던가.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는 나를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그 눈에 얼마나, 얼마나.
그 때, 사태를 진정시킨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사부로였다. 언제 들어 온 건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화를 내던 내 목에 태연스레 팔을 두르곤 농담 한 마디.
‘이 형님이 그렇게 보고 싶었냐, 하치?’
언제나와 같은 짓궂은 웃음을 두르고 던진 장난스런 그 한 마디에 맥이 다 풀렸었다. 사부로를 보고 다른 친우들이 눈에 의문을 담아 동그랗게 떠지는 것도, 이내 그 눈이 커지며 아! 하고, 이제는 정해진 수순마냥 외치는 것도, 곧장 굉장히 당황하는 얼굴로 미안하다 사과하며 의자를 가져오는 것도. 그 때에는 이유모를 허탈함에 너무 기운이 빠져 신경 쓰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친우들의 정신없는 사과에 괜찮다며 옅게 웃는 사부로를 보며, 미친 듯이 울고 싶어졌었다.
그 때 알았다.
사람들은 사부로를 잊어가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먼 기억부터 조금씩, 아니면 가까운 기억부터 조금씩 잊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어느 순간 갑자기. 사람들은 사부로를 잊었다. 처음 그걸 눈치 채기 시작했을 즈음에는, 그래도 사부로의 이름을 들으면 곧장 다시 생각해 내곤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무뎌져, 이제는 사부로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사람들은 사부로를 기억해내지 못하게 되었다. 사부로가 눈앞에 나타나도 당연하다는 듯 ‘후와 라이조’를 불렀다. 두 사람이 같이 있을 때, ‘어?’ 하고는 기묘한 표정을 짓는 경우도 많았다. 방금 전까지 사부로를 보고, 사부로를 기억했으면서도 돌아섰다 다시 보면 ‘라이조’ 라고 부르는 경우는, 더 이상 손에 꼽을 수도 없었다.
잊혀지고 있었다. 지워지고 있었다. 사람들 안에서, ‘하치야 사부로’ 라는 존재 자체가.
헤이스케도, 칸에몽도, 그리고 라이조도.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사부로를 기억 속에 붙잡아 놓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사부로는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알아버린 나는 사부로를 찾았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걸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사부로는 뭔가를 알고 있을까. 이 사태를 멈출 방법은 없을까. 모두의 기억 속에 다시 사부로를 돌려놓을 수는 없을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사부로를 찾는 건 의외로 굉장히 간단했다. 늘 있는 뒤뜰의 나무 아래. 오늘도 분명 거기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달려갔더니 과연 그 자리에는 ‘후와 라이조’의 얼굴을 한 누군가가 서 있었다. 라이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부로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다가가, 이름을 불렀다.
“사부로!”
돌아 본 사부로는 웃고 있었다.
“여- 하치. 무슨 일이야? 설마 또 두부지옥으로 날 데려가려고 온 건 아니겠지?”
여느 때처럼 장난스럽게.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양. 그렇게 웃으며 되도 않는 농지거리를 뱉어내는 사부로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울화가 터져 나왔다.
“너..!!”
나도 모르게 움켜 쥔 멱살에 사부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수평을 그리고 나로서는 도무지 읽을 수 없는 표정이 라이조의 가면 위로 올라왔다. 그것을 보며, 괜스레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화가 아니었다. 그저, 그저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너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대체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아니, 해결 방법은 있는 건가. 모두 원래대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너는 그걸 알아? 아니, 아니.
“너.. 괜찮아..?”
목 안쪽이 아려와 제대로 나오지 않는 말을 겨우 뱉었다. 눈가가 뜨거웠다. 코끝이 아파왔다. 얼마나, 얼마나 끔찍했을까. 얼마나 끔찍한 기분일까.
모두가 자신을 잊는다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소중한 사람들의 기 억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나를 보며 ‘누구?’ 라고 묻는 친구들을 보는 기분이 얼마나 끔찍할지, 얼마나 괴로울지. 나로서는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저 상상만으로도, 옆에서 보는 눈으로도 너무 괴로워서, 숨이 막혀와서.
“하치자에몽.”
그럼에도 너는 왜 웃고 있는 거야.
“안 잊어..”
이를 악물었다.
“절대 안 잊을 거야. 전부 잊어도 나는..! 나는.. 널 기억할거야. 안 잊어.. 사부로, 나는..! 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쩌면 이미 울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모두가 사부로를 잊어갈 때,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것만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사부로를 잊지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딱 한 가지 만이라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나의 말에 사부로는 웃었다. 눈꼬리를 내리고, 입꼬리를 올리고. 너무나 지쳐버린, 그런 얼굴로. 사부로의 입술이 열렸다.
“그 말은 이미 수십 번도 더 들었어.”
찌르르, 이름 모를 산새가 울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무언가 사라져버린 기분. 방금 전까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데, 그 말이 뭐였는지 갑자기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눈가가 시큰했다. 왜지?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하다 바로 앞에 있는 기척에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익숙한 얼굴의 친구가 있었다.
“아, 미안.. 방금 우리 무슨 말 하고 있었더라?”
방금 전까지지 무슨 대화를 하고 있던 것 같은데, 그 내용이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머쓱하게 뒷더머리를 긁으며 눈꼬리를 내리고 사죄의 말을 하자 상냥한 친구는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 말에 더욱 머쓱해져 한 번 더 사과를 했다. 그러자 그 녀석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보다 하치자에몽, 오늘 숙제 있는 건 알고 있어?”
“엑?! 진짜?”
분명 수업시간에 졸았던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우수하고 성실한 녀석이 하는 말이니 거짓말일리는 없어, 과제 내용을 묻자 그 녀석은 역시 상냥하게 웃으며 알려주었다. 잠깐 딴 생각이라도 했었나보다.
다행히 과제 내용 자체는 그다지 어려운 게 아니었다. 오늘은 분명 위원회 활동도 없으니 빨리 끝내고 헤이스케랑 칸에몽도 불러서 저번에 신베가 맛있다던 당고집에나 갈까. 그렇게 생각해 그 말을 전했더니 그녀석도 좋다며 웃었다. 과제는 진작에 먼저 끝냈다는 말을 듣고, 결국 남은 건 나뿐이라는 생각에 서둘러 몸을 돌렸다. 지금 바로 기숙사로 돌아가 숙제를 하면 친구들을 그리 오래기다리게 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렇게 서둘러 몇 걸음 옮기다, 아직 잊고 있던 숙제를 알려준 것에 감사인사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몸을 돌렸다. 큰 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알려줘서 고마워, 라이조!”
내 부름에 라이조는 빙그레 웃었다.
찌르르, 이름 모를 산새가 울었다.
오후수업이 끝나고 다른 때 같으면 위원회 활동에 바쁠 시간. 언제나 찾는 뒤뜰의 큰 나무 아래에서 정신이 드는 것을 느꼈다. 눈은 뜨지 않았다. 잠시 그대로 가만히 있자, 익숙한 기척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목소리가 들렸다.
“사부로 찾았다!”
불린 이름에 천천히, 느릿하게 눈을 뜨자 눈앞에 낯익은 얼굴의 한 닌타마가 보였다. 나무아래, 기둥에 기대어 앉아 잠들어 있던 나를 보고 있는 그 녀석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는지 여러 음식냄새 사이로 짙은 두부냄새가 풍겨왔다.
한 여름의 뜨거운 공기를 가르며 비행기는 이륙하고 있었다. 달궈진 아스팔트 위를 거침없이 내달리던 커다란 기계새는 활주로의 끝에 이르렀을 즈음 대가리를 쳐들며 하늘로 날 준비를 했다. 이윽고 하늘을 향해 지상에서 완전히 그 큰 몸뚱이를 떼어냈을 때, 내 입술 틈새로는 탄식과도 닮은 숨이 흘러나왔다. 등 뒤에 달라붙어 나를 옥죄던 두 팔이 내쉬어진 숨과 함께 더욱 강하게 조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숨이 막혔다.
“놔.”
“좋아해요.”
다시 한 번 한숨이 흘렀다. 어느새 높이 날아,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비행기를 쫓아 유리창에 손을 대자 몸을 옥죄던 두 팔에 힘이 실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차피 떠나가는 비행기를 잡아 탈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텐데. 더, 더 강하게 조여드는 팔에 숨이 막혀와 하는 수 없이 유리창에 닿아있던 손을 내렸다. 숨통은 트이지 않았다.
“좋아해요.”
그리고 다시 한 번. 또 한 번.
몇 번이고 반복되는 말이 귓가를 울렸다. 좋아해요. 좋아해요. 마치 주문처럼, 흘러나오는 말은 귓가를 간질이다 그 안으로 파고들어 와 머리를, 가슴을 울렸다. 그렇게 한참을 울리는 고백 속에 잠겨있다 화를 낼 기운마저 빼앗겼을 때 즈음, 한숨처럼 흘러나온 목소리는 예상보다도 훨씬 차분했다.
“티켓 내놔.”
대답은 없었다. 달리 반응도 없었다. 하지만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강하게 둘러진 팔 한 쪽이 내 몸에서 떨어져나가, 그 손을 제 바지 주머니로 찔러 넣는 것이 보였다. 그 상태로 잠시 머뭇거리다 나온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구깃구깃한 비행기 티켓 한 장. 그렇게 내놓으라고 닦달을 하고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은 그저 의미 없는 종이쪼가리가 되어버린 영국행 비행기 티켓이었다.
“좋아해요.”
몸에 둘러져 있던 다른 한 쪽 팔도 풀어 내리고 그 의미 없어진 종이쪼가리를 건네받아 손 안에 놓자 기다렸다는 듯 또 한 번. 그에 잠시 시선을 마주하다, 몸을 돌렸다.
밖이 훤히 보이는 유리창을 뒤로하고 걸었다.
지금이라도 떠나려면 떠날 수 있었다. 골치 아프게 생각할 거 없이 곧장 영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비행기를 찾아 티켓을 끊어, 이번에는 빼앗기지 않고 잽싸게 탑승수속을 밟아버리면 그만이었다. 일반지역을 벗어나 면세지역으로 가버리면 어차피 따라오지도 못한다. 그 후에는 느긋하게 커피라도 마시며 시간을 때우다가 비행기에 탑승하면 만사 해결. 예정대로 영국으로 가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 유학생활을 보내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냥, 다, 귀찮아져버렸다.
어제 저녁에 고생해서 싼 캐리어를 한 손에 끌고, 한 손에는 시간 지난 티켓을 쥐고 걸었다.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에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힐끔. 손에 들려있는 종이쪼가리를 잠시 보다 멈춰 서서, 캐리어를 놓고, 지익.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손에 남은 쪼가리들을 마침 발견한 쓰레기통에 버리자 뒤따라오던 발소리가 멈췄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뒤를 돌아, 눈이 마주치고,
깜박. 깜박.
잠시 후, 눈꼬리가 짙게 휘어지며 기쁘게, 정말 기쁘게 그 녀석은 웃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날 떠나지 않은 것을 미치도록 후회했다.
굳게 감긴 눈꺼풀에 쏟아지는 밝은 햇살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은 뜨지 않았다. 잠시 그대로 눈을 감고 있자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톡, 톡, 톡, 톡. 오직 그 소리뿐이었다.
몸을 일으킨 것은 톡톡 하는 초침 소리가 몇 번이고 울린 후였다. 다시 잠에 빠져들 것처럼 몽롱하게 뜨는 정신을 재촉하듯, 눈꺼풀을 두드리는 햇살에 못 이겨 결국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걸터앉아 졸음이 달아나지 않는 머리통을 쥐고 앉아있기를 몇 분. 침대 위를 더듬어 베개맡에 놓인 핸드폰을 봤을 때, 액정에 비친 시간은 이미 오후라 불러도 어색함이 없을 느지막한 오전을 나타내고 있었다. 늘 일어나는 시간이었다.
브런치는 여느 아침식사보다 간단하게 때웠다. 구운 식빵에 언제부턴가 냉장고 한편을 차지하고 있던 잼을 발라 대충 씹어 넘기고 커피를 내려 마셨다. 익숙한 향이 코끝을 간질이는 것을 만끽하며 한 모금, 또 한 모금.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는 내내 따듯한 커피를 마시자 목 언저리에 한 줄기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차갑게 마시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잔을 내려다보자 조금 남은 미지근한 커피의 표면이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한꺼번에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창문을 연 김에 간단하게 청소를 하고 창문을 닫았다. 에어컨을 틀까, 잠시 어젯밤 소파에 던져 놓았던 에어컨 리모컨을 들고 고민하다 결국 오늘도 관두었다. 대신 욕실로 향해 밤새 흘렸을 땀을 간단하게 씻어내고 나와 외출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이 더운 날, 그것도 햇볕 쨍쨍한 이 시간에 나가는 건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한숨을 내쉬며 결국 신발을 신었다.
푹푹 찌는 땡볕 아래를 한참 걸어 도착한 곳은 이 주변에서 가장 큰 병원이었다. 지어진 지 제법 오래되었다고 들은 병원 건물은 관리를 잘 해서인지 전혀 그런 티가 나지 않았고, 나름 공원 분위기를 내어 만든 산책로도 나쁘지 않았다. 산책로를 지나 입구에 닿는 그 길도 제법 자연적인 분위기를 풍겨 전체적으로도 좋은 인상의 병원이었다. 다만 날씨 탓인지 다른 날 같으면 산책로 곳곳에서 휠체어를 타고, 혹은 링겔대를 끌고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을 것을 오늘은 한산하기만 했다. 역시 너무 더웠다.
병원 입구에 들어서자 조금 시원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이곳까지 걸어오느라 흘린 땀을 식힐 정도는 아니었다. 면역력이 떨어진 환자들이 많은 곳이다 보니 온도조절도 중요한 모양인지 병원 내부에 감돌고 있는 공기는 전체적으로 조금 미지근한 정도. 하지만 늘 그랬던지라 새삼스레 불평할 마음도 들지 않아, 이제는 눈을 감아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머, 하치야씨.”
조금 분주한 카운터부근을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을 때, 익숙한 얼굴의 간호사를 만났다. 늘 이 시간에 있는 간단한 검진을 위해서인지 한 손에는 볼펜 끼워진 차트를 들고 먼저 인사를 건넨 간호사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 언제나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건네 왔다. 그에 마주보고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나카무라씨.”
그리고 나서 오가는 대화는 정말 사소한 것들뿐이었다. 오늘 날씨가 참 덥죠, 기껏 구해 온 신선한 재료들이 상하지 않을까 주방 분들께서 걱정이 많아요, 어제도 열사병으로 실려 오신 어르신이 계셨는데.... 등등. 흔한 날씨 화제나 병원에서 늘 있을 법한 일들, 아니면 조금 특이했던 일들. 씩씩한 목소리로 쏟아져 나오는 소소한 이야기들에 맞장구치며 나누는 대화는 익숙한 분위기 속에서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한 층, 그리고 한 층. 한 층의 높이가 넓은 탓에 다른 건물들보다 오르는데 조금 시간이 걸리는 엘리베이터가 3층에 도착했을 때, 문이 열렸다. 매일 3층 병동의 간단한 검진을 하고 있는 나카무라씨와는 소소하게 나누던 대화를 마치고 간단하게 인사를 나눴다.
한 걸음. 열린 엘리베이터 문을 앞두고 잠시 발을 멈춘 나카무라씨가 뒤를 돌아 그대로 다음 층으로 향하려던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사람을 보살피고, 포기하지 않는 강하고 상냥한 눈이 내 두 눈에 닿아왔다. 그리고 한 마디.
“꼭 깨어나실 거예요.”
방금 전까지의 씩씩한 목소리는 어디에 두었는지 씁쓸함이 한 숟갈, 그러면서도 결코 상냥함과 강함을 잃지 않는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언제나와 같이 희망을 주는 말에 입 안에 쓴 맛이 도는 게 느껴졌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런 말이 목구멍 언저리에서 맴도는 것은 어렵지 않게 억누를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양껏 입술을 끌어 올렸다. 나의 표정에서 무엇을 읽은 것인지 다시금 미소어린 얼굴을 하고 엘리베이터를 나서는 나카무라씨에게는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더운 공기가 훅 풍겼다. 아침에 환기를 위해 간호사가 창문을 열어 놓았는지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매미 우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가장 먼저 창문을 닫고 병실 한편에 놓인 작은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 이곳까지 오는 동안 마른 목을 축였다.
제법 넓지만 늘 정돈을 해 주는지 언제나 깨끗한 개인병실은 시설도 나쁘지 않았다. 환자가 누워있는 침대, 그 옆에 놓인 보호자용 의자, 환자용 침대 맞은편에는 보호자용 간이침대가 있고 그 옆으로 작은 냉장고까지 있었다. 환자용 침대 옆에 놓인 목재로 된 깔끔한 선반 위에는 작은 꽃병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꽃은 꽂혀 있지 않았지만. 실용적이고 깔끔한, 충분히 좋은 병실이었다. 정작 누워있는 당사자는 아직까지도 그 사실을 모르지만 말이다.
주인이 모르는 좋은 병실은 조용했다. 열려있던 창문으로 들어와 시끄럽게 병실 안을 울리던 매미의 울음소리마저 닫힌 창문과 함께 물러난 병실은 어떠한 소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페트병에 담긴 물을 병 채 마시고 냉장고에 집어넣어 문을 닫는 소리만이 그나마 있는 소리였다. 그마저도 내가 걸어, 병실에 하나뿐인 침대에 다가가 침대 옆 의자에 앉기까지의 소리가 사라진 후에는 그야말로 침묵. 간간히 공기 중에 섞여 흐르는 들릴 듯 말 듯한 숨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병실에 울리지 않았다. 두 사람분의 숨소리만이 조용히, 그저 조용히 공기 중에 섞여 있을 뿐이었다.
손을 뻗어 잠들어 있는 병실 주인의 코끝에 손을 대 보았다. 살아있다는 것, 숨을 쉬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너무 조용해서, 답지도 않게 너무 조용하게 자는 모습에 언제부턴가 한 번씩 이렇게 확인을 해 보게 되었다. 숨을 잘 쉬고 있는 것을 직접 확인한 뒤에는 어김없이 밀려오는 짜증에 코끝에 대고 있던 손을 떼 그 손등으로 이마를 약하게 쳐버리지만. 그럼에도 일어나지는 않았다.
“산노스케.”
이름을 불러봤자 일어나지 않을 것 역시 알고 있지만 어째서인지 이것 역시 언제부턴가 한 번씩은 꼭 불러보게 되었다. 혹시나 오늘은 일어날까. 내 목소리를 듣고, 내 부름을 듣고 지긋지긋한 잠에서 깨어날까. 예전처럼, 잘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줄까. 이제는 거의 사라져버려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은 기대를 가지고 불러보는 이름에,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산노스케가 이곳에서 이렇게 잠을 자게 된 지는 벌써 제법 시간이 흘렀다. 분명 처음에 왔을 때에는 봄이었으니, 한 계절이 바뀔 정도의 시간동안 계속 잠들어 있다는 것이 된다. 원인은 교통사고였다.
처음 그 연락을 받고 하던 일도 내팽겨쳐둔 채 병원에 달려왔을 때, 멀쩡한 모습으로 눈만 감고 누워있는 모습에 열이 뻗쳤었다. 두들겨 깨울까하다 그래도 환자라고 내버려 뒀더니 그렇게 하루, 또 하루가 지나도록 산노스케는 일어나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에는 욕지기밖에 나오지 않았다. 잠든 녀석 머리맡에서 하루 온종일 욕을 퍼붓기도 하고 일어나라고 퍽퍽 치기도 하고, 온갖 성질이란 성질은 다 부렸었다. 이주일정도 지났을 때는 그냥 화가 나서, 누구는 유학도 못 가게 붙잡아 놓은 주제에 지는 홀랑 잠들어 깨어나지 않는 것에 화가 뻗쳐서 다시 유학을 가버릴까 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짐까지 챙겨 공항까지 갔었다. 결국 탑승수속조차 밟지 못하고 돌아와 버렸지만.
그렇게 삼주, 사주, 한 달이 지나고 이제는 계절이 바뀌었다. 화냈다가, 욕 했다가, 신경을 끄자고 무시도 했다가, 하지만 결국 이 자리였다. 멍청한 얼굴로 쿨쿨 퍼질러 자고 있는 망할 산노스케의 옆. 언제나 결국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 작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었다.
손을 뻗어 침대 위에 놓여 있는 산노스케의 손을 잡으려다 관두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잠들어 있는 연인의 손을 꼭 잡고 울면서 이름을 부르는 짓거리는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내키지 않았고 나답지도 않았다. 시험 삼아 한 번, 아니 두 번 정도. 손을 잡고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 때에도 산노스케는 미동이 없었다. 그래서 그 후로는 그냥 관두었다. 대신 푹신한 침대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고 앉아 책을 보거나 그냥 잠든 녀석의 얼굴을 보거나. 그게 일과였다.
가만히 잠든 산노스케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귓가에 생생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 날, 유학가기 위한 비행기에 타려다가 이 제멋대로인 놈 덕분에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결국 이곳에 남았던 날. 그 날 산노스케가 계속해서 속삭였던 말.
좋아해요. 좋아해요.
귓가를 울리다 그 안으로 파고 들어와 머릿속에서, 가슴 한켠에서 맴도는 그 목소리가 계속해서 발길을 이곳으로 이끌었었다. 더운 것은 딱 질색에 가능하다면 방학 동안에는 하루 온종일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놓은 집안에서만 뒹굴고 싶은 마음과는 반대로 언제나 눈을 뜨면 결국 나는 이곳으로 왔다.
그것은 주문이었다. 아니, 세뇌에 가까웠다. 그깟 말이 뭐라고. 그깟 고백이 뭐라고.
수십 번, 수백 번을 뱉어낸 말이 다시 목 끝까지 차올라 혀끝을 간질였다. 당장이라도 혀를 지나 입술을 박차고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말은 언제나 눈가를 아리게 만들었다. 그것이 싫어서, 죽도록 싫어서 이를 물어 삼켜내려했다. 그 큰 덩어리를 꾸역꾸역 다시 목구멍 안으로 집어넣어 잠잠하게, 덤덤하게, 나답게.
그렇게 삼켜내려 했건만, 결국 오늘도 그러지 못했다. 어느새 목구멍을 넘어와 혀끝에서 울렁이던 말이 결국 터져나와버렸다. 그 말이 나조차 놀랄 정도로 짙은 물기를 머금고 있어, 눈이 아려와, 코끝이 저려와,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다른 한 손까지 들어 더욱 단단하게 덮어버렸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머리위로 내려앉는 따사로운 햇살. 마지막은, 그래. 오늘과 같이 따듯한 날이었다. 하늘하늘 흩날리는 벚꽃잎 아래, 그립고도 익숙한 간판 앞에 서서, 그렇게 이별했다. 서로가 마지막이라고 바라던, 바라지 않던 그 순간에, 두 주먹을 맞대며, 너는 뭐라고 말했더라. 나는, 뭐라고 대답했더라.
익숙한 마을, 익숙한 거리. 행복했던 그 시절 몇 번이고 밟았던 거리를 걸으며 하치자에몽은 굉장히 오랜만에 마음 한 구석이 느슨해지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만의 휴가였더라. 인술학원을 졸업하고, 그럭저럭 괜찮은 성에 취직해 일하고, 일하고, 또 일했다. 때로는 전쟁터, 때로는 적군의 성. 그렇게 미련할 정도로 몇 년을 일에만 매진하며 살았던 건지. 이제는 눈을 감아도 보이는 듯 한 붉은 강과 귀를 막아도 들려오는 듯 한 이름 모를 이의 비명소리에 서서히 몸도 마음도 지쳐갈 무렵이었다. 자비로우신 주군께서 그에게 말을 꺼낸 것은.
닌자의 알, 닌타마에서 어엿한 한 사람의 닌자로. 허나 아직 햇병아리에 불과한 그가, 스스로 뛰어든 잔혹한 세계에 지쳐가는 것을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그의 주군은 별다른 힐책도, 힐난도 없이 그저 온화하게 말씀하셨다.
'당고가 먹고 싶구나.'
이제 막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보고를 하던 중 뜬금없이 들려온 주군의 당고타령에 하치자에몽은 그만 무례임을 잊은 채 에? 하며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런 하치자에몽의 반응을 무시하며 '어느 마을의 당고가 무척이나 맛이 좋다더라. 기간은 넉넉히 줄 테니 가서 사오련?' 하고 천연덕스럽게 말을 잇는 주군의 모습에 하치자에몽은 그저 멍하니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임무가 내려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짧은 휴식이던가. 하지만 자신에게 내려진 것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엉뚱한 명령. 그에 의아함을 품지 않을 수는 없었으나 거부는 불가였다. 주군의 명령이라면, 주군이 하사하신 임무라면 설령 그것이 목숨을 버리는 일이라 할 지언정 고개를 숙이는 것이 닌자. 다녀오렴, 하고 강한 어조로 내려진 명백한 명령에 하치자에몽은 고개를 숙였다.
"존명!"
그것이 임무를 가장한 휴가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성을 나서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주군께서 일러주신 당고가게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그가 재학했던 인술학원과 가까운 마을에 있는 가게였다. 별 다른 특징도 없고, 유명세 따위는 전혀 타지 않은 흔하디흔한 당고가게. 그저 그 옛날 친우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추억을 나누었을 뿐인 그 가게는, 하치자에몽이나 인술학원 관계자와 같이 그리운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이가 아닌 한 거들떠도 보지 않을 정도로 초라하기만 한 가게였다. 그런 별 볼일 없는 가게에 한 성의 성주씩이나 되는 위대한 사람이 구태여 자신을 보내 당고를 사오라 시키는 이유는, 아마, 아니 틀림없이, 자신을 위해서였으리라.
자비로운 주군의 배려에 마음 깊이 감사하며, 하치자에몽은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추스를 수 없어 미소 지었다. 그리운 거리는, 그 시절과 별반 달라진 것 없이 자신을 맞이해 주었다. 당장이라도 저 너머로 달려가는 어린아이들이 보이기라도 할 것처럼. 어서 오라고 느릿하게 걷는 친우를 재촉하는 소년, 내가 더 많이 먹겠다며 한 접시 위의 당고를 두고 투닥이는 소년들, 투닥이는 소년들에 치여 마시던 차를 엎어버린 건지 젖은 옷을 털며 화를 내는 소년의 모습까지. 흘러가듯 떠오르는 그립고도 따듯한 추억의 그림에 하치자에몽의 미소는 더욱 더 짙어져만 갔다.
추억을 회상하며 당고가게를 향해 걷던 하치자에몽의 발걸음이 멈춘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마찬가지로 그의 얼굴에 은은하게 피어있던 미소가 사라지는 것도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그리운 당고가게를 불과 몇 걸음 앞둔 지점에서, 크게 벌어진 두 눈 가득히 들어오는 익숙한 얼굴과 그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하치자에몽은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치자에몽..?"
그 시절, 언제나 자신과 함께했던 얼굴이 그 곳에 있었다. 함께 밥 먹고, 수업을 듣고. 때로는 다투고, 또 화해하고. 6년이라는 시간, 일생을 다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소중한 시간을 함께한 급우이자 친우인 이.
졸업한 후 처음 만나는 친우는 키가 조금 크고, 분명히 그 시절보다 한결 어른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추억 속에 가득했던 상냥한 미소만큼은 변하지 않은 채였다.
사부로? 아니, 라이조인가?
난감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리며,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새어나오는 반가움에 표정을 밝히며 묻는 하치자에몽의 말에 그는 작게 쿡쿡 웃으며 라이조야, 하고 말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문득 옛 생각이 나 땡땡이를 치고 있는 중이라며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라이조의 목소리는 그 시절과 다름없는 상냥함을 담고 있어 하치자에몽은 미소 지었다. 그리고 흘낏, 습관처럼 주변을 살폈으나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친우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기도 잠시, 그에 대한 별 말없이 자리를 권하는 라이조의 손짓에 하치자에몽 역시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만남에 대한 놀라움도 잠시뿐으로, 하치자에몽은 그립고도 따스한 공기에 금세 익숙해져갔다. 주문을 받으러 오신 주인 할머니께 주문을 하고, 나란히 앉아 기다리고, 주문한 차와 당고가 나오자 같은 접시에 놓여있는 당고를 하나씩 집어 각자의 입 속에 집어넣었다.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것과 같은 평온하기 그지없는 상황에, 언제나 긴장으로 굳어있던 입가가 어느새 느슨하게 풀려버렸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하치자에몽은 그저 오랜 친우와의 만남이 반가워 웃었다. 라이조 역시, 웃고 있었다.
당고를 먹으며, 차를 마시며, 하치자에몽과 라이조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된 화제는 물론 인술학원에서의 추억이었다. 즐겁고, 행복했던 그 시절의 기억들. 5명이서 함께 울고, 웃고, 성장한 그 시간에 잠기며 두 사람은 부드럽게 풀린 표정으로 그리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1학년 때, 2학년 때, 그리고 3학년. 철부지였던 하급생시기를 지나고, 자신감으로 가득 찼던 4학년의 시기를 거쳐 5학년 때로.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리고 6학년이 되고, 졸업시험을 보고. 졸업장을 보며 무사히 졸업하게 됐다는 사실에 안도하던 것도 잠시, 곧 닥쳐올 현실이 두려워 몸을 떨었었다. 하지만 서로의 눈을 보고, 또 웃고. 두려움 위에 강한 의지를 굳혀 인술학원의 문을 넘어 나왔다.
한 걸음이었다. 안락했던 공간으로부터 딱 한 걸음. 메마른 흙길 위에 서서 추억만이 가득한 공간을 등진 채, 그들은 작별을 고했다. 웃으며 인사했다. 그동안 고마웠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즐겁고 행복했던 이야기의 끝에 남는 것은 언제나 어쩔 수 없이 묻어나오는 씁쓸함이다. 이별, 재회를 기약할 수도 없이 서로 등을 돌려 홀로 걸어 나아가야 할 길이 얼마나 가혹하고 고독한 길이 될 지, 그 당시의 그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니, 그 때보다도 더욱 절실하게 알고 있는 현실의 무거움에 유려히 흐르던 두 사람의 대화는 잠시간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졸업 후, 각자의 근황 따위는 묻지 않았다. 말 할 필요도 없었을 뿐더러,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저 조용히 다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오랜 대화에 마른 목을 축일 뿐.
"그러고 보니.. 사부로는 같이 안 온 거야? 분명 둘이 같은 성에 취직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잠시간의 침묵을 깨며 밝은 목소리로 먼저 물은 것은 하치자에몽이었다. 사실은 라이조를 만난 그 순간부터 줄곧 묻고 싶었던 것이었다. 쌍닌이라 불리며 학원시절에도 늘 함께, 그 후에도 변함없이 그와 함께했을 그의 반쪽의 부재가. 라이조의 침묵에 굳이 묻지 않았을 뿐, 사실 하치자에몽은 계속 신경이 쓰였었다.
처음 잠시간은, 사부로가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라 생각했다. 라이조와 태평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한 손을 휘휘 저으며 '오- 이게 누구야' 하는 느긋한 말과 함께 나타날 것이라고. 라이조와 똑같은 얼굴에 라이조와는 전혀 다른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와서는 제 목에 장난스레 팔을 두르며 '오랜만이잖아, 하치!' 하곤 웃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 가 어느새 거리가 황혼의 빛으로 물든 아직까지도 친우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에 물은 것이었다. 쌍닌이라는 이름하에 있다해도 언제나 함께 있으란 법은 없으니, 다른 임무에라도 갔겠거니 하며. 조금은 아쉬운 빛을 띄운 얼굴에,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안일하게도, 그렇게 웃었다.
"사부로는 오지 않아."
그 웃음이 깨어지는 것은, 단 한 마디의 말의 후.
"올 수 없어, 하치."
덤덤하게, 하지만 분명한 슬픔이 서려있는 라이조의 목소리에 하치자에몽의 안일한 웃음은 볼품없이 굳어지고 말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하고 낮게 묻는 목소리에는 떨림을 담은 채, 바보처럼 어색하게 굳어진 입 꼬리를 애써 끌어올리며 하치자에몽은 물었다. 찻잔이 떨리고 있었다. 아니, 떨리고 있는 건 찻잔을 잡고 있는 손인가? 반쯤 남아 다 식어버린 찻물이 잔 안에서 요동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하치자에몽은,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저, 단순한 의미일 것이라 믿었다. 임무가 바빠서, 그게 아니면 큰 부상이라도 입어서. 지금 이 자리에, 이 순간에 그 모습을 나타낼 수 없다는, 그런 단순한 의미. 그렇지 않은가. 그 사부로다. 천재, 변장의 명인이라 이름 높았던 하치야 사부로다. 수도 없이 대련을 했었고, 수도 없이 패배 해 왔다. 지쳐 쓰러져 힘겹게 숨을 고르고 있는 자신의 머리맡에 쪼그리고 앉아 '이번에도 내 승리야, 하치' 하며 얄밉게 웃던 녀석이었다. 늘 짓궂게 웃으며 사람을 곤란하게 하기 일쑤인 장난꾸러기지만 그 실력은, 그 강함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잔인한 현실을 전하는 라이조의 목소리는 옅은 물기를 머금고도 조용했고, 그 시선은 차마 숨길 수 없는 지독한 슬픔을 담고 있었음에도 고요했다.
"하치야 사부로는.."
라이조는 볼품없이 떨리고 있는 하치자에몽의 팔을 붙잡았다. 강하게, 간절하게. 그리고 이어진 것은, 이미 예상해버린 친우의 부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선고와도 같이 강하게 울려 퍼지는 라이조의 목소리에 하치자에몽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팔을 잡아주던 온기가 떨어져 나가자 불안하게 흔들리던 하치자에몽의 시선은 천천히, 라이조에게서 벗어나 아래로 향했다. 언제 제 손을 벗어났는지도 몰랐던 찻잔은, 젖어버린 흙길 위를 뒹굴고 있었다.
"강했잖아.. 그 녀석.."
두 팔을 들어 숙여진 고개를 묻으며 하치자에몽은 말했다. 어떻게? 언제? 와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세상을 가려버리려는 듯 두 팔 안에 고개를 묻은 채, 자문하듯이, 그렇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그런 하치자에몽의 떨리는 목소리에 라이조의 시선은 하늘을 향했다. 공허하리만큼 담담한 그 시선에 더 이상 물기는 없어, 마른 눈동자를 눈꺼풀 뒤로 감추며 라이조는 입을 열었다.
"응. 하지만 그것만으론 안 되는 거였나 봐."
이 시대는..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은 목구멍 뒤로 삼켜 넘긴 채, 그저 조용히 읊조리듯 말하는 라이조의 말에 하치자에몽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강했다, 누구보다도.
자신이 아는 그 누구보다도 우수한 닌자였다.
쓰러지는 것 따위 모른다는 듯, 늘 꼿꼿하게 등을 펴고, 얄미울 정도로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시야 안에 비춰지는 젖은 땅이 서서히 어그러지는 것을 바라보며, 하치자에몽은 애꿎은 입술을 물었다.
아아.
흐드러지는 벚꽃 아래, 서로 등을 맞대고, 우리는 웃었다.
헤어지는 것이, 마지막 이라는 것이 못내 아쉬워 쓸쓸한 낯을 가리지 못한 채 '또 보자-' 하던 나의 말에 너는 웃었다.
'바보 아냐?'
비스듬히 눈꺼풀을 내려 얄궂게 웃으며 내뱉어진 말은 단호하기 짝이 없어서 되려 당황해 버린 것도 잠시. 짙은 곡선을 그리며 올 라간 입꼬리는 언제나와 같은 여유를 품고, 열 받을 정도로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이어진 너의 말에 나는 그만 웃어버렸다.
'두 번 다시 만나지 말자, 겠지.'
영원한 이별을 고하는 잔인한 말에 눈가가 저릴 정도의 서글픔을 느끼면서도, 어째서인지 너의 목소리는 따듯하기 그지없어 나는 웃었다. 너 역시, 웃고 있었다.
형편없이 어그러진 시야에 비춰진 땅은 여전히 젖어 있어, 하치자에몽은 웅크리듯 몸을 숙여 두 팔 안에 고개를 더 깊이 파묻었다. 미약하게 떨리는 단단한 팔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숨소리는 물기를 담고, 한 없이 짙은 슬픔이 공간을 메웠다.
아아.
머리위로 내려앉는 따사로운 햇살. 하늘하늘 흩날리는 벚꽃잎 아래, 그립고도 익숙한 간판 앞에 서서, 그렇게 이별했다. 서로가 마지막이라고 바라던, 바라지 않던 그 순간에. 두 번 다시 만나지 말자며 내밀어진 너의 주먹에 나의 주먹을 맞대며.
'그래.'
새어나오려는 슬픔을, 쓸쓸함을 서투르게 감추듯 웃으며 말하는 나의 목소리에 짙게 미소 짓던 너의 모습이 생생하다.
아아.
맞대었던 주먹에 피어오르는 듯 한 아릿한 온기에 하치자에몽은 숨을 삼켰다. 어그러진 시야 안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얄궂은 표정아래 따스함을 담은 채 미소 짓는 친우의 얼굴. 지금 제 옆에 있는 이와 꼭 닮은 얼굴에 전혀 다른 미소를 띄우고 있는, 이제 더 이상 영영 만날 수 없는 친우의 모습을 떠올리며 하치자에몽은 그렇게 한 없이, 한 없이, 지독하게 차오르는 슬픔을 토해냈다.
그게 마지막이었구나.
그리운 거리, 그리운 당고가게. 그리운 의자 밑의 흙은, 아주 오랫동안 짙은 물기를 머금은 채 마르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머리를 매만질 새도 없이, 정신없이 달려간 술집에 있는 너의 모습에 가장 먼저 나온 것은 한 숨이었다. 벌써 몇 년지기인지조차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래된 친구사이에 뭘 새삼스레 옷차림 따위에 신경을 쓰겠냐만은 조금이라도 누추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내 마음이 무색하리만큼 너는 형편없는 꼴로 테이블에 앉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급히 나오느라 대충 구겨 신은 운동화를 끌지 않으려 노력할 마음도 들지 않아 터벅터벅 걸어가 네 앞자리에 앉았다. 다가오는 발소리,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리 없음에도 조금의 미동조차 없이 테이블로 걸어오는 그 잠시 동안에 비어버린 술잔에 너는 또다시 술을 채워 넣고 있었다.
“사부로.”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느릿하게 나를 향한 눈은 주정뱅이의 그것이었다. 나를 보고, 잠시 눈가를 찌푸리다 이내 답지도 않게 웃는다.
“왔냐?”
“얼마나 마신거야, 너.”
테이블 위에 잔뜩 늘어진 빈 술병과 눈앞의 주정뱅이를 보며 질린 표정으로 묻자 내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 지 너는 또 바보처럼 키득키득 웃었다.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는 놈이. 이미 잔뜩 붉어질 대로 붉어진 얼굴과 풀린 눈에 대체 얼마만큼의 알콜이 저 몸으로 들어갔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너 답지 않았다. 붉어진 눈가는, 술 탓일까.
“무슨 일이야?”
한참을 망설이다 망설이다 물었다. 그 사이 또 다시 한 잔, 비워진 술잔에 다시 술이 채워지는 과정을 바라보며 물었다. 느릿한 손동작으로 그저 기계적으로 술잔에 술을 채워 넣고, 입 안으로 털어 넣고, 잠시 가만히 술잔을 매만지다 다시 또 술병을 들어 빈 잔을 채우며 너는 입을 열었다.
“그냥.. 그냥, 네 생각이 나서.”
그렇게 말하는 너의 목소리는 아주 조금 갈라져 있었다. 조금 젖어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또 다시 잔이 비워지고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이 술병을 잡으려 할 때 빼앗아 술병을 들었다. 아무런 말없이 천천히 움직인 고개가 나를 보는 것을 무시한 채 손에 든 술병을 기울였다. 반쯤 비워진 액체가 출렁이며 네 앞에 놓여진 잔을 채웠다. 그 모습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보던 너의 입가가 옅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입술이 열렸다. 금세 닫혔다.
그리고 다시 작게 열리며 이번에는 뚜렷하게 젖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라이조가, 곧 결혼해.”
순간 숨이 멈췄다. 술잔을 채우던 액체가 뚝, 떨어진 한 방울이 거의 채워진 잔 안에 파문을 그리는 것으로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병을 기울이던 손이 멈춰버린 것을 의식하기도 전에 내 시선은 너를 향했다. 너는 울고 있지 않았다.
“사실 전부터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는 말은 들었었는데.. 다음 달이래. 빠르지? 과연 라이조야. 다른 일에는 그렇게 쉽게 망설이면서 이런 일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아. 조금도...”
채 다 채워지지 못한 잔을 두고 술병을 그대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반 밖에 차지 않은 잔을 보면서 너는 흐릿하게 풀린 눈으로 웃고 있었다. 그리고 한 마디, 한 마디. 본인은 덤덤하게 말하려는 듯, 천천히 뱉어지는 말들에 덤덤함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한 마디씩 흘러나오는 그 말들 속에 울음이 섞여간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뱉어지는 말들과 함께 다시 붉어져가는 눈가를 보며 물었다.
“많이 좋아했냐..”
이번에는 너의 숨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이내 언제 그랬냐는 양 피식 웃으며 너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술기운 때문인지 희미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공허하게 나를 향한 채 이번에는 망설임 없는 단호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라이조를 위해서라면, 남은 내 인생 전부를 버려도 좋아.”
다시 한 번, 숨이 멈췄다.
“그래..”
그 한 마디가 한계였다. 계속 흐릿한 채인 주제에 망설임도 약간의 주저함도 없이 곧게 뻗어져 나온 그 한 마디에 더 이상 시선을 마주 할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내용물이 반쯤 남은 술병을 손에 들고 내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랐다. 출렁이는 액체가 잔을 채우다 채우다 잔 표면까지 차올라 버릴 때쯤에서야 아차 하며 술병을 내려 놓았다. 옆에서 뭐하냐며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치- 하치자에몽-”
실컷 비웃었는지 취하지 않고서야 들려주지 않을 잔뜩 풀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부름에 가득 찬 잔을 그대로 둔 채 너를 보았다. 너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와는 상반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오기 전까지 울었던 걸까. 잔뜩 붉어진 눈가가 마른 얼굴에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못 본지 얼마나 됬다고. 고작 며칠 사이에 많이 야위어버린 얼굴에 붉어진 눈가가 쓰라리게 보였다.
손을 뻗었다. 관두었다. 대신 애꿎게 허공에서 멈춰버린 손을 마치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가득 찬 술잔으로 가져갔다. 술잔을 들자 아슬아슬하게 표면에 머물러 있던 액체가 출렁이며 마른 손을 적셨다. 그것을 한 모금. 입가에 가져다 대자 내가 무엇을 하는 지 관심도 없다는 듯 멍하니 제 술잔만을 보던 너의 입이 열렸다.
“사랑의 다른 이름이 뭔지 알고 있어?”
앞뒤 없이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걸 보니 확실하게 취했다. 나오려는 한 숨을 목을 넘어가는 액체로 막으며 속으로 대답했다. 알 리가 있냐. 쓴 맛이 입 안을 적시고 목 안쪽으로 퍼졌다. 즐기지 않는 그 감각에 작게 미간을 찌푸리며 잔을 내려놓았다. 그 사이 뭐가 그리 재미난 건지 너는 제 잔에 또 다시 술을 채워 넣으며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웃음소리였다.
“아픔이래. 진짜 너무하지 않냐.”
손이 멈췄다. 숨이, 다시 멈췄다.
“하긴, 네가 뭘 알겠냐만은.”
어딘가 자조적인 웃음 너머로 사라져가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잔에 가득 채운 술을 입안에 털어 넣고 있는 네가 보였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죄다 입 안으로 털어버리고, 잔을 내려놓으며 스르르 떠진 눈은 분명하게 젖어 있었다.
그만 울어. 그 말이 목 끝을 간질였다.
알아, 멍청아. 그 말이 입 안까지 치고 올라와 맴돌았다.
“하치-”
평소처럼 능숙하게 감추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들려오는 물기 번진 부름에 대답하려다 관두었다. 두어 번 달싹였을 뿐인 입술이 말라와 너의 손에 쥐어져 있던 술병을 빼앗아 잔을 채워 냅다 들이켰다. 입술을 적시고, 입 안까지 올라와 버린 말을 쓰디 쓴 액체와 함께 다시 목구멍으로 넘겨버렸다.
“하치-”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저 내뱉어진 단어에 불과한 이름을 부르며 너는 술잔을 매만졌다. 비어버린 술잔을 매만지다 매만지다, 한 방울 한 방울. 술이 아닌 액체가 잔을 채우기 시작하는 것에 놀라지는 않았다.
“좋아해..”
하지만 다시 숨이 막혀와 고개를 숙였다.
“좋아해..”
숨을 크게 들이 쉬고 고개를 들어 너를 보았다.
“좋아해, 라이조.”
손을 뻗었다. 두 손으로 눈가를 가린 채 울고 있는 너의 등에 닿은 손은 떨리고 있지 않아, 그 사실에 안도하며 너의 등을 쓸어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오지 않았다. 그저 기계처럼 손을 움직여 우는 너를 달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이었다.
“진짜 안 데려다줘도 되겠어?”
“내가 앤 줄 아냐. 집도 코앞인데 무슨.”
비틀거리는 걸 부축해 집 근처까지 데려왔더니 이제와 태연한 척 말하는 모습에 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차가운 밤바람 덕에 술이 조금 깼는지 너의 눈동자가 아까보다는 또렷했다. 여전히 몰골은 주정뱅이가 따로 없었지만 그래도 바로 앞에 있는 제 집은 잘 찾아 들어갈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잘 가.”
“응, 너도.”
가볍게 손을 흔들어 작별인사를 하고 등을 돌리는 네 모습을 그저 보고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몇 발자국 채 가지 못하고 너의 발걸음이 멈췄다.
“하치.”
잘난 듯이 말해 놓고는 또 다시 속이 안 좋아 진걸까. 걱정이 돼 다가가려는 내 발걸음을 멈춘 것은 너의 목소리였다. 여전히 취기와 물기가 뒤섞여 묻어있는 듯 한 네 목소리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가만히대답없이 있자 천천히 너의 몸이 돌아 너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너는 웃고 있었다.
“고맙다.”
그 한 마디. 네가 언제나 정말로 친한 친구에게, 가족에게, 후배나 선배에게만 보내는 상냥함과 따듯함이 담긴 눈빛으로 내뱉는 한 마디에 나는 입술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코끝이 아파왔다. 눈가가 아리는 것을, 목이 뜨거워지는 것을 참아내는 것에 정신이 팔려 너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나의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다는 듯, 너는 그저 제 할 말만 하고는 다시 몸을 돌려 집으로 가는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느리게 걷는 그 뒷모습이 흔들려 보였다.
입술이 열렸다. 금세 닫혔다.
다시 열렸다. 그리고 다시 닫혔다. 그러게 몇 번이고 달싹이다 조금씩 멀어져가는 너의 뒷모습에 다급하게 흘러나와 버린 목소리가 너를 불렀다.
“사부로.”
너의 걸음이 멈추었다. 천천히 몸이 돌아 너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을 때, 내 심장이 시끄러울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한 번, 입술이 달싹였다.
좋아해.
“아무것도. 추운 데 빨리 들어가라고.”
싱겁다는 듯 작게 웃는 너의 모습에 눈가가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무시한 채 바보처럼 웃어보이자 너는 다시 뒤돌아 걸어갔다. 천천히, 천천히.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꾹꾹 누르고 또 눌러왔던 것이 입술 틈새로 넘쳐 흘러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사부로..”
좋아해.
한 숨처럼, 울음처럼 나온 이름에 한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너의 뒷모습에 안도하며 몸을 돌렸다. 집에 가자. 한 걸음, 한 걸음 젖어버린 것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가는 길을 걸었다.
좋아해.
제대로 잘 들어갔을까. 현관문 앞에서 주저앉아 잠들어 버리지는 않았겠지.
좋아해.
또 다시 울고 있지는 않을까.
“사부로..”
걸음을 멈췄다. 조용한 밤거리, 홀로 선 길 위에서 불러본 너의 이름은 생각보다도 아프게 다가와 목이 메였다. 눈가가 아려오는 것을 이번에는 참을 수 없어 한 손을 들어 아까 네가 했던 것처럼 눈가를 덮어버렸다. 입술이 떨렸다. 천천히 열렸다. 하지만 결국 나오는 말은 없어, 입술을 물며 다시 닫아버렸다.
사랑해.
눈에 열이 올라 눈가를 덮은 손을 적시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는 아주 잠시 동안 그렇게 있었다.
닌자의 황금타임이라 불리는 시간은, 과연 닌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조용했다. 밤새들이 작게 지저귀는 소리, 벌레가 우는 소리만이 고요한 밤을 울려 언뜻 운치마저 풍겨오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6학년의 기숙사에서는 어느새 야간 훈련을 나갔는지 소리는커녕 아무런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4학년 기숙사에서는 이제 잠들 준비를 하는 것인지 천이 스치는 소리,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고요한 밤공기 사이사이로 작게 들려오고 있었다. 조용했다. 이미 전부 잠들어 버렸을 하급생들의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 한 착각마저 느껴질 정도로. 여느때와 같은 조용하고 평온한 밤이었다.
헤이스케는 교장선생님의 심부름. 로반은 실습.
뜻하지 않게 찾아온 혼자만의 고요함 속에서 따분하게 붓을 놀리며 칸에몽은 멍하니 창밖의 밤하늘을 보았다. 사부로가 실습에 나가버린 덕분에 혼자 떠맡게 된 학급위원장위원회의 일에 낮에는 정신이 없었다. 어린 후배들에게 맡길 수도 없어 이반의 학급위원장으로서의 일마저 잠시 미룬 채 급하게 일을 처리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 시간. 덕분에 채 쓰지 못한 이반의 학급일지를 쓰느라 별구경이고 느긋한 휴식이고 뭐고 전부 물건너 가버렸다.
학급일지를 쓰는 것에는 익숙해져 있어 사실 그리 오래 걸리는 일도 수고로운 일도 아니었으나 어쩐지 오늘은 도통 기분이 나질 않았다. 너무 조용해서 였을까. 무언가 빠진 듯한 허전함마저 느끼며 칸에몽은 밤하늘을 향하던 시선을 내려 쓰다 만 일지를 보았다. 하얀 종이에 검은 먹으로 쓰인 글자들이 성의없이 늘어져 있었다.
아, 하고 칸에몽의 시선이 다시 창밖을 향했다. 여느때와 같은 시간 속에서 한 가지가 빠져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소리가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퍽퍽 마른 땅에 굳센 삽을 꽂아 흙 채로 드러내 버리는 둔탁한 소리가. 이 시간 즈음이면 늘 들려오던 소리가 오늘은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일찍 잠자리에라도 든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슬슬 습관이 베여 발소리 없이 방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에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칸에몽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그렇지.
장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온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바닥에 닫는 미미한 발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기척이 가까워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하얀 종이위에 먹자국이 한 줄 더 늘어나는 정도의 적은 시간이었다. 뒤에서 뻗어져 온 양팔이 어깨와 가슴팍을 감싸 안아 등과 가슴이 밀착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물론 더 적은 시간.
“뭐야, 이번에도 후미코가 부러졌냐.”
뒤 돌아보지도 않고, 응하지도 않고, 그저 저 하던 일을 하며 흘리듯 묻는 말에 자신을 감싸 안은 두 팔에 조금 더 힘이 실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요.”
흘리듯 닿아오는 나른함을 담은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기운이 없지도, 그렇다고 다른 무언가를 담고 있지도 않은 언제나와 같은 건방진 후배의 목소리였다.
칸에몽의 한쪽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먹이 말라가는 붓에 다시 먹을 묻히며 칸에몽은 여전히 뒤돌아보지 않은 채로 물었다.
“그럼 뭐야.”
그 물음의 대답은 조금 늦게 들려왔다.
“그냥요.”
머리위에서 들려오는 평이한 목소리에 칸에몽은 눈을 가늘게 하며 쭉 뻗어진 손을 놀렸다. 쥐어진 붓이 아슬아슬하게 종이에 닿아 먹을 묻히는 과정이 방금 전 보다 조금 멀리서 행해지고 있었다. 불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입 밖에 내는 것 조차 귀찮아 칸에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등에 얹혀져 있던 무게가 사라진 대신 자신의 자세가 흐트러져버린 것도, 어깨와 가슴에 둘러진 팔에 조금 더 힘이 실린 것도, 제 무게가 실려있을 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단단한 가슴이 받치고 있는 것도, 지적하여 관두게 하는 것조차 이제는 귀찮아져버렸다.
“가서 잠이나...”
“낮에요.”
거 보라지.
칸에몽의 입가가 옅게 비틀렸다. 뭔 말을 한 들 들어먹지 않는 이 후배 놈은 언제나 지독히 마이페이스적이다. 저가 오고 싶을 때 멋대로 찾아와, 멋대로 엉덩이 붙이고 앉아, 멋대로 하고 싶은 말을 지껄인다. 그러면서 칸에몽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고집불통 어린애가 따로 없었다.
4학년 쯤 됐으면 조금은 상급생답게 굴어도 좋으련만, 제 관심 밖의 일에는 조금도 시선을 주지 않는다. 그런 어린애가 오늘은 또 무슨 일을 물고 와 저에게 매달리며 조잘거리려는 지. 오냐, 어디 한 번 들어주마. 이제는 반쯤 포기한 기분으로 칸에몽은 아직 먹이 마르지도 않은 붓을 내려놓았다.
“토시쨩 155호를 파고 있었는데 밖이 좀 시끄럽더라구요. 그래서 살짝 올라가 봤는데 생물위원회가 있었어요. 어... 기르던 토끼가 죽었다고 그랬나? 엄-청 형편없이 판 구멍에 토끼를 넣고 하급생들이 엉엉 울고 있었는데 구멍이 너무 형편없어서, 저런 구멍에 묻어주는 게 싫어서 그런가? 해서 하는 수 없이 토시쨩 155호를 완성해서 줬거든요. 그런데도 하급생들은 계속 울어서.. 왜 울어? 하고 물어봤더니 토끼쨩이 죽어버려서 우는 거라고. 소중한 친구가 떠나버려서, 이제 더 이상은 만날 수 없어서, 그게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나오는 거라고.”
조용하게 울리는 목소리에는 슬픔이나 안쓰러움과 같은 감정은 묻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덤덤하게, 잔잔하게.
“그 애들, 한참을 그렇게 울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웃었어요. 고맙습니다, 하고는 뛰어가는데 가다가 한 명이 넘어져서. 거기에 또 자기들끼리 웃고, 그리고 일으켜주고, 다시 뛰어가는 걸 그냥 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뒤에 타케야선배가 와 있더라구요. 제 머리 쓰다듬으면서 고맙다, 하고 웃었는데.. 어.. 뭔가 이상했어요. 생물위원회의 꼬마들도 그렇고, 타케야선배도 그렇고. 울다가, 웃다가. 슬퍼하다가, 고마워하다가..”
“뭐라는 거야.”
“몰라요. 그냥 이상했어요.”
칸에몽의 머리에 제 뺨을 부비적거리는 후배의 행동은 마치 어리광부리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모르는 것에 마주치고, 그것에 기이함을 느껴,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조르는 아이.
이제는 익숙해져 한숨도 나오지 않는 덩치만 큰 아이의 투정에 칸에몽은 붓을 내려놓아 빈손으로 제 머리 위에 놓인 머리통, 그 곱슬거리는 머리칼 안쪽으로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고개를 살짝 아래로 빼 위를 올려다보았다. 동시에 잡고 있던 머리통을 당겨 아래를 향하게 만들자 시선이 마주쳤다.
멋대로 눌러 앉아버린 지 한참이 지나서야 시야에 담은 무단침입자의 눈은 언제나처럼 덤덤한 채였다. 몰라요, 그렇게 말하던 주제에 혼란스러움이나 의문은 없이 잔잔한 수면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을 뿐인 눈이 칸에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아냐, 멍청아.”
그런 고요한 눈을 금방이라도 닿을 듯 한 거리에서 똑바르게 마주보며 칸에몽은 말했다.
“소중한 사람이, 아니 사람이든 동물이든 뭐든. 자신에게 있어 소중한 것이 떠나갔는데 그걸 보고 슬퍼하는 게 어디가 이상하다는거야. 이것이 마지막. 이제 두 번 다시는 만날 수 없어. 같이 웃을 수도 없고, 맛있는 걸 먹을 수도 없어. 다툴 수도 없고, 화해할 수도 없어.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거다. 그게 슬픈거야. 너무 슬퍼서 눈물이 멈추지 않을 정도로 힘들고, 싫은거야. 이별, 이라는 게 싫은거다. 그게 그렇게 이상해?”
곧은 목소리가 밤공기를 울렸다. 건조한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고 있는 눈동자는 여느 때와 같이 흔들림 하나 없이 강한 빛을 품고 있었다. 속눈썹을 스치며 들려오는 목소리는 귀가 아닌 눈 안으로 스며들어와 그대로 머리를, 온 몸을 울리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깜빡. 느릿하게 감았다 뜬 눈 앞에는 여전히 강한 선배의 눈이 있어, 키하치로는 그저 묵묵히 이어진 말을 들었다.
“운 다음에 웃는 것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 언제까지고 울고 있을 수만은 없어. 그건 미련이고, 미련은 발목을 잡을 뿐이야. 살기 위해서는 앞으로 걸어가야 하지. 미련이 발목을 잡는다면, 그래서 걸어 나갈 수 없다면, 결국은 같이 죽어버리게 될 뿐이야.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나를 소중하다고 생각해 주었을거라 믿었던 그 사람이, 그 동물이, 그 무언가가, 그런 걸 바랄 리가 없잖아.”
강한 빛 안에 언뜻 상냥함을 비추며 칸에몽은 눈가를 옅게 휘며 웃었다.
“잘했어, 키하치로. 생물위원회의 하급생들이 소중한 친구와 함께 미련을 두고 갈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 줘서. 그 아이들에게 감사 받는 것도, 하치자에몽에게 감사 받는 것도 당연해. 이상할 건 하나도 없어. 기쁘게 받아들이면 되는 거야.”
아시겠습니까, 후배님아. 마지막은 조금 장난스럽게, 그렇게 말하며 웃어 보인 칸에몽은 잡고 있던 머리를 놔 주며 고개를 내렸다. 제법 오래 무리하게 올리고 있던 목이 살짝 뻐근한 듯 했다. 어깨와 가슴에 둘러진 팔을 느슨하게 풀어내 기우뚱하게 기대져 있던 몸을 일으키고 가볍게 목을 돌리며 뻐근함을 풀고 있자,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기라도 하는 듯 가만히 칸에몽이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키하치로의 팔이 다시 뻗어져왔다. 상냥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손길로 끌어당겨져 뒤통수가 다시 가슴팍에 닿았다.
“역시 잘 모르겠어요.”
한 팔은 칸에몽의 어깨에, 다른 한 팔은 칸에몽의 가슴팍에 두르고 제 뺨은 칸에몽의 머리 위에 얹었다. 처음 조잘거리던 때와 같은 자세로 돌아와 여전히 아이처럼 칭얼거린다. 정말로, 애가 따로 없었다.
“후미코가 부러졌어.”
“싫어요.”
“못 고친대.”
“싫어요.”
“더 이상 후미코는 없어. 땅 안 팔 거야?”
“......아니요.”
“모르긴 개뿔.”
한숨 쉬 듯 귀찮음을 가득 담아 뱉어낸 짧은 질문들의 대답은 빠르게도 돌아왔다. 그에 잠시 질린 듯한 얼굴을 한 칸에몽은 결국 한 숨을 내쉬며 다시 붓을 들었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지, 아니면 아무 생각도 안하고 있는지 키하치로는 조용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몇 글자, 하얀 종이 위에 다시 먹이 칠해졌을 때, 천천히 키하치로의 입술이 열리며 자그마한 감정을 담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후미코쨩이 부러지는 건 싫어요.”
“네-네- 그러시겠죠.”
너무나 예상대로인 키하치로의 말에 칸에몽은 성의 없이 대답하며 붓을 놀렸다. 한 글자, 또 한 글자. 그리고 한 마디.
“오하마선배가 죽는 건... 슬퍼요.”
칸에몽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 건 그 순간이었다. 작은 놀람을 담고 고개를 들어 어리기 짝이 없는 후배를 보려던 고개를 단단한 손이 잡아, 그보다 더 빨리 들어 올린 것 역시 그 짧은 순간의 일. 마치 어미의 동작을 따라 배우듯 칸에몽이 했던 양 저는 고개를 숙여 제 눈과 칸에몽의 눈을 맞추며, 키하치로는 말했다.
“선배는요? 제가 죽으면 오하마선배는 울어요?”
늦은 밤의 고요함 속에서 두 시선이 교차했다. 깜빡, 또 깜빡. 멀지 않은 산에서 우는 밤새의 울음소리가 잠시 실려 왔다 도로 나가버릴 정도의 길지 않은 시간. 그저 가만히 서로의 눈을 바라보던 두 사람 중 입을 연 것은 칸에몽이었다. 흘리듯이, 뱉어내듯이. 천천히 열린 입술은 짙은 호선을 그려내었고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유쾌함마저 서려있는 듯 했다.
“네가 죽는 장소가 내 앞이라면, 까짓거 네 입에서 그만이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펑펑 울어주마.”
그것이 몇 년 전의 기억인지.
난자의 황금타임이라 불리는 시간은, 과연 닌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조용했다. 밤새들이 작게 지저귀는 소리, 벌레가 우는 소리, 그리고 짙은 감정을 담은 물방울이 살갗에 떨어지며 퍼지는 작은 소리만이 고요한 밤을 울리고 있었다.
“진짜로 우네요.”
뚝. 뚝.
굵은 물방울이 제 뺨에 떨어져 흘러내리는 것은 가만히 맞으며 키하치로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피가 스며 뿌옇게 보이는 시야에 비춰지는 선배는, 그 날 그가 했던 말처럼 울고 있었다.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끌고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칸에몽의 표정이 구겨지는 것을 보며 키하치로는 멍하니 아쉽다고 생각했었다. 미간을 찌푸리는 것은 많이 봤다. 싫은 기색을 담고 구겨지는 표정 역시 몇 번이고 봐서 그리 신선하지는 않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서 있는 것조차 할 수가 없어서 쓰러져 버렸을 때. 습관처럼, 버릇처럼 칸에몽을 끌어안아 함께 바닥에 손이 닿았을 때. 어지러이 흐려지는 감각 속에 들려오는 작은 밤의 소리 중에 한 가지, 낯선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겹쳐진 것은, 닌타마였을 적에 들었던 다른 위원회 후배들의 소리였다. 토끼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던 아이들의 소리. 짙은 물기를 담아 주변 공기마저 적셔버리는 슬픈 소리.
감겨져 그대로 어둠속으로 빠져버리려던 정신을 애써 추슬러 눈을 뜨자 흐릿하게 보이는 시야 안에 칸에몽의 구겨진 얼굴이 비춰졌다. 키하치로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지독한 슬픔을 품고 엉망으로 구겨진 얼굴에 물기가 번져있는 것은 키하치로가 처음 보는 칸에몽의 표정이었다.
선배는 소중한 것을 잃을 때 운다고 했던가. 슬퍼서 운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자신이 죽을 때는?
키하치로가 아직 닌타마였을 적에 들었던 의문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대로 키하치로의 안에서 이어져 와, 죽는 순간은 꼭 선배의 앞에서라고 몇 번이고 다짐하게 했었다.
울어주었으면 좋겠네. 슬퍼해주었으면 좋겠네.
자신이 죽을 때 슬퍼 눈물을 흘리는 칸에몽의 얼굴은, 키하치로가 줄곧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자신과의 이별이 슬퍼 운다는 것은, 칸에몽에게 있어 자신은 소중한 존재였다 말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마주친 그 얼굴은 너무나도 형편없어서, 그 시절에 하급생들이 서투르게 팠던 구멍만큼이나 형편없어서.
깜빡.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다시 뜨며 키하치로는 무거운 팔을 들었다. 이제는 감각마저 희미해져 잘 올라가지 않는 팔을 조금씩, 조금씩 들어 올려 칸에몽의 젖은 뺨 위에 손을 얹었다. 칸에몽의 눈에서 흘러내려 손등을 타고 떨어진 붉은 눈물이 자신의 뺨에 붉은 자국을 남기는 것을 개의치 않고 키하치로는 입을 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별로네요.”
“뭐라는 거야.”
곧장 들려온 말은 자신이 알던 것처럼 조금 무신경하고, 다정해서 조금 안심이 됐다. 무슨 제 멋대로인 말을 하는 거야, 이 후배놈은. 그렇게 말하듯 헛웃음을 터트리는 칸에몽 입가가 겨우 옅은 호선을 그리는 것을 보며 키하치로 역시 입가를 느슨하게 풀었다. 제 눈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은 눈치 채지 못했다.
“이건 좀 낫다.”
흐려지다, 흐려지다 점점 어두워져가는 시야 안에 마지막으로 비춰진 것은 크게 뜨여진 칸에몽의 눈이었다. 잠겨 들어가는 의식 속에 투정이라도 부리듯 한 마디. 먹으로 범벅되어가는 세상에 커다랗게 울리는 울음을 들으며 키하치로 눈을 감았다.
붉은 하늘, 붉은 세상. 하얗게 물들다 또 다시 검게 칠해져 버리는 시야 안에, 마지막으로 담은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굳게 맞잡은 손에 전해져오는 미약한 움직임에 쵸지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본래 잘 웃지 않아 인상이 밝지 않은 쵸지였으나 그 날 그의 얼굴은 한 층 더 어두웠다. 밝은 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와중에도 얼굴에 가득한 그림자는 가실 기색이 없어, 쵸지는 그저 미약한 움직임을 전해온 손을 더욱 굳게 잡으며 조용히 친우의 이름을 불렀다.
“코헤이타..”
집중하지 않으면 놓쳐버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 하지만 그런 작은 쵸지의 부름에 코헤이타는 분명하게 반응을 보였다. 맞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새하얀 이불 위에 누워, 새하얀 베개를 베고, 결 나쁜 머리칼을 어지러이 흐트러트린 채, 새하얀 붕대가 감겨져 있는 얼굴이 쵸지를 향했다. 굳게 닫혀 있던 마른 입술이 열리며 건조한 목소리가 쵸지를 불렀다.
“쵸지..?”
존재를 찾는 듯, 부름에 답하는 듯. 조용히 울리는 코헤이타의 목소리에 쵸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맞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을 뿐. 그것으로 충분했는지 코헤이타의 입가가 느슨하게 풀리며 한층 가벼워진 목소리가 조용하던 공간을 메워가기 시작했다.
“나 어떻게 된 거야? 분명 전쟁터 근처에서 실습을 하고 있던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아, 이상한 녀석들에게 둘러싸였었지. 응응. 분명 그랬었다. 쵸지랑 등 맞대고 그 녀석들이랑 싸웠었는데... 어라? 내가 언제 정신을 잃었더라?”
주절주절, 조잘조잘, 언제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냐는 듯 기운 좋게 떠들어 대던 코헤이타의 목소리는 오로지 홀로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그에 답하는 쵸지의 목소리는 없이 홀로, 하지만 그것이 익숙하다는 양 흘러가던 말이 멈춘 것은 그리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대답 없이, 아무런 말없이 그저 가만히 코헤이타의 손을 맞잡은 채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쵸지의 눈이 작게 동요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것이 새하얀 붕대에 감겨 있는 눈에는 보일 리 없어, 베개에 뉘인 머리를 갸웃하며 코헤이타는 의문을 드러냈다.
즐거움에 잠겨 짙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 있던 입매가 일자로 다물어 졌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작게 벌어진 그 순간. 마른 숨결과 함께 작은 의문이 토해져버린 그 때.
“그런데 쵸지, 지금 밤이야?”
따가울 정도로 밝게 비추는 햇살 아래, 채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흘러내린 눈물이 한 방울, 맞잡은 두 사람의 손을 적셨다.
“쵸지?”
손을 적시는 물방울의 감촉에 코헤이타는 다시금 목소리를 높이며 친우를 불렀다. 하지만 역시나 되돌아오는 대답은 없어, 그 대신 한 방울 두 방울 손을 적셔 내려가는 물방울의 감촉에 맞잡은 손아귀의 힘이 느슨해진 것은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코헤이타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아. 채 말이 되지 못한 작은 탄성이 한 방울. 곧장 다시 맞물린 입매가 곧은 일자를 그리며 코헤이타는 가만히 맞잡은 손에 다시 힘을 주었다.
겹쳐진 두 손은 이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물방울로 젖어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다른 어떤 행동도 없이, 그저 한 손을 강하게 잡은 채 쵸지는 울고 있었다. 자신의 침묵에, 코헤이타의 반응에, 그것이 의미하는 것들에, 쵸지는 견딜 수 없어 두 눈을 감아버린 채 닫힌 눈꺼풀 사이로 눈물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불이 스치는 미약한 소리가 조용하던 공간을 작게 울렸다. 코헤이타의 손이, 맞잡은 손이 아닌 반대쪽의 빈손이 쵸지의 젖은 뺨에 닿았다.
“쵸지”
친우를 부르는 코헤이타의 목소리에는 답지 않게 옅은 울음기가 섞여있었다. 풀이 죽어 조심스럽게. 손끝을 적시는 따듯한 감각에 입꼬리를 내리며 코헤이타는 말 없는 친우에게 말을 걸었다.
“쵸지, 울어?”
울지 마.
뺨 위에 닿아있던 손이 움직였다. 단단하게 굳은살이 박혀있는 손끝이 뺨에, 흉터에, 콧등에, 입술에, 그리고 다시 뺨에. 더듬어 찾듯, 쓰다듬듯, 젖어 들어가는 손끝이 천천히 올라가 잔뜩 젖은 속눈썹에 닿았다. 스치듯 속눈썹을 지나 눈가를 쓸어내리는 손의 움직임에 쵸지는 작게 어깨를 떨었다.
“쵸지”
다시 한 번. 코헤이타는 쵸지를 불렀다. 눈물을 닦아주던 손끝이 움직임을 멈추고 그대로 손바닥까지 쵸지의 뺨에 닿았다. 뺨을 감싸며, 따스한 온기를 나누며, 그렇게 가만히.
“쵸지는 괜찮아?”
걱정을 담아 들려오는 목소리에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눈물만을 떨어트리던 쵸지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벌어졌다. 하지만 떨림을 담은 입술 밖으로 나오는 목소리는 없어 떨리다, 어그러지다, 다시 앙다물린 입술 밖으로 작게 드러난 이가 아랫입술을 물었다. 당장이라도 터져 나오려는 울음에 견딜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메여왔다.
떨리는 손을, 맞잡은 손이 아닌 반대편의 빈손을 들어 쵸지는 자신의 뺨을 감싸고 있는 코헤이타의 손에 겹쳤다. 새어나오려는 울음을 입술 안에 머금은 채 미약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손이, 팔이 쵸지의 손과 겹쳐져 쵸지의 고개와 함께 아래로, 그리고 다시 위로 올라가는 감각에 코헤이타는 웃었다.
“그럼 됐어.”
그거면 됐어.
안도하며, 내뱉어진 숨결과 함께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답지 않게 평온했다. 다행이야. 쵸지의 뺨을 감싼 채 쵸지의 손과 겹쳐진 손을 살짝 움직여 그 뺨을 다시금 쓰다듬으며 코헤이타는 웃었다. 입가를 느슨하게 풀어 올리고, 환자의 것이었던 뺨에 발그스름하게 생기를 보이며, 코헤이타는 그렇게 웃고 있었다.
애써 닦아 내린 것이 무색하게 뺨을 감싼 두 손을 다시 흐르는 눈물이 적셨다. 이지러져, 어그러져 엉망이 된 시야에 쵸지는 다시 두 눈을 굳게 감았다. 뺨에 닿아있는 따스한 온기에 겹쳐진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쵸지”
다시금 들려오는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평온했다. 하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는 강함을 품고, 속삭이듯 잔잔하게.
- 발랑님과의 사약게임으로 탄생하게 된 사약, [이마후쿠 히코시로X타케야 하치자에몽] 글입니다.
- 캐붕주의
- 스압주의.
- 타케야가 개새끼인 것 주의
그래도 괜찮으신 분들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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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욱하게 깔린 피안개, 지독하게 풍겨오는 피냄새, 짐승 한 마리 다가오지 않는 처참한 지옥 속에서 흐릿한 시야너머로 익숙한 형체가 아른거리는 것을 보며 조소가 흘러나왔다. 미련이도 이런 미련이가 없다. 그렇게나 오랜 세월을 아팠으면 이제 그만 포기할 때도 되었건만, 어떻게 해도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언제나 죽음의 순간에는 네가 보인다.
망설이는 버릇을 가진 동급생의 것을 그대로 베껴낸 가발을 뒤집어 쓴 너는, 언제나 뒤돌아 선 채다. 그와 꼭 닮은 얼굴로, 그와 전혀 다른 표정으로, 언제나처럼, 그렇게 웃고 있을까. 아무리 손을 뻗어도 이름을 불러도 뒤돌아봐주는 일은 없다. 단 한 번조차.
그럼에도 나는 바보처럼 또 손을 뻗는다. 죽음과 가장 가까운 이 순간에 오직 너만을 시야에 담으며. 너의 이름을..
'선배'
어..라..?
눈앞의 형체가 흔들렸다. 어지러울 정도로 흐릿한 시야에 느릿하게 감았다가 천천히 다시 뜬 눈에 비춰지는 것은 여전히 뿌연 세상, 그 안에 있는 단 하나의 인영이었다. 조금 전까지 그 자리에 있던, 너무나도 익숙하기에 아픈 그가 아닌 다른 이. 다른 아이. 어린 아이.
'타케야선배'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한 애정을 담고,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아파.
그것이 눈을 뜨고 첫 번째로든 생각이었다. 두 번째는 추워. 그리고 세 번째는 그래도 따듯해. 스스로도 모순된 생각이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반창고가 붙지 않은 뺨에 닿는 공기는 차가워 몸을 떨면서도, 왼손만큼은 어째서인지 무척이나 따듯해 안도감에 깊은 숨을 내쉬었다. 삐걱, 하고 온 몸이 비명을 질렀다.
살아있구나, 나.
깊은 호흡에 크게 오르내린 복부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지는 지독한 통증에 잠시 숨을 고르고, 느릿하게 두어 번 눈을 감았다 뜨며 초점을 되찾았다.
어디인지 모를 이곳은 어두웠다. 폐쇄된 공간의 갑갑한 어둠이 아닌, 늦은 밤의 고요한 어둠이 방안을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환기를 위해서인지 아주 조금만 열어놓은 창문 너머에서 차디찬 밤의 공기가 들어와 한바탕 방 안을 휘젓다가 유유히 다시 흘러나갔다. 흐르는 공기에 짙은 약초 냄새가 섞여있었다. 약방인가? 아니면 의원? 어째서인지 무척이나 익숙한, 그리움마저 베여있는 냄새에 사고가 유려히 흐르지 않았다. 아니, 사고가 흐르지 않는 것은 멍하니 울리는 듯 한 두통 때문인가.
시각도, 후각도, 청각도, 모든 감각이 둔탁하게 저려오는 것과 같은 유쾌하지 않은 감각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손가락은, 움직였다. 대체 얼마동안이나 움직이지 않은 건지 감각은 굉장히 무뎠지만 그래도 분명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언제나 죽음의 순간을 넘기고 난 후에 가장 먼저 하는 것은 감각을 확인하는 행동이다. 손가락을 까딱, 발가락도 까딱, 오른쪽 눈을 감고 깜빡, 왼쪽 눈을 감고 깜빡, 다시 한 번 숨도 쉬어보고,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 주변의 소리도 들어본다. 그 모든 것이 끝나면, 그 모든 것이 아무 이상 없이 무사히 이루어지면 그제야 진정으로 안도한다. 사지가 잘 붙어있구나, 눈도 두 짝 다 붙어 있구나, 숨도 제대로 쉬어지는 구나, 귀도 잘 들리는구나, 이번에도 나는 제대로 잘 살아남았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선은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 다음은 왼손의 다섯 손가락. 그렇게 차례대로 움직여가려던 찰나에 손가락에 걸리는 무언가를 알아챘다. 왼손이었다. 까딱, 하고 움직이는 다섯 손가락이 무언가를 건드리고 있었다. 제 손보다는 작았으나 분명한 크기를 가지고, 그럼에도 있는 듯 없는 듯 살포시 왼손을 덮고 있는 그것은 굉장히, 따듯했다.
생각은 눈을 뜬 그 순간에 미쳤다. 아파, 추워, 그리고 따듯해.
따듯해?
왼손이?
어째서?
그 순간 둔하게 가라앉아 있던 사고능력과 감각이 깨어나는 걸 느꼈다. 본래 어둠에 익숙해져있던 시야가 밝아지고, 그제야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머리에 차오르는 의문에 뻣뻣하게 굳어져있는 고개를 내려 왼손을 봤다. 손이 있었다. 내 것이 아닌, 내 손을 잡고 있는 손이.
누구?
가장 처음으로 떠오른 얼굴은 역시나 그 녀석이었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멍청하게 기대하며 긴장해버린다. 하지만 역시 아니겠지. 제 멋대로 기대하고, 제 멋대로 긴장하고, 제 멋대로 실망하고, 제 멋대로 아파한다. 지긋지긋한 되풀이에 쓴웃음이 지어질 무렵, 머릿속에는 또 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어째서일까. 언제나 한 사람 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바보 같은 머리였는데. 죽음과 가장 가까운 순간에도, 겨우 살아남아 눈을 뜨는 순간에도, 바보처럼 오직 한 사람만을 생각하던 머리였는데. 언제부터, 나는 너를 떠올리게 되었나.
느릿하게 눈을 끔뻑이며 내게 온기를 전해주던 손을 따라 올라가자 보이는 얼굴은 역시나 방금 전 떠올려버린 그 얼굴이었다. 아프게 아른거리지도 않고, 나를 등지지도 않고, 선명하게 내 앞에 서서, 나를 보며, 나를 부르는 후배. 연인이나 연모하지 못했던 아이. 그럼에도 웃으며 내 손을 잡아오던 아이는 이 순간에도 내 손을 잡은 채 잠들어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이부자리 끝에 걸터앉아, 손을 놓치지 않기 위해 구부정히 허리를 숙인 채 불편하게 잠들어 있는 아이의 모습에 가슴 한 구석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연인이라면, 이불속에 들어오지는 못해도 그 옆에 몸을 뉘여 잠들어도 괜찮을 텐데. 연인이니까, 붕대투성이의 몸을 끌어안지는 못해도 그 옆에 붙어 누워 체온을 나누며 잠들어도 괜찮을 텐데. 그저 소박하게. 그나마도 강하게 쥐지 못하고 그저 위에 포개는 정도로만 닿아있는 아이의 손에서 전해져오는 아릿한 온기가 눈물이 날 정도로 따듯했다.
"히..코..시로.."
삐걱이는 손가락에 힘을 줘 포개어진 손을 맞잡으며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뻑뻑하게 마른 목에서는 소리가 매끄럽게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건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분명하게 아이의 귀에 닿은 듯 했다. 움찔, 하며 아이가 움직였다. 그리고 수초도 흐르지 않아 성급하게 눈을 뜬 아이는 홱,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살폈다. 눈이, 마주쳤다.
끔뻑끔뻑
바보처럼 작에 입을 벌리고, 멍하니 내 얼굴만 바라보며 눈을 깜박이던 아이의 얼굴에 울음이 번지는 것은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포개져 있던 왼손에 다른 한 손마저 포개며 마치 기도하는 것처럼 아이는 고개를 숙였다. 물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이다..."
아이는 잠시간 그러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손만을 잡고. 울고 있을까. 숙여진 고개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천천히 들어 올려진 얼굴에는 더 이상 울음이 묻어있지 않아, 단지 그 사실에 안도했다. 밤의 어둠이 색을 가려 어쩌면 붉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눈가가 보이지 않아 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고개를 들고 잠시 숨을 고른 후, 아이는 조심스럽게 나의 왼손에서 한 손을 떼 뒤쪽에 놓여있던 물 컵을 들었다. 그제야 나는 굉장히 목이 마르다는 것을 눈치 챘다. 한 손에 물 컵을 들고, 잠시 동안 아이는 난감한 표정으로 물 컵과 누워있는 나를 번갈아보고 있었다. 누워있는 사람에게 물 컵을 들이 댈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일으켜서 마시게 하면 될 텐데, 내 상태가 그렇게 좋지 않았던 것일까. 아이는 물 컵을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고는 그 옆에 있던 둥근 수저를 들었다.
한 모금에도 미치지 못할 적은 양의 물이 천천히 갈라진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 젖은 입술에 닿아 온 두 번째 수저에는 역시 한 모금에는 미치지 못하나 첫 번째 수저의 것보다는 많은 양의 물이 있어, 작게 입을 벌리자 조심스레 들어와 입 안을 적시고 목을 축였다. 그렇게 두어 번 반복해서 넘어간 물에, 빡빡해진 고철에 기름을 칠한 듯 그제야 내 몸이 내 몸 같아진 기분이 들어 옅게 숨을 내쉬자 아이는 수저를 내렸다.
손도, 발도, 목도, 전부 제대로 움직였다. 미처 끝내지 못했던 확인 작업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천천히, 오른손으로 이불을 짚고 몸을 일으켜보려하자 온 몸이 비명을 질렀다. 이불에서 손가락 한마디조차 떨어지지 몸은 금세 다시 푹신한 이불에 파묻혀야만했다. 크윽, 하고 짧게 신음을 하자 아이가 놀라 제 몸에 손을 얹었다.
"아직 움직이시면 안돼요..! 니이노선생님께서 지금으로썬 다행히 생명에 큰 지장이 없다고 하셨지만, 상처가 심해 덧나게 되면 굉장히 위험할 수 있으니까.. 당분간은 절대 안정을 취하라고 하셨어요. 누워 계세요."
"니이노..선생님..?"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디고 있자 들려온 걱정 어린 말 사이에 섞여있는 익숙한 이름에 놀랐다. 니이노 히로카즈. 3년 전 즈음에 졸업한 인술학원의 보건교사의 이름이었다. 졸업하고 나서도 자주는 아니었지만 가끔 아이를 만나기 위해 학원에 얼굴을 비추었었다. 그 때마다 미처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자잘한 상처들을 봐 주시던 상냥한 선생님. 그 이름이 어째서 지금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일까. 어렴풋하게 익숙하던 방안의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놀라는 내 모습에 덩달아 눈을 동그랗게 뜨던 아이가 그제야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듯 했다. 아이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내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차분하게 정돈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 인술학원의 의무실이에요. 사흘 전, 우연히 에고노키타케에서 쓰러져계신 타케야선배를 발견하게 되서.. 보통의 경우, 그 근처에서 안전한 곳을 찾아 치료를 하는 것이 옳았겠지만 프리닌으로 계시는 타케야선배를 함부로 아무 의원에게 보일 수는 없었고, 이반에는 전문적인 치료가 가능한 보건위원도 없어서 여기까지 모셔오게 되었어요. 설령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임무 중이셨을 선배를 멋대로 내린 판단으로, 멋대로 이곳까지 모셔와서 죄송합니다."
조곤이 말을 끝내고 아이는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런 아이의 태도에 솔직히 상당히 당황했다.
아이가 말한 것은 옳았다. 임무 중인 닌자는 그 일이 끝나지 전까지 함부로 자리를 이탈해서는 안 된다. 임무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자리를 이탈하는 것은 곧 임무 실패로 연결되고, 프리닌에게 임무실패는 곧 신용을 잃는 것을 의미한다. 신용을 잃은 프리닌은 죽는다. 잔인하고 매정한 세계에서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가 한 일은, 어쩌면 자신을 죽이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너는 그곳에서 나를 살렸다.
진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건네는 아이의 모습은 흐트러짐 하나 없어, 그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아이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감정에 죄송함은 있을지언정 후회는 없었다. 사람을 살렸던 그 행동이 감사받아야 할 것이 아닌 지탄받아야 할 것임을 분명하게 알고, 그럼에도 행하고, 후회하지 않는다.
언제 이렇게 어른이 되었나. 자신이 기억하는 아이는 이렇게나 어른이 아니었다. 본래 이반의 학급위원장으로서 여느 또래 아이들보다는 어른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하반에게 지는 것이 싫다며 울기도 하고, 시험에서 100점을 맞았다며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랑하러 달려오다 넘어지기도 하고. 한없이 작게만 보였던 어린아이가, 언제 이렇게나 강한 어른이 되었나.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아이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뭐라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살려주어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아이가 사과한 그것을 다시 강조하며 야단을 쳐야하나. 어느 것도 답이 되지 않았다.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아이의 성장에 분명 맑게 깨었을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결국 한참을 멍하니 있던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비겁한 회피였다.
"우연히..라고?"
"아.. 마침 그 날 이반의 실습장소가 에고노키타케성이어서."
짧게 말을 마친 아이의 한 손이 이마 위에 내려왔다. 이전에는 이마를 겨우 가릴 정도로 작았던 손이 지금은 이마를 덮고 눈가를 가릴 정도로 커졌다는 것에 놀랄 틈도 없이 잠시간만 닿았다 떨어져 간 손은 옆에 놓여있던 물이 한가득 담겨 있는 바가지를 들고,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미열이 남아 있어요. 새로 물을 떠올 테니 조금 더 주무세요."
상냥하게 웃으며 말한 아이는 천천히 걸어 의무실을 나갔다. 드르륵, 문이 닫히며 그 틈으로 작아지는 아이의 뒷모습에 어쩐지 굉장히 울적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아이는 분명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 울음보다 더 슬프게 보였던 것은 왜일까.
작게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 온 밤바람이 왼손을 스치는 서늘한 감각에 움츠리며, 그제야 나는 손에 닿아있던 따스함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연분홍 꽃잎이 흩날렸다.
하늘거리며 눈처럼 날리는 꽃잎 아래 서 있는 것은 그을은 듯 가라앉은 황록색의 닌복을 입은 나와 선명한 바닷빛의 청색 닌복을 입은 아이. 먼저 입을 연 것은 누구였더라. 나였던 걸로 기억한다. 한 손에는 졸업장을 들고, 다른 한 손을 가볍게 올리며 나는 웃었다.
'배웅 나와 준거야? 고마워라-'
고작 2년밖에 함께하지 못한 제 위원회 선배들을 보내며 울었던 걸까, 붉어져있는 아이의 눈가에 미소가 나왔다. '졸업 축하드려요' 하고 물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아이가 귀여워, 들어 올렸던 손을 아이의 머리 위에 가볍게 얹고 쓰다듬어 주었다.
'2년간 고마웠다, 히코시로.'
그렇게 말했었다.
진심어린 감사를 담아. 정말로 고마웠으니까. 나에게로 보내 준 한없이 순수한 애정이.
나 자신이 눈치가 빠른 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4살이나 어린 아이의 마음을 보지 못할 정도로 둔하지도 않았다. 한없이 순수하게 나를 바라보던 아이의 시선 안에 깃들어 있는 것이 분명한 애정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모를 리 없었다. 나와 같았으니까. 내가 그 녀석을 보는 시선과 너무나도 닮아있었으니까.
그것을 단순한 동경이라고 치부할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다만, 바라고는 있었다. 이 작은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깨닫지 못하기를. 존경하는 선배를 향한 동경이라 생각하고 그 포근하게 부푼 마음을 가지고 자라, 내가 없을 훗날에 그 의미를 잃어버리기를. 아이 안에서 그것이 정말로 단순한 동경이 되어버리기를. 그렇게 바랐다.
비겁하고 치졸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아이가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위원회의 후배는 아니었으나, 2년간 제법 많은 시간을 함께 한 아이었다. 그런 아이가 이룰 수 없는 감정에 아파하는 일은 없기를 바랐다. 나와 같은 아픔을 겪는 일은 없기를, 진심으로 그렇게 소원했다.
하지만 학급위원장이란 얼마나 우수한 녀석들뿐이었나.
'타케야선배..'
내 손에 거칠게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할 생각도 않고 올곧게 나를 올려다보는 시선에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흩날리는 꽃잎과 같이 옅게 물든 뺨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물기가 스며들어 있는 젖은 목소리의 울림이 귓가에 닿은 순간, 나는 그만 주저앉고 싶어지는 것을 참아내야만 했다.
'좋아해요'
잔인하게만 들려오는 아이의 순수한 고백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무릎을 꿇어 몸을 낮춰 아이를 끌어안았다. 긴장한 것인지 뻣뻣하게 굳어진 채, 바르르 떨리고 있는 손이 보였다. 종종 울던 아이를 달래었던 것처럼 조심스레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언제나 나의 이 서툰 손길에 안심하며 긴장을 풀고 품으로 몸을 기대 오던 아이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날 만은 나의 서툰 달램도 아이의 굳은 몸을 녹이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교차해 시야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떨어지는 꽃잎이 어지럽기만 했다. 나, 어떻게 하면 좋아. 아이를 달래는 척 숙인 고개 안으로 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것을 간신히 억누르고 물었다. 닿지 않는 나의 사랑에게 물었다.
너를 좋아하는 내가, 나를 좋아한다 말하는 이 아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가슴으로 수백 번, 수천 번을 물어도 들려오지 않는 대답에, 들려올 리가 없는 대답에 나는 또 다시 멍청하게 아파한다. 눈을 감아도 눈꺼풀 너머로 나를 등진 너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해 숨이 막혀왔다.
이런 아픔을, 이 아이가 겪게 해야 하나.
진심으로 부딪혀오는 아이의 마음을, 나는 거절해야만 했다. 고개를 저으며, 그 애정을 받아줄 수 없음에 미안해해야했다. 씁쓸하게, 그러면서도 미소 지으며, 나에게 보내준 애정에 감사를 고해야만 했다. 하지만 좌우로 저어야할 고개는 굳어진 채 움직이지 않았고, 감사의 말을 내뱉어야할 목소리는 그저 조용히, 아이를 부르고 있었다.
'히코시로'
취한 것이 분명했다. 지독하게 코끝을 찌르는 꽃내음에. 오랜 시간을 보낸 정겨운 공간을 떠나왔다는 쓸쓸함에. 끝끝내 닿지 못한 채 후회와 아픔으로 범벅되어버린 연정을 끌어안고, 등을 보이며 떠나가는 너를 그저 바라보는 것 밖에 하지 못했던, 그 구토가 치밀 만큼 고통스러운 슬픔에, 나는 분명 취해있었다. 아니면 미쳐있었거나.
아이를 끌어안고 있던 두 팔을 풀고, 손가락 한마디 정도밖에 되지 않는 공간을 둔 채 아이와 떨어져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작은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거짓말을 내뱉고 말았다.
'좋아해'
입술을 뚫고 흘러나온 나의 독에 아이는 무슨 말을 했었더라. 감사의 말을 했던가. 의심의 말을 했던가.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놀라움으로 크게 뜨여진 아이의 눈동자가 어째서인지 눈물로 젖어 들어가던 것만큼은 기억 속에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 눈이 잊혀지는 일은 없겠지.
몽롱한 정신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웅성거림에 내가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밖으로 나가는 아이의 등을 보았던 것 까지는 기억이 나니, 잠든 것은 그로부터 조금 후인가. 후회밖에 남지 않은 과거의 꿈을 꾼 탓에 정신은 몽롱하게 뜬 상태로 기분은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울적한 기분은 얼마 가지 못했다.
"타케야선배..! 죽지마세요-!!"
"죽으시면 안 돼요...!!"
"응, 토라와카, 산지로. 알았으니까 일단 내려와주지 않을래."
몸을 누르는 묵직한 고통과 소란스러운 주변에 눈을 뜨고, 제 몸을 누르고 있던 후배들에게 간청했다. 후배들도 내 몸 상태를 완전히 간과하지는 않았는지 직접적으로 몸을 누르지는 않았지만, 양 옆에서 내게 매달리듯 앉아 있는 후배들의 무게 탓에 아까까지만 해도 차디 찬 바람으로부터 내 몸을 포근히 감싸주던 이불은 이미 흉기가 되어 중상의 몸을 압박하고 있었다. 솔직히, 죽을 만큼 아팠다.
"아..! 타케야선배..! 토라와카! 산지로! 빨리 내려와! 타케야선배 힘드시잖아!"
"잇페이, 여기 의무실이니까. 조용히 해야 해.."
"그런 건 알고 있어, 마고지로! 그것보다 토라와카! 산지로! 빨리 내려오라니까!!"
눈물콧물 범벅이 되어 엉엉 울고 있는 토라와카와 산지로, 그런 두 사람에게 호통 치는 잇페이와 잇페이에게 조용하게 당부하는 마고지로가 보였다. 본래 조용해야 할 공간에 시끌시끌한 소리가 채워짐에 갓 깨어난 머리가 멍하니 울렸다. 눌리고 있는 몸은 정말 굉장히 아팠다. 하지만, 그럼에도 걱정스러움을 한껏 담아 아직까지도 울먹이며 저를 보는 후배들의 모습에 그만 웃음이 나와 버리는 것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뜨문뜨문 학원을 방문했을 때에도 후배들을 따로 만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만나는 것은 졸업이래인가. 몇 년 만의 선배와의 재회가 이런 식이라면 울만도 했다.
처음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하지만 아직까지도 삐걱이며 비명을 지르는 몸을 애써 무시하고 두 팔을 들어 올려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자, 난 괜찮으니까."
예전처럼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토라와카와 산지로의 눈에서는 그렁그렁하게 맺혀있던 눈물이 다시금 또르르 떨어져 버렸다. 선배..! 하며 품으로 파고드는 후배들이 이제는 한 팔로 안아줄 수 없을 만큼 커졌다는 것에 놀라기도 잠시, 예전과 다름없이 어리광부리듯 안겨오는 후배들이 귀여워 결국 끌어안아주는 것 대신 팔 안에 감쌀 수 있는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옆에서도 훌쩍이며 눈물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이지..! 놀래키지 말아주세요..!! 놀라는 건 하반 녀석들의 바보짓만으로도 충분하단 말이에요!"
"뭣..! 야!!!"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두 손으로 훔치며 내뱉는 잇페이의 말에 그만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에고노키타케에서 쓰러져 있던 나를 발견한 것이 이반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이 후배는 피칠갑을 한 채 숨이 멎어가던 나를 봤다는 것이 된다. 그 누가, 자신의 선배의 그런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응. 걱정시켜서 미안해."
잇페이의 말에 품안에 있던 두 하반의 후배들이 벌떡 일어나 준 덕에 비게 된 손을 뻗어 머리를 토닥여주자 잇페이는 그런 내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꼭 맞잡아 왔다.
"정말.. 무서웠다고요.."
두 손을 모아 내 왼손을 포개고, 잇페이는 기도하듯이 고개를 숙였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를 옆에 앉아 있던 마고지로가 잡아주고 있었다. 울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무서웠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는 후배의 모습과 겹쳐지는 누군가가 보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아이는 잇페이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죽어가던 나를 보고, 그 아이 역시 두려움에 눈물지었을까. 내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던 한 아이를 떠올리며,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잇페이의 손을 꼭 잡아주는 것뿐이었다.
오전 수업시간을 알리는 헤무헤무의 종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후배들은 허겁지겁 의무실을 뛰쳐나갔다. 분명 굉장히 급하게 뛰어간 것일 터인데도 예전처럼 우당탕 하고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새삼스럽게도 저 아이들이 이제는 예전의 나와 같은 5학년이구나, 하고 놀랐다. 정말 많이 컸구나.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아이들은 성장해 있었다.
후배들이 모두 나가고, 그제야 의무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조용해진 공간에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아직 서늘했지만 바람과 함께 들어와 방 안을 감싸는 햇볕이 따스해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조용함은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코끝을 간질이는 그리운 장소의 냄새가 되려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후배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내가 이곳에 온지 벌써 닷새가 지났다고 했다. 처음 눈을 떴을 때 그 아이가 말했던 사흘과 함께 계산해보면, 다시 잠들고도 이틀이나 더 지났다는 것이 된다. 임무는, 분명 실패겠지.
이번 임무의 실패로 나의 프리닌으로서의 신용이 얼마나 떨어졌을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나는 이미 그곳에서 죽은 걸로 되어있을 지 모른다. 가지고 있던 에고노키타케의 기밀문서는 빼앗겨 버린 걸까. 처음 눈을 떴을 때, 몸의 감각을 확인하며 함께 확인 해 보았을 때, 품 안 깊이 넣어 두었던 문서는 찾을 수 없었다. 치료를 위해 빼 두었다면 그 아이가 나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러니 이곳으로 올 때 이미 문서는 나에게 없었다는 것이다.
한심했다. 임무를 실패해 버린 것도, 형편없이 다쳐 후배들 걱정이나 시키고 있는 것도. 무엇보다 한심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은 그 아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다.
어째서일까. 이틀 전, 의무실을 나가기 직전까지 내 손에 포개어져 있던 그 온기가, 온기가 달아나던 그 소름끼치는 감각이, 잊혀지지를 않는다. 울음과도 같던 아이의 웃음도 가슴 한 곳에 바위처럼 얹혀 도무지 사라지지를 않았다. 단 한 점의 후회도 없다는 목소리로 나를 살린 것에 고개를 숙이던, 이제는 아이라 부르기조차 민망할 만큼 성장해버린 아이의 모습이 잔향처럼 남아 떠나가질 않았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이렇게나 그 아이가 머릿속에 남아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그저 어린아이일 뿐인데. 형편없는 내 욕심에 희생된 가여운 아이일 뿐인데. 그랬었는데.
복잡하게 꼬여 무겁게 맴돌던 상념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그 때 드르륵, 하는 문소리가 들려왔다.
"아, 깨어있었군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깊은 상념이 깨어짐과 동시에 의무실 안으로 누군가 두 사람이 들어왔다. 과연 인술학원 관계자답게 발소리는 없이, 하지만 분명하게 존재를 드러내며 다가오는 기척에 눈을 뜨자, 앞서 다가오던 사람이 빙긋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니이노선생님이었다. 언제나처럼 자상하게 미소 지으며, 이불 옆에 앉아 인사하는 내 머리위에 손을 얹어 열을 재시고는 니이노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제 열은 전부 내린 것 같아 안심입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니 당분간은 얌전히 누워 계세요. 아, 그전에 붕대를 갈아야하니.. 쿠로키군, 조금 도와주시겠어요?"
니이노선생님의 말씀에 이어 공손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그 이름에, 움찔하며 굳어지는 몸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니이노선생님은 새로운 붕대를 가지러 가신다며 몸을 일으켜 선반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덕에 눈을 마주칠 수 있게 된 또 한 명의 방문자는, 역시나 그리운 얼굴.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타케야선배.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그 아이와 같은 학급위원장. 언제나 침착하고 어떤 일에도 냉정함을 잃지 않았던 학급위원장위원회의 또 다른 후배. 줄곧, 줄곧, 그 녀석의 시선이 향하고 있던, 어쩌면 아직까지도 향하고 있을 그곳에 있는 아이. 내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후배가, 그곳에 있었다.
니이노선생님이 만드신 약의 효과는 확실해서, 처음 눈을 떴을 때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웠던 것과 비교해 지금은 후배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온몸이 비명을 지르며 통증을 호소하는 것은 여전했지만, 일어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충분한 발전이었다. 그럼에도 참기 어려운 통증에 작게 신음을 흘리며 미간을 찌푸리자 쿠로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금 더 일으키는 속도를 늦춘다. 나와 비교했을 때는 아직 작았지만, 굳게 자란 팔이 내 몸을 단단하게 받치고 있었다.
쿠로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단순히 몸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겨운 숨을 고르고 있자 니이노선생님이 새 붕대를 들고 다가왔다. 조심스럽지만 능숙한 손길로 붕대를 푸르고, 약을 바르고, 깨끗한 붕대로 다시 상처를 감았다. 깊고, 넓은 상처부위에 붕대를 가는 작업만 해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겨우 치료가 전부 끝났을 즈음에는 나는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지쳤다.."
"아직 쓰러지지 말아주세요."
차분하게 말하며 쿠로키는 니이노선생님에게 무언가를 받아 내 눈 앞으로 가져왔다. 약그릇이었다. 독한 약냄새를 풍기며 그릇 가장자리까지 넘실거리고 있는 짙은 고동색의 액체에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나 보다. 등을 받치고 있던 쿠로키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쓴웃음 지으며 작게 입을 벌리자 용서 없이 다가 온 그릇은 입가에 닿고, 기울여져, 담겨 있던 액체를 입 안으로 흘렸다.
"수고하셨습니다."
혀를 마비시킬 듯 한 쓴맛에 절로 구겨지는 미간을 억제하지 못한 채 간신히 그릇을 비우자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로 말하는 쿠로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을 옆으로 치우고 물에 적신 수건으로 입가를 닦아주는 손놀림에는 아까와 같은 엄함은 사라지고 상냥함이 흘렀다. 이 상냥함에 그 녀석은 반한 것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쿠로키에게도 나는 그렇게 유쾌한 존재가 아닐 터인데, 그저 상냥하게, 차분하게 나를 대했다. 나보다도 한참은 어른스러운 그 태도에 되려 다시 쓴웃음이 흐르려는 것을 참고, 나는 쿠로키가 건네는 물 컵을 받아 입안으로 흘렸다. 입안의 쓴맛은 지워지지 않았다.
사용한 붕대와 약재들의 정돈을 끝내고 약상자를 닫으며 그런 나와 쿠로키를 보고 있던 니이노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시고는 몸을 일으켰다. 다시 한 번 충분한 휴식을 강조한 뒤, 니이노 선생님이 홀로 의무실을 나가는 것을 보며 작게 한 숨이 흘러나왔다. 애초부터 치료를 도울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었던 듯, 쿠로키는 니이노선생님이 나가는 순간에도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다만 내가 건넨 물 컵을 받아 옆에 치워둔 그릇과 함께 놓고, 받쳐주는 팔이 없어도 내가 충분히 혼자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 등을 받쳐주던 팔을 거두고 구겨진 이불을 정리하며 옆으로 물러나 앉았을 뿐이었다.
이불 옆에 자세 바르게 앉은 쿠로키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 너머로 과거에 그가 했던 말이 들려오는 듯 했다.
'히코시로를 울리지 말아주세요.'
그렇게 말했었던가. 동그란 눈을 바로 뜨고, 겁 없이 선배를 올려다보며, 또렷하게, 강하게, 그렇게 말했었다. 제 친구를 울리지 말아 달라 부탁하는 그 목소리는 지독할 정도로 차분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듯 했었다. 이 아이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 내게 얼마나 잔인한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는 있는 걸까. 알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렇게나 곧은 눈빛을 할 수 있었던 거겠지.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어린아이의 순수함은 때로는 공포로 다가온다.
순수하게 보내오는 애정. 순수하게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 그 모든 것이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됨을 아이들은 모른다. 그렇기에 깨끗하고 올곧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봐 온다. 숨이 막혀왔다.
내가 좋아하는 그 녀석이, 너를 좋아하고 있어.
치졸하게 차오르는 독을 목구멍 너머로 삼켜 넘겼다.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봤자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모든 것이 수렁으로 빠지게 될 뿐이다. 그럼에도 이렇게나 목이 간질거리는 것은, 추악하기 짝이 없는 질투라는 놈 때문이겠지. 이렇게나 형편없는 나에게, 그 아이는 어떻게 그렇게나 따듯한 애정을 보내줄 수 있는 걸까.
"타케야선배"
차분하게 불리는 목소리가 다시 잠겨 들어가던 상념에서 나를 깨웠다. 눈앞에 있는 후배는, 정갈한 자세로 허리를 곧게 펴고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타케야선배, 선배에게 반드시 드려야 할 말이 있어요. 고된 치료로 피곤하시겠지만, 시간을 조금 내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애초에 거부권 따윈 없는 주제에. 비틀리게 돌아가는 사고에 조소가 튀어나왔다. 한심한 것에도 정도가 있다. 후배를 상대로 이게 뭐하는 건지.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삼킨 채 복잡한 표정으로 시선을 맞추자, 쿠로키는 별 다른 반응 없이 언제나처럼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우선 하나. 선배는 모르셨겠지만, 아니, 다른 아이들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사실 이번 실습에서 에고노키타케에 가기로 되어있던 건 우리 하반이었어요."
".....뭐..? 하지만 에고노키타케는 이반의 실습 장소였다고.."
"네, 히코시로가 그렇게 말씀드렸겠죠. 다른 아이들도 그렇게 알고 있고요. 하지만, 사실은 에고노키타케에 가야 했던 건 우리 하반이었고, 이반의 원래 실습 장소는 챠미다레아미타케였어요. 그것을 바꾸기를 원했던 것은 히코시로였고, 저는 받아들였죠. 애초에 온전히 학생들에게 맡겨졌던 실습이어서 따로 선생님들께 말씀 드릴 필요도 없이, 결과적으로 이반과 하반의 실습장소가 바뀌어 이반이 에고노키타케로, 하반이 챠미다레아미타케로 가게 된 겁니다."
조용한 의무실을 울리는 쿠로키의 말들에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분명 열은 전부 내렸을 텐데도, 마치 열이 있었을 때처럼 멍하니 울리는 사고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본래라면 하반이 가야했을 실습장소. 그곳에 그 아이의 부탁으로 이반이 가서, 그곳에서 죽어가던 나를 발견했다? 말도 안 된다. 닷새 전, 내가 임무를 수행하던 곳은 에고노키타케성의 북쪽 외곽지역으로, 숲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본래라면 짐승들만의 터전이어서 인술학원의 학생이 실습으로 올 리가 없는 곳이었다. 게다가 때마침 내가 임무를 하던 시기에, 때마침 이반이 실습으로 적당한 많은 곳을 놔두고 그곳에 가, 때마침 아슬아슬하게 목숨이 붙어있던 나를 그 아이가 발견했다? 우연일 리가 없었다. 우연일 수가 없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상한 것들 투성이 인 것을. 가볍게 넘겼던 그 아이의 말들 속에 감춰져 있던 많은 모순을 그제야 깨닫고 헛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쿠로키의 목소리가 여전히 차분하게, 나의 질문에 답을 한 것은 그리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정보가 있었으니까요. '타케야 하치자에몽은 그 날, 그 시간에 에고노키타케성 북쪽 외곽 지역 숲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닌자에게 쫒길 것이다. 추적자들이 노리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에고노키타케의 기밀문서. 그라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 문서를 빼앗기진 않겠지만, 그의 목숨은 장담하기 어렵다' 라는 정보가."
흐트러짐 하나 없는 표정으로 엄청난 것을 뱉어내는 쿠로키를 보며 나는 경악했다. 말도 안 될 정도로 정확한 정보였다. 너무 정확해서 위험할 정도로, 쿠로키의 입을 통해 나온 정보는 엄청난 것이었다. 에고노키타케의 기밀문서가 내 손안에 있다는 것은 나와 의뢰주 이외에는 알아서는 안 되는 사실이었다. 내가 그 숲에 있었다는 것도, 알려져서는 안 될 정보였다. 추적자들은 분명 전부 제거했다고 생각했는데.
"누구냐."
안락한 공간에서의 생활에 무뎌져 있던 감각이 곧추서는 것이 느껴졌다. 빙글빙글 도는 머릿속에서 다른 것들을 판단할 여력은 없어, 오로지 방금 전 쿠로키의 입에서 나온 정보에 대한 생각만이 맴돌았다. 남아있는 놈이 있다면, 죽여야 한다. 그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기밀문서를 빼앗겼다 하더라도, 내가 그곳에서 기밀문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그 사실 자체가 들켜서는 안 되는 정보였다. 죽여야 한다. 반드시.
그런 생각을 품고 눈앞에 있는 쿠로키를 바라보자, 아이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억눌린 듯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는 모습에 아차, 했다. 초조한 마음에 아이를 겁주어 버린 걸까. 미안한 마음에 최대한 눈가를 느슨하게 풀자 그럼에도 긴장감이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 굳게 한 번, 눈을 감았다 뜬 쿠로키가 다시 내게 시선을 맞춰왔다. 그런 쿠로키의 행동에 더욱 미안해져 조금 유한 말이라도 한 마디 건네 보려는 순간, 쿠로키의 입이 열리며 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오하마선배입니다."
"...... 하..?"
"그리고 오해하실까봐 미리 말씀드리자면, 오하마선배에게 그 정보를 주신 것은 타케야선배의 의뢰주이신 에고노키타케성의 성주님입니다. 타케야선배에게 기밀문서의 보호를 맡기셨지만 그 정보가 세어나가 상당수의 추적자가 타케야선배에게 집중될 것을 짐작하시고는 오하마선배에게 지원의뢰를 하셨다고, 오하마선배가 본인 입으로 저희에게 말씀해 주셨어요. 아, 타케야선배가 마지막까지 지켜낸 기밀문서는 오하마선배를 통해 무사히 에고노키타케 성주님께 되돌아갔으니, 그 점은 안심해주세요."
내 살벌한 기운에 놀랐을 아이를 달래기 위해 열었던 입은 아무런 말도 뱉지 못한 채, 다물어지지도 못했다. 예상치도 못했던 이의 개입, 예상치도 못했던 사건의 경과, 그리고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해결된 실패라 확정지었던 임무. 그 모든 것이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그 당혹스러움이 조금씩 가라앉아, 복잡하게 엉켜있던 실을 풀기 시작했다. 칸에몽. 그래. 칸에몽이었구나.
우수한 이반의 학급위원장이었던 녀석이었다. 그 아이와 같은, 학급위원장 위원회의 위원이자 쿠로키와 그 아이의 또 한명의 자랑스러운 선배. 짐짓 순진한 듯 장난스레 입 꼬리를 올리며 아이처럼 웃던 친우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헛웃음을 참지 못했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칸에몽의 개입은 많은 의문을 해결했다. 나의 임무와는 전혀 무관했던 인술학원의 아이들이 어떻게 나의 임무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지. 아이들이 어떻게 나를 찾아낼 수 있었는지. 그리고..
헛웃음 뒤에 내 입을 타고 흘러나온 것은 긴 한 숨이었다. 매끄럽게 풀린 의문에 대한 충족감과 분명 실패라 여기고 있던 임무가 성공한 것에 대한 안도감, 그리고 그 가운데 씁쓸하게 싹 터 있는 불만에 한 숨이 흘러나오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다. 지끈, 하고 또다시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왜 그런 중요한 일들은 아직 어린 후배들한테 말해버리는 거야, 망할 칸에몽녀석."
지끈 거리는 머리에 손을 얹고 조그만 목소리로 투정 같은 불만을 터트렸다. 그러자 가만히 그런 나에게 시선을 보내오던 쿠로키의 옅은 웃음이 배인 말이 들려왔다.
"오하마선배는, 후배에게 상냥하신 분이니까요."
"그런 건 알고 있.."
"타케야선배."
나의 말을 가르고 들어온 단호한 쿠로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말을 가로채는 것이 나쁜 버릇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이번 것은 어떻게 봐도 고의적이어서, 되려 놀라 쿠로키를 바라보자 언제 목소리에 웃음기를 담았냐는 양 그는 아까보다도 더욱 차분하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하마선배가, 어째서 저희들에게 굳이 그 정보를 주었다고 생각하세요?"
따갑게 한 마디.
그리고 한 마디 더, 그 입에서 내게는 버거운 말이 튀어나왔다.
"어째서 히코시로가 저에게 실습장소를 바꾸어 주기를 부탁했다고 생각하세요? 오하마선배에게 함께 정보를 들은 제가, 타케야선배의 위험을 알고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을 텐데. 하반에 있는 두 생물위원이 어떻게 해서라도 타케야선배를 구하고자 할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쿠로키가 내뱉는 말들이 하나 둘, 사슬이 되어 목을 졸라왔다.
어째서 칸에몽이 자신의 일을 후배들에게 알려줬을 거라 생각 하냐고?
씁쓸하게 피어오르는 해답이 숨을 막았다. 칸에몽이 자신의 두 후배를 굉장히 아끼고 귀여워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5학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학급위원장위원회에 들어가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귀여운 두 후배가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칸에몽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우리들의 관계를 눈치 채고 있었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해 보이는 그 웃음 뒤에 얼마나 빠른 눈치와, 얼마나 깊은 생각을 숨기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물론, 칸에몽이 직접적으로 나에게 그것과 관련된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마냥 무대포에 거침없는 것처럼 보여도 상냥한 녀석이었으니까. 내가 그 아이를 바라봐 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침묵해 주었을 터였다. 그것이 칸에몽이 나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최고의 상냥함이었다. 소중한 자신의 후배를 아프게 하는 나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의. 하지만 그런 칸에몽의 상냥함을 배신한 것은 내 쪽이었다.
바라봐 줄 수 없으면서도, 어설픈 상냥함이란 껍질을 뒤집어 쓴 욕심으로 그 아이를 받아들이고 말았으니까.
아이들에게, 그 아이에게 나의 상황을 알렸던 것은 그 나름대로의 복수였을까. 막혀오는 듯 한 숨에, 한 손으로 목을 감싸자 입 꼬리가 쓰게 올라갔다.
그리고, 어째서 히코시로가 실습장소를 바꿔주기를 청했다고 생각 하냐고, 그렇게 물었나.
지끈거리던 머리가 멍해지며 사고가 붕 뜸을 느꼈다. 슬픔과, 안타까움과, 그 외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파도처럼 몰려와 쓰게 미소 짓던 입술이 괴롭게 앙다물어졌다.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이반이라는 자긍심이 강한 그 아이가 어떤 마음으로 자존심을 숙여가며 하반에게 실습장소를 바꾸어 줄 것을 부탁했을지, 어떤 마음으로 에고노키타케로 달려왔을 지.
나도 모르게 그러쥔 주먹이 욱신거리며 통증을 호소했다. 만약 그 녀석이 나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답은 정해져 있었다. 달려갔을 것이다. 그 아이처럼. 자존심도 무엇도 다 버리고, 그저 그 하나만을 생각하며, 그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그 아이가 나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타케야선배."
다시 또 한 번, 강하게, 그럼에도 그 안에 분명한 상냥함을 담아 쿠로키는 나를 불렀다.
"히코시로는 선배를 좋아해요. 선배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이것이 제가 선배에게 반드시 말씀드려야 했던 것의 또 하나."
마주친 눈빛 속에 엄격함이 보인 것 같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 착각인 걸까. 어째서 알아주지를 않느냐고 책망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마 내 착각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짧게 심호흡하고, 두 손을 그러쥔 채, 쿠로키는 입을 열었다. 어쩐지 조금, 화가 나 보였다.
"히코시로는,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당신들이 생각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좋아서 당신들을 보고 있는 게 아니에요. 알고 있어요. 모르지 않아요. 그래도 좋으니까, 어쩔 수 없을 만큼 좋아하니까. 아파도, 힘들어도, 포기할 수 없는 거예요."
줄곧 곧고 단정했던 목소리가 흔들렸다. 가지런히 무릎위에 올려져 있던 두 주먹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분했던 걸까. 슬펐던 걸까. 똑바르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쿠로키의 눈에 물기가 아른거린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세상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알고 있어?
무엇을?
속이 울렁거렸다. 아까 마신 쓰디 쓴 약이 목구멍을 쑤시며 올라오는 듯이 목이, 입 안이 썼다. 도대체 지금 이 아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대체 무엇을 알고 있다고, 내게 이토록 절실하게 말하고 있는 건가. 크게 울렁이는 세상 속에 정신마저 울렁이는 것을 느끼며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토할 것 같았다.
"타케야선배"
도대체 몇 번이나 부르는 거야. 이제는 횟수를 거듭하기도 지칠 만큼 들려오는 부름에 귀를 막고 싶어져버렸다. 다그치듯 들려오는 부름에 그만하라며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틀어막은 입은 벌어지지 못하고, 그저 입술만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죄인처럼 숙인 고개 너머로 느껴지는 시선에, 차마 토해낼 수 없는 울음이 목구멍을 맴돌았다.
너는, 그 아이는, 전부 알고 있었나.
"히코시로는,"
움찔, 몸이 떨렸다. 차분한 음성을 타고 들려오는 이의 이름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파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편안해져, 울렁거리던 정신이 가라앉아 와, 그것에 또 놀라 두 눈이 크게 뜨여졌다. 숙여져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고, 아리는 눈으로 쿠로키를 시야 안에 담았다. 쿠로키는, 미소 짓고 있었다.
"선배를 좋아해요."
조용하게, 부드럽게. 아이를 어르듯, 어른께 간청하듯, 쿠로키는 목소리에, 표정에, 눈빛에 상냥함을 담아, 간절함을 담아, 내게 말했다.
"선배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훨씬 더 많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쿠로키의 곧은 시선을 피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리던 눈가가 뜨거워지며 코끝이 아파왔다. 어그러지며 젖어 들어가는 시야에 무릎을 세우고 두 팔을 세워 무릎에 기대어 숙인 고개를 묻었다. 최대한 숨을 죽이고 입술을 물어 보았지만 잇새사이로 새어나가는 신음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아득하게 멀어지는 청각 너머로 옷깃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나는 마음 놓고 숨을 뱉을 수 있었다.
왼손에서부터 번져간 온기가 온 몸을 뒤덮어 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작은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연못가에 앉아, 어린아이답지 않게 폭, 폭, 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처음 그 아이를 보았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저 아, 그 녀석네 후배구나. 그렇게 생각했었다. 저 어린 아이가 무엇이 저토록 심란한 걸까, 궁금하기도 했었다. 같은 위원회의 후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선배로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줄 수 있을까 싶어 다가가 물었었다.
'무슨 일이야?'
나의 물음에, 아니, 어느새 내가 뒤에 있었다는 것에 놀랐던 걸까. 우와악,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 휘청이다 연못에 빠져버리던 그 광경을 아직도 기억한다.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연못으로 뛰어 들어가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오자 그런 나의 품에 안겨 나를 보며 눈을 멀겋게 뜨던 아이의 모습 또한 생생했다.
작은 아이었다.
내 손바닥을 겨우 쥘 수 있을 정도로 작고 보드라운 손으로 내 손을 잡고 수줍게 뺨을 붉히며 웃던 작은 아이었다. 하지만 그 작았던 손은 어느 순간엔가 내 손을 포갤 수 있을 만큼이나 크고 단단해졌다. 늘 고개를 내려야 보였던 아이가 어느 순간엔가 고개를 돌리면 그 곳에 있었다. 마주 보면, 더 이상 아이는 크게 고개를 올리지 않아도 되었다. 나 역시 더 이상 고개를 크게 내리지 않아도 되었다.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져 어느새 그저 옆을 보면, 네가 있었다.
아이라고 생각했었다.
언제까지나, 그저 어린아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그래. 그것은 핑계였다. 어린아이니까. 그렇게 안일하고 비겁한 핑계를 대며 나는 줄곧, 줄곧 도망치고 있던 거였다. 한 곳만을 바라보기에도 벅차고 괴로운 이 가슴에 조금씩, 조금씩, 침투해오는 따스함이 너무도 버거워, 나는 고개를 돌린 채 아이를 보지 않고 있었다. 맞닿아오는 온기를 외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할 만큼 선명해 진 것은 언제부터였나.
늘 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아파하고, 괴로워하던 이 눈에 다른 이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죽음과 가장 가까운 그 순간에 그 녀석을 부르던 내 목소리만이 울려 퍼지던 그 아픈 공간에 나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언제부터였나.
그 역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대체 언제부터 나의 세상은, 그 아이의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나.
연분홍 꽃망울이 맺혀있었다.
자그맣게 고동색 가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 꽃망울들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날이 많이 따듯해졌다. 자신이 인술학원에 왔던 첫날만 해도 바람은 서늘했던 것에 비해 이제는 바람마저 포근했다. 아직 날이 완전히 따듯해지지는 않았지만, 봄의 기운이 완연하게 실려 오는 바람에 절로 입가가 느슨해졌다.
임무 중 심한 부상을 입고 후배에 의해 인술학원에 온 지도 벌써 시간이 제법 지났다. 이제 부상은 상당히 많이 호전되어 더 이상 몸을 일으키는 것에도, 음식을 먹는 것에도 후배의 도움은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 뿐인가. 지긋지긋할 정도로 오래 누워있었던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나, 지금처럼 정원으로 걸어 나와 채 피지 못한 꽃망울을 보는 것도 가능해졌다. 이제 그만, 이곳과 작별해야 할 때였다.
"타케야선배"
가만히 서서 벚나무 바라보고 있던 내 등 뒤로 기척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지런히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자 심해를 닮은 깊은 푸른색의 닌복을 입은 히코시로가 있었다. 저 색을 보는 것도 어쩌면 오늘로 마지막이었다. 그러자 많은 것들이 담겨있는 저 색이 어쩐지 종종 그리워 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아쉬운 마음을 담아 손을 뻗어 두건 끝자락을 만지자 히코시로가 당황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나올 것 같은 씁쓸함에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거두자 잠시 후, 히코시로의 입이 열렸다.
"가시는 건가요?"
조용하게 들려오는 물음에 짧게 응, 하고 대답하자 히코시로의 얼굴에 쓸쓸함이 번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으로, 금세 쓸쓸한 기색을 갈무리한 히코시로는 내게 빙그레 웃어 보였다.
"부디 몸 조심히."
그렇게 말하며 언제나처럼 웃고 있는 히코시로의 모습에 거두었던 손을 뻗어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조금 거칠게 흐트러지는 머리 아래로 히코시로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그렇게 있자 히코시로가 천천히 손을 뻗어 왔다. 느릿하게 뻗어진 두 손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쥐었다. 입술이 오물거렸다.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 조금 열렸다가 금세 닫히고, 또다시 열렸다가 닫히던 입술은 이내 굳게 다물려 옅은 호선을 그려내었다.
결국 히코시로는 다시 웃었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빙그레 웃으며 잡았던 손을 놓고, 나를 배웅했다.
그런 히코시로의 행동에 다시금 쓴웃음이 흘렀다. 분명 연인임에도 히코시로의 행동은 한 없이 조심스러웠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생각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자신의 생각을 요구한 적조차, 딱 한 번에 그쳤다. 언제나 가만히, 그저 빙그레 웃으며, 그 자리에서 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나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너는 홀로 아파했던 건가.
"히코시로"
내가 쉽게 떠날 수 있도록 한 걸음 물러서 있던 그 거리에 내가 발을 내딛었다. 딱 한 걸음이었다.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히코시로에게 다가가 두 팔을 뻗었다.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팔을 낮게 내리지 않아도 닿는 거리에 있는 히코시로를 끌어안았다. 히코시로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이 옷자락 너머로 선명하게 느껴져 왔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포옹한 것이 언제였더라. 그래, 그 때였다. 우리가 연인이 된 날. 이름뿐인 연인이 된 그 지독한 날에도 나는 히코시로를 이렇게 끌어안았었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가끔 만났을 때에도 그저 얼굴을 보며 차를 마시거나, 그것도 아니면 서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거나, 그것이 전부였다. 히코시로는 단 한 번, 가끔 만나달라는 그 사소한 부탁을 제외한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아니, 히코시로는 바라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바라지 못한 것이었다.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나를 보며 피멍울이 드는 가슴을 쥐어 잡은 채 웃었던 거다. 조심스레 바라보는 시선을 알아채지 못하는 나를 보며 쓸쓸하게, 아프게 웃었던 거다.
나와 같은 아픔을 겪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는 히코시로에게 나보다 더 큰 아픔을 안겨주고 말았다. 그것이 미안해서, 너무 미안해서, 그리고 고마워서. 그런 아픔 속에서도 나를 바라봐 준 것이, 포기하지 않고 곁으로 다가 와 준 것이 너무 고마워서, 사랑스러워서. 나는 품에 안은 히코시로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분명하게 느껴지는 온기가 너무나도 따듯했다.
"진급시험 통과한 거, 축하해."
굳어있던 등이 미약하게 떨리며 아, 하고 발음을 흘렸다. 그리고 다짜고짜 건넨 그 말에 조금은 풀어진 몸을 울리며 축하에 대한 감사를 돌려주려는 히코시로의 말을 끊고 나는 정말로 하고 싶었던 뒷말을 이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졸업식이겠네."
그것은 내가 히코시로에게 처음으로 한 재회의 약속이었다. 언제나 내가 소리 없이 인술학원으로, 아니면 히코시로가 외출했을 때 우연히, 그런 만남만이 전부였다. 단 한 번도 찾아가겠다는 말도, 만나자는 말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말하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고 싶었다. 멍청하고 비겁한 나의 이 마음이 전해질 거라 믿었다.
그리고 역시나 너는, 나의 믿음을 놓치지 않았다.
"정말..이죠..?"
조금씩 물기가 번져가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흐르고 말았다. 응, 하고 굳게 대답하자 떨림은 가진 팔이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져 나의 등을 감싸왔다. 천천히, 마치 예전처럼 달래듯이 등을 쓸어주자 히코시로가 움찔, 몸을 떠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에 슬퍼지는 마음을 삼키고 히코시로의 어깨에 잠시 고개를 묻었다. 나의 등을 감싸고 있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다시 살짝 고개를 들고, 나는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히코시로"
나의 행동에, 나의 목소리에, 나의 부름에, 무언가 눈치를 챈 것일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는 뜯어질 것처럼 강하게 나의 옷자락을 쥐고 있는 히코시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쩐지 목이 메여왔다. 잘 전달되어야 할 텐데. 너무 오래 아파한 그에게, 이 작은 목소리가 잘 들려야 할 텐데. 괜스레 걱정되어 어설프게 목을 다듬는 동안 어째서인지 눈가가 아려와, 눈을 감아버렸다.
따스하게 느껴지는 체온. 등의 옷자락을 움켜쥔 두 손. 물기가 섞인 듯 한 숨소리와 빠르게 고동치는 심장의 소리. 그 모든 것을 느끼며, 그 모든 것을 그리며, 나는 말했다.
"좋아해."
그 순간, 히코시로의 몸이, 숨이, 소리가 멈췄다. 하지만 이내 아, 으, 아, 하고 채 언어가 되지 못한 말이 히코시로의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얼음이 녹아내리듯이 사르르 풀리며 그제야 내 몸에 완전히 기대오는 몸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다만 등의 옷자락을 세게 움켜 쥔 손은 풀릴 기미도 없이, 강하게, 더욱 강하게 끌어당겨졌다.
귓가에 들려오는 흐느낌이 점차 커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어린아이의 울음과 같이 엉엉 소리를 내며 히코시로가 울음을 터트렸을 때, 나는 그저 다시 한 번 그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연분홍 꽃잎이 흩날렸다.
흐드러지게 피어 하늘하늘 춤추듯 떨어지는 꽃잎들을 보며 나는 찻잔에 입을 대었다. 그리웠던 시절, 그리웠던 이들과 함께 종종 찾아왔던 당고가게의 그리운 차 맛이 입 안에 짙게 퍼지며 깊게 머물렀다. 찻잔을 든 손은 내리고, 다른 한 손을 뻗어 옆에 놓아둔 접시 위의 당고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그 때와 조금도 변치 않은 그리운 단맛이 입 안을 채우는 것에 절로 입가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먹던 당고를 입에 물고, 나는 다시 손을 뻗었다. 접시 위에 놓여있던 당고를 하나 더 집어 들어 뒤쪽으로 건네자, 자연스레 뻗어져 와 내가 건넨 당고를 받아드는 손이 있었다.
"올 줄 알았어."
넌지시 건넨 말에 대한 대답은 조금 늦었다. 당고를 먹고 있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이었는지, 잠시간의 시간을 두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모르는 척하는 것이 참으로 그 다웠다.
"졸업식 말이야."
그의 모르는 척을 눈감아주며, 하지만 분명하게 말하자 또 다시 잠시간의 침묵이 생겨버렸다.
그 침묵에 쓴웃음이 지으며 나는 재촉하는 대신 가만히 정면을 응시했다. 흩날리는 꽃잎들이 부드러운 잔향을 싣고 코끝에 스쳐왔다. 찻잔을 내려놓고 그 옆으로 손을 뻗자 손끝에 걸리는 꽃잎들에 입가의 쓴맛은 사라지고, 절로 달큰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꼈다.
어떤 꽃을 좋아할지 몰라 한 참을 고민했다. 인술학원의 졸업식은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되려 굉장히 서글픈 날이었다. 안락했던 공간에서 쫓겨나, 차디찬 세상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날이니까. 더 이상 자신을 보호해 줄 방패도, 자신의 위험에 함께 맞서 줄 검도 없이, 오로지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그 시작의 날이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 나의 이 손으로 누구를 죽여야 할 지 모른다. 그런 가혹한 세계에 발을 들이는 그런 날에, 어쩌면 꽃은 굉장히 어울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축하하고 싶었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고, 당당하게 어른이 된 것을. 한 발자국 더, 나에게 가까워져 준 것을. 나는 기뻐하며, 축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꽃을 샀다. 답지도 않게 꽃다발을 끌어안고, 약속대로 이곳을 찾았다.
"기다리고 있을 거야, 분명."
지그시 눈을 감으며 조용하게 말했다. 그것은 나에게 하는 말이자 그에게 하는 말이었다. 움찔, 하고 아주 찰나의 아주 미세한 반응이었으나 그는 반응을 보였다. 드물게 솔직한 반응을 보이는 그 모습에 다시금 방금 전과는 다른 웃음이 흘렀다.
"사부로"
목구멍을 지나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너무나 평온해서 되려 내가 놀랐다. 이렇게나 쉽게 부를 수 있게 되었구나. 손끝에 닿아있는 꽃잎을 어루만지며 살며시 등을 기대었다. 상냥한 그는 피하거나 하지 않았다. 등 너머로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아니면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여전히 보이지 않는 그 얼굴에 씁쓸해지는 한 편, 더 이상 심장이 죄는 듯 한 고통은 없어, 그저 가만히 등을 기대고 내 심장이 평온하게 뛰고 있는 것을 느끼며 미소어린 말을 전했다.
"나, 널 좋아했었어."
다른 것을 바라본 여유도 없이, 오롯하게 바라보며. 이 목숨을 바쳐 너를 얻을 수 있다 한다면 기꺼이 그리 했을 만큼, 나는 너를 좋아했었다. 나를 등진 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차디찬 허공에 손을 뻗는 괴로운 나날이었음에도, 그것마저 사랑스러울 만큼 나는 너를 사랑했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팠던 사고가 유려히 흘렀다. 되짚어 본 기억은 고통스러운 것들뿐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그리 아프지 않았다.
"그래..."
그리고 맞대어진 등을 울리며 들려오는 조용한 목소리에 그만 웃어버렸다. 요령 좋은 주제에 곧게 부딪혀 오는 진심에는 언제나 서툴다. 그 뛰어난 연기실력으로 모르는 척 해도 되었을 텐데, 몰랐다며 거짓말을 뱉어도 되었을 텐데. 한없이 서툴게,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부로의 모습에 되려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지 못하며, 나는 등을 더욱 깊게 그의 등에 파묻었다.
사부로, 사부로.
나는 이제 이렇게 뒤돌아선 너의 등에 나의 등을 기댈 수 있게 되었다. 나를 부르지 않는 너의 목소리에도, 나를 향하지 않는 너의 시선에도, 조금의 씁쓸함은 남아있으나, 그럼에도 이렇게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가슴이 벅찰 만큼 좋았지만, 가슴이 찢어질 만큼 아팠던 너와의 시간이 이제는 괴롭지 않았다. 너와의 대화에 더 이상 나는 숨 막히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사부로, 사부로.
솔직히 지금은 아직 조금 아프다. 오랫동안 품어, 오랫동안 나를 태워왔던 불꽃은 아직 작은 불씨로 가슴에 남아, 너를 생각할 때면 가끔씩 데인 듯이 아파왔다. 하지만 사부로, 나는 이제 웃을 수 있었다. 지금 당장 다른 이의 옆자리에 선 너를 볼 자신은 없었지만, 훗날, 네가 그 사람 옆에서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본다면, 마주 웃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 될 만큼. 나는 이렇게나 괜찮아졌다.
그것을 너는 알고 있을까. 알아차렸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감정에 민감하고, 누구보다도 섬세했던 녀석이 나의 말에 담겨 있는 현재를 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부로는 천천히 맞대어진 등을 떨어뜨리고는 차분하게 시선을 마주해 왔다.
"하치자에몽"
고요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망설이는 버릇을 가진 친우의 것을 그대로 베껴낸 얼굴에서 흘러나왔다.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한 시선이 너무도 상냥해서, 어쩐지 눈가가 아릿해져 오는 것 같았다. 그런 나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 사부로는 옅게 눈가를 휘며 미소 지었다.
"고맙다."
상냥한 미소와 함께 내뱉어진 말에 헛웃음이 튀어나오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감사인 것일까. 놓아 보내준 것에 대한 감사일까, 아니면 지금껏 좋아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일까. 어느 쪽이든 지독하기 짝이 없는 외사랑을 제멋대로 완전히 종결지어버리는 그 잔인한 한마디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지었다. 하여간 성격 참 못됐다. 그것을 그대로 입 밖으로 꺼내 전했더니 사부로는 새삼스럽다는 듯이 웃는다. 예전과 같이 짓궂게 올라간 친우의 입 꼬리를 보며 나 역시 웃었다.
끝이었다. 정말로.
어딘가 후련한 듯한, 아린 듯한, 복잡하고 미묘한 감각을 느끼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보이는 하늘에 해는 어느새 중천에 떠 있어, 이제 그만 가야할 때를 알리고 있었다. 자리를 털고 몸을 일으켰다. 옆에 두었던 꽃다발을 손에 꼭 쥐고, 꽃을 보자 바보처럼 피어오르는 미소를 애써 억누르고 있자 일어선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부로의 시선이 느껴졌다.
굳게 다물린 입술과 가라앉은 시선으로 내 손에 든 꽃다발을 바라보고 있는 사부로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읽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아, 나는 방금 전의 복수로 조금 주제넘은 한마디를 건넸다.
"사부로, 후배를 울렸다간 무서운 너구리씨가 쫒아올지도 모른다?"
씨익,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사부로의 눈이 잠시 동그랗게 떠지더니 이내 바람 빠지는 듯 한 소리를 내며 피식, 웃었다.
"그것만은 사양하고 싶은데."
고개를 절래 절래 지으며 말하는 그 말에 동감하며 나는 웃었다. 사부로를 바라보며, 시선을 맞추고, 웃어보였다. 그런 나를 보며 사부로 역시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꽃다발을 든 반대 쪽 손을 들어 보이며 새삼스러운 인사를 했다.
"잘 지내!"
그렇게 말한 뒤, 몸을 돌렸다.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렇게 몇 걸음 전진하자 뒤에서 잔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야말로'.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하지만 분명한 상냥함을 담아 들려오는 목소리에 절로 웃음이 나와 웃으며, 나는 뒤돌아보는 일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꽃잎이 흩날렸다.
익숙한 흙길을 밟으며 나는 소중한 꽃다발을 한 번, 눈앞에 흩날리는 꽃잎들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 날, 오늘과 같이 어여뻤던 날에 네가 나에게 했던 것과 같은 축하의 말을 내뱉으며 이 꽃다발을 건네면, 너는 웃을까. 참을 수 없이 포근한 웃음이 흘러나왔다.